모세오경

받은 은혜 나눌 사랑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8. 11. 18. 13:16




받은 은혜, 나눌 사랑

출애굽기 26: 15-30

 

출애굽기 2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만드는 방식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절에서 14절까지는 성막 지붕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15절에서 30절까지는 성막의 벽을 만들어 세우는 방법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39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주된 내용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이 성막제작 방법도 역시 누구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말씀이 됩니까? 예수님에 대해 증언해 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초적인 이해 위에서 오늘 우리는 성막의 재료와 제작 방법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계신 은혜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첫 번째 살펴볼 것은, 성막의 벽을 이루었던 50개의 판자들입니다.

 

15-16절입니다. 너는 조각 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되 각 판의 길이는 열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반으로 하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던 성막을 보면, 그 길이가 약 14미터, 너비가 약 4.2미터, 높이가 약 4.5미터 정도 되었습니다. 이 성막을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평수로 계산하여 보면 약 18평가량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성막의 벽을 만들 때, 싯딤나무 즉 사막에서 나는 가시나무50개의 판자를 만들어서 그 판자들을 이어 붙여서 성막의 벽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각 판자의 폭은 약 70Cm, 길이는 약 4.5m가 되게 하고, 모든 판자는 금으로 그 겉을 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을 만드는데 사용된 재료인 싯딤나무는 사막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못나고 옹이가 많고 단단한 가시나무였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성소인 성막의 재료는 최소한 당시 최고급 목재였던 레바논의 백향목 정도 되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레바논 백향목이 아닌 사막에서 자라서 향도 없고 마디와 상처투성이인 싯딤나무 즉 가시나무로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막의 재료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성막의 판자는 구원을 받아 성도가 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 된 우리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들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각종 죄성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 가지 아픔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상처들을 마음속에 품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재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에게 수많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오래 산 사람일수록 그 받은 상처는 많고 그 받은 상처의 깊이는 더 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가시나무의 바깥을 모두 금으로 싸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은 비록 각종 죄와 죄성과 상처와 아픔들을 가지고 있는 마치 옹이와 상처가 많은 가시나무와 같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하시고, 또 때가 되매 불러주시고 구원해 주셔서, 이때부터 예수님의 은혜로 감싸여서 살아가게 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모습을 가시나무판자를 정금으로 싼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덧입고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은 은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율법주의도 가짜이고 은사주의도 가짜이고 구복주의도 가짜이고 종교다원주의도 가짜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죄와는 상관이 없는 완전한 의인이 된다고 하는 구원파의 주장도 가짜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이전에도 죄인이었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죄성과 상처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가시나무와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가시나무가 레바논의 백향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가시나무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마치 정금으로 쌓여진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가시나무로 만들어진 판자 위에 정금으로 입힌 성막의 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멘. 우리들은 다른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신분을 얻은 것입니다.

 

성막의 판자를 보면서 우리가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죄와 상처가 많은 천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무한하신 은혜로 그런 우리들을 정금으로 감싸주셔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을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한 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100개의 무거운 은 받침입니다.

 

19절입니다. 스무 널판 아래에 은 받침 마흔 개를 만들지니 이쪽 널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고, 저쪽 널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지며 21절입니다. 은 받침 마흔 개를 이쪽 널판 아래에도 두 받침 저쪽 널판 아래에도 두 받침으로 하고

 

하나님은 정금으로 싼 판자들마다 그 아래쪽에 뾰족한 두 개의 촉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촉을 은으로 만든 은 받침에다가 꼽아서 성막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19). 그러니까 판자 하나 마다 두 개의 촉을 만들어야 했고, 그 두 개의 촉은 각각 한 개씩의 은 받침에 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만들었던 은 받침 한 개의 무게는 출애굽기 38:27절을 보면 각각 한 달란트였습니다. 은 백 달란트로 성소의 받침과 휘장 문의 기둥 받침을 모두 백 개를 부어 만들었으니 각 받침마다 한 달란트씩 모두 백 달란트요.”

