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 같이 지키심
신명기 32:9-10
1. 들어가는 말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형에서를 피하여 밧단 아람으로 가는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백성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든지 늘 지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지켜주심의 은혜를 힘입고 살았던 사람들의 고백도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시편 16:5절 말씀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산업을 지켜주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 시편 17:8절에서는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지켜주시되 마치 우리가 눈동자를 지키고 보호하듯이 그렇게 지키고 보호해 주신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2.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는 말의 의미는?
그러면 ‘눈동자 같이 지켜주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신체 중에서 가장 예민한 곳이 눈입니다. 손에는 먼지 묻고 흙이 묻어도 그냥 지낼 수 있습니다. 얼굴에도 먼지나 흙이 묻어도 그냥 지낼 수 있습니다. 일을 하다가 머리에 먼지가 많이 쌓였다고 해서 불편한 점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눈은 다릅니다.
우리 눈에는 조그마한 티끌 하나만 들어가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눈에 있는 신경조직은 아주 예민하여서 티끌하나만 들어와도 알아차리고 고통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눈동자에 들어온 조그만 티끌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세밀하게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자식’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눈은 티끌하나만 들어가도 큰 고통을 느낄 정도로 아주 예민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작은 눈에 큰 자식을 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자식이라고 말할까요?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렇습니다.
자식을 눈에 넣는 아픔은 굉장히 큰 아픔이지만 이 아픔보다는 그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식을 눈에 넣는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그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때 그 고통이 얼마나 크셨겠습니까? 그러나 그 고통보다 죄인이 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더 크시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참아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눈동자 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사람들을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그리고 우리들의 삶 속에서 우리는 이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구약성경의 증거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노아라는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노아가 살던 시대는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던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도를 넘은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와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구원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노아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와중에 노아를 구원해 주신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노아를 마치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시다가 온 세상이 심판을 받게 되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구원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의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죄악이 관영하였던 노아의 때에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하였던 소돔성, 동성연애가 팽배했던 음란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 성은 불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불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실 때에 천사를 보내셔서 소돔성 성안에 살고 있던 믿음의 사람 롯과 그 가족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사건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음란한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 성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그 중에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믿음의 사람 롯과 그 가족에게 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그 심판의 와중에서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여서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가서는 애굽의 군대장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또 애굽의 군대장관 보디발의 아내의 죄 때문에 누명을 쓰고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시위대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요셉을 지켜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섬기며 살았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삶을 살았던 요셉을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시면서 늘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나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자 요셉을 높이셔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입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전쟁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이들은 비록 전쟁포로 신세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함께 해 주시면서 눈동자 같이 지켜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다니엘의 세 친구는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한 풀무 불’ 가운데에서도 구원을 받았고,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 굴’ 속에서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눈동자 같이 지켜보시며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처 하갈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처 하갈은 본 부인인 사라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서 가출하게 됩니다. 이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갈은 비록 종의 신분이고, 이방인의 신분이었지만, 아브라함의 집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하갈을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시다가 필요할 때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갈은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보고 계시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둘째, 신약성경의 증거입니다.
이방인 고넬료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을 살자 하나님은 그를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시다가 베드로를 초청하여 복음을 듣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던 병자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병을 고쳐보려고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을 살았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 사람도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시다가 베데스다 연못가로 친히 찾아가서 그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거라사인의 광인입니다.
이방인이었던 이 사람은 군대 귀신이 들려서 거라사인 지방의 무덤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도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시다가 친히 거라사인 지방까지 찾아가셔서 군대 귀신에게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수가성 여인도 있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다섯 둘 정도로 불행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여인을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시다가 유대인들이 잘 다니지 않는 사마리아 길로 친히 가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셋째, 기타 예들입니다.