 

한 달란트를 오늘 우리의 미터법으로 하면 33.75kg으로서 이 때 만들었던 은 받침이 100개였으니 그 총 무개는 약 3.4톤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무거운 은 받침을 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막의 벽은 얇고 가벼운 판자 위에 금을 입혀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막의 벽을 세울 은 받침은 어울리지 않게 너무 무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막의 판자를 세울 받침을 이렇게 무거운 은 받침 위에 꽂아 세우도록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무거운 은 받침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즉 사막지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세울 땅이 단단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강한 모래 바람이 불어오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쳐야 할 터를 다지고 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막의 기초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무거운 은 받침으로 성막의 기초를 삼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무겁고 튼튼했던 은 받침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성막의 판자를 세울 기초가 되었던 이 은 받침들은, 성도들의 신앙의 기초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이 은 받침과 같이 우리 신앙에 무겁고 튼튼한 기초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 신앙이고, 또 이 신앙은 절대로 무너질 수 없는 신앙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이런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바치신 것 아닙니까? 죄인 된 우리들의 생명의 가치와 하나님의 생명의 가치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치 없는 우리들의 생명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값지고 고귀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바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 18평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성막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 약 3.4톤이나 되는 엄청난 은을 그 받침으로 사용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어떻게 조그마한 텐트 하나를 치는데 3톤이 훨씬 넘는 은을 그 받침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시려고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무엇을 알려 주시려고 그 무거운 은 받침을 사용하도록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 무거운 은 받침을 통해 우리 신앙의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보여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에베소서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베드로전서 1: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이런 말씀들은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된 일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 무거운 은 받침을 사용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한 가지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막의 받침을 더 귀한 금으로 만들지 왜 은으로 만들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출애굽기 30:13절 말씀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이것은 이스라엘 모든 남자는 매년 은 반 세겔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법입니다. 전에 하나님은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 반 세겔씩을 그 생명의 속전으로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들에게 속전을 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었던 그 유월절 밤에 심판의 천사가 애굽의 장자를 죽일 때,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죽이지 않고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 심판 사건 때문에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에서 해방되어 나왔고, 또 그들은 애굽 사람들이 주는 금은보화를 얻어가지고 애굽을 나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의 기적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그 유월절 사건을 기억하여서, 너희를 천사의 심판에서 살려주고,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 준 생명 값을 내라는 뜻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의 속전을 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자를 죽음에서 살려 주신 그 은혜,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켜주신 그 은혜, 애굽의 금은보화를 가지고 나올 수 있게 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면서, 한 사람이 1년에 한 번씩 은 반 세겔씩을 생명 값으로 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거둔 은으로는 성막을 짓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는 이것으로 성전을 수리하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속전을 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7:24-29).

 

그러면 속전이 무엇입니까?

속전은 생명 값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 세겔11.4g이니, 반 세겔이면 5.7g 쯤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사용하는 단위로 계산하면 약 한 돈 반정도 되는 양입니다. 은 한 돈 반이 한 사람의 생명의 속전으로 내야 하는 양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생명의 값으로 내는 은의 양은 이렇게 작았습니다.

이 작은 속전의 은의 량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그 생명의 속전으로 드리는 것은 은 한 돈 반정도 되는 적은 양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을 위해 드리신 보배로운 피는 약 3.4, ‘90만돈이나 되는 큰 은혜라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성막의 은 받침입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고 경배하고 예배하는 것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은혜는 크고 놀라운 은혜인데 우리가 주를 위해 행하는 보답은 작고 보잘 것 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평생 갚고 갚아도 못 갚을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사도 바울처럼 늘 빚진 자의 심정으로 서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이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레야 교만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은을 생명 값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고 팔 때에는 언제나 은으로 그 값을 치렀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 때 은 20에 팔았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 때 은 30에 팔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생명 값을 은으로 내게 하신 하나님께서 동일은 은으로 성막의 기초를 만들게 하신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실 것인데 그 보배로운 피가 바로 온 세상 죄인들의 죄 값을 지불하는 속전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6절에서는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 곧 대속 물로 주셨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으로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피 공로위에 서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신약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는 이 속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속전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속전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슈퍼에 가서 물건을 사고 돈을 내면 영수증을 줍니다. 왜 영수증을 줍니까? 영수증은 이 물건 값으로 이만큼의 돈을 내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증명서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물질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얻은 수확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것은 내가 거둔 이 모든 수확물들이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었다. 라는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영수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속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속전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낸 속전은 반 세겔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을 향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반 세겔 밖에 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치르신 그 값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값싼 것이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거저 주셨지만 우리에게 그 복음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치루신 대가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음 안에서 살려주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치르신 은혜가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무거웠던 은 받침입니다.

 

하나님은 이 은 받침과 같이 보배로운 피를 흘려 그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사셨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이중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된 것이라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창조를 통해서 우리 몸이 하나님의 것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는 이 말씀 속에서는 예수님께서 흘려주신 보배로운 피를 통해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또 구원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몸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두 번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속전의 은을 드리는 헌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는 12장에서는 이런 우리의 삶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

 

세 번째 살펴볼 것은, 성막의 입구를 항상 동쪽으로 내었던 이유입니다.

 

18절과 20절 말씀을 보면, 성막 벽을 세울 때 남쪽과 북쪽에는 20개의 널판을 세웠고 22절 말씀을 보면 서쪽에는 6개의 널판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23-24절 말씀을 보면 동쪽에는 널판 두 개를 겹쳐서 양쪽에 세워 기둥이 되게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막의 동쪽에 문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둥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성막의 판자를 두 개씩 묶어세우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막을 세울 때 왜 항상 그 입구를 동쪽으로 내게 했을까요?

동편은 해가 뜨는 곳입니다. 말라기서를 보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을 공의로우신 태양이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막의 정문이 언제나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바라보도록 한 것은, 우리가 언제나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공의로우신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성도들은 그래서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의 몸을 이룬 성도들은 비록 그 몸은 여전히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의 마음과 그의 눈은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주목하고 또 이 세상을 목적으로 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비록 이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예수님과 예수님이 가져다주신 하나님 나라를 주목하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히브리서 12: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바라보고 사모하고 목적 삼고 또 본을 받으며 살아야 할 대상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복음서의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 풍랑 속을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그도 출렁이는 물 위를 밟고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닌 파도치는 물결을 바라보는 순간 물속에 빠져들어 갔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가 예수님을 목적하지 않고 세상을 목적하는 순간 시험에 들고 또 실패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이 땅에 존재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성경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믿고 성경말씀을 마음속에 품고 그 말씀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삶이고 또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삶인 것입니다.

- 증권을 사둔 사람들은 매일 증권의 오르내림만 바라보고 삽니다.

- 부동산을 사 놓은 사람은 그 부동산이 얼마나 오르는지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 통장 4개로 재테크를 하고 있는 사람은 금액이 불어나는 통장만 바라보게 됩니다.

- 어떤 이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녀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행복은 이런 것들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미래가 있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로 이 모든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마치 싯딤나무처럼 가시가 있고 상처가 많고 그래서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그 자녀 삼아주셨고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경말씀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살펴볼 것은, 판자들을 연결했던 금 띠 고리는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26-29절입니다. 너는 조각 목으로 띠를 만들지니 성막 이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성막 저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성막 뒤 곧 서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이며, 널판 가운데에 있는 중간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고, 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 널판들의 띠를 꿸 금 고리를 만들고 그 띠를 금으로 싸라.”

 

하나님은 금으로 씌운 판자들 중간에 금 고리를 만들어 달아서 금으로 싼 조각 목 막대기를 끼우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막의 벽을 이루는 판자는 무거운 은 받침위에 꼽혀 있어서 안전하였지만 성막의 벽은 조각 목 막대기를 통해서 더욱 안전하게 하나로 연결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를 연합시키는 사랑의 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막의 판자들은 무겁고 견고한 은 받침위에 꼽혀 있어서 안전했지만, 또 옆에는 금 고리로 연결되어서 더욱 안전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그리스도와의 연결되어 살아야 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성도들과도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혼자 외롭게 힘쓰고 애쓰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독불 장군처럼 다른 성도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와 사랑을 연결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은 개인적으로는 금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또 신앙 안에서는 예수님과 깊이 연결 되어서 살아야 하고, 교회 안에서는 다른 성도들과는 사랑의 띠로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큰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만 드리고 가는 것을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는 사랑 안에서 하나의 영적 가족을 이룬 공동체 교회였습니다. 여기는 오늘날과 교회에서 흔히 보는 개인주의가 들어설 곳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 다른 어려운 성도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과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며 사는 삶은, 선을 행하는 나와 도움을 받는 사람이 서로 구분이 되는 개념입니다. 여기에는 각 개개인이 살아가는 삶이 전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통용은 다릅니다.

물건을 통용하려면 한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너와 나의 구분이 없어지고 너의 소유 나의 소유의 구분이 없어져야 합니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개념입니다.

 

또 재산의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구성원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온 500여명, 그 중에서도 10일 동안 기도에 전념하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120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000명의 성도가 더 늘어났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된 것을 보고 이날 약 5,000명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믿었던 사람들 중에는 사회지도층이었던 사두개인, 바리새인, 제사장의 큰 무리도 있었고, 사회 하류층인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들도 있었고, 그리고 외국에서 살다가 성지 순례를 왔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 가장 문제가 되었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겠습니까?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것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에 살다가 성지 순례를 왔던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이 사람들은 준비한 여행경비를 가지고 수개월의 시간이 걸리는 성지순례를 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유월절에 이루어진 예수님의 고난의 사건을 목도하고, 또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좀처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은혜의 감격 속에서 날다마 성전에 모여 기도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돌아갈 시간이 지체되면서 어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갈 여행경비까지도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형제가 당하는 이런 어려움을 알게 된 예루살렘 교회성도들이 그 소유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사도들은 이것을 성지순례 온 각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던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당시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든지 온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믿음이 없이 성도들의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까지도 이 일에 동참하게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 오순절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의 사랑의 배려를 경험한 순례자들이, 그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교회와 같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후대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하러 사방으로 나가서 보니 그곳에는 이미 교회공동체가 세워져 있는 곳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마을이나 도시 전체가 예수를 믿는 곳도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희망은 예배만 드리고 헤어지는 그런 교회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거듭나 영적 가족 공동체를 이룬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소유한 생명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있었던 선한 행위를 어느 한 개인이 행한 선행이 아닙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 공동체 가운데서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아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된 성도들 사이에서 있어야 할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일 뿐 아니라 예배의 공동체이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성막의 벽을 서로 연결하였던 조각 목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막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시청각 교재일 뿐 아니라, 성막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보여주고 있는 것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받은 은혜입니다.

먼저 벽을 이루는 판자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형편없는 인간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금으로 쌌다는 것은, 금 같은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피로 씻어서, 새로운 신분을 부여 받은 성도들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판자의 아래를 받치고 있던 은 받침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치르신 값이 얼마나 값지고 큰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보여주고 있는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성막의 문을 동쪽으로 낸 것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이 큰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보고 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우리가 나누며 살아야 할 사랑입니다.

성막의 벽인 정금으로 감싼 조각목이 서로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사랑 가운데 하나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참 모습입니다.

 

성도들의 모습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은 은혜를,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과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받은 은혜를 나누며 살아가는 삶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 앞으로 우리 교회가 사역해 나가는 삶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높임을 받게 하고, 예수님이 주신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전해 주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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