이런 예는 신. 구약성경에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뿐 아니라 오늘 우리 현실 속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사람들을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시다가 필요에 따라 도움을 베풀어주시고, 필요에 따라 구원도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켜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만물들은 다 무엇으로 창조하셨습니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늘의 궁창에 광명 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으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 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물들은 생물을 번성케 하라”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땅의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하시매 그 말씀하신 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은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아 있으라” “남자와 여자가 있으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창세기 2:7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는, 이미 있는 땅의 흙을 취하여 사람의 모양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 즉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으셔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은 어떤 존재입니까?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손으로 친히 만드신 첫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품 중에서도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걸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화가 고호나 피카소 등등 인간 화가들이 그린 작품들도 어떤 것은 그 가격이 수 백 억 원 하는 것도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고려청자의 값도 엄청납니다.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여사가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행복한 눈물(Happy Tears)`이라는 작품은 만화를 옮겨 그린 그림인데 350억 원을 호가 한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작품도 그것이 누구의 작품이냐에 따라서 이렇게 높은 가격이 매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들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오직 인간은 손으로 직접 빚어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참 가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과 짐승을 비교해보면 다른 점이 많습니까? 유사한 점이 더 많습니까? 유사한 점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동물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인간은 하나님이 직접 손으로 만드신 작품이라는데 그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비록 그 사람이 잘났든지 못났든지, 똑똑하든 미련하든지, 지혜가 있든지 우둔하든지 이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의도와 목적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작품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건강하여 그 육체적인 기능을 잘 감당하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작품인 것이 아닙니다.
중증의 심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 그래서 육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존중합니다. 아니 용납할 수 없는 범죄를 한 죄인들 그래서 사회법정이 사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는 그런 죄인들에게 까지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런 사람들도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작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지금은 어그러지고 굴곡 되고 외곡 되어 있지만 그들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한편의 작품인 것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인간의 참 가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작품이라는데 있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작품이고 여러분도 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되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걸 작품들인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수 백 억 원을 호가하는 고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보관하고 간수하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비싼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그냥 길거리에 아무렇게 걸어 놓아두겠습니까?
그림 중에서 요즘 가장 비싼 가격으로 팔리는 그림이 고호의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수 백 억 원이 나가는 고호가 직접 그린 그 자화상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보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아서 소장하고 있는 진품 고려청자가 있다면 어떻게 보관하시겠습니까?
이런 작품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먼저 그 작품이 변색되고 변질되지 않도록 최신 시설을 마련한 화랑에 그것도 완벽한 보안기능을 갖추고 있는 그런 곳에 그것들을 보관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 만큼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실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작품 중에서도 유일한 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에게서 눈을 때시지 않고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시편 121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세밀하게 지키시는가 하면, “낮의 해도 우리를 상하지 못하며, 밤의 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하여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되” “영원토록 지키시는 분” 이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사람의 평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외모를 보고, 잘났다. 못났다. 코가 크다. 작다. 똑똑하다 미련하다. 등등의 평가를 하지만 이것은 우리를 평가하는 바른 평가가 아닙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평가는 다릅니다. 우리가 어떤 외모를 가졌든지 상관없이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애정을 가지고 직접 만드신 걸 작품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존귀한 존재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켜 보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켜 보호하고 계십니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손수 직접 만드신 귀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귀한 작품이라는 것을 한 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이 믿음을 가지고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또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실까요?
둘째, 우리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 즉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창세기 2: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먼저는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직접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난 후 하나님은 흙으로 만든 우리에게 생기 곧 하나님의 영을 우리 안에 불어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닮은 영적인 존재,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는 구별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자녀를 낳을 때, 그 자녀는 부모로부터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모든 유전적 형질을 이어받고 태어납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부모를 닮은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가정을 보면 부모와 자녀가 마치 붕어빵처럼 똑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가정들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우리는 그 자녀안에 부모가 반영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안에는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형상을 육신적으로 생각하여서 하나님도 마치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외형적인 모습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내적 성향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영적이고 인격적인 우리의 모습 안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안에 어떤 모습으로 반영되어 있습니까?
우리 장로교 신앙에서는 이 하나님의 형상을 에베소서 4:24, 골로새서 3:10절 말씀에 근거하여 “의”와 “지식”과 “거룩함”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
우리는 과거 아담 안에서 모두가 다 죄인이었지만, 이제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모습과 동일하게,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입은 새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10) 이 골로새서의 말씀에서도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새 사람을 입었는데 그 새 사람을 입게 된 모습을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함을 입은 자가 되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지식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첫 사람 아담 안에는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의’가 있었습니다.
‘오염되지 않는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소유하신 거룩함’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이야기 할 때는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가지고 있는 ‘속성’까지를 포함합니다. 이 속성에는 하나님과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공유적인 속성과 공유하지 않고 있는 비 공유적인 속성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거룩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 비 공유적인 속성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도 우리도 함께 가지고 있는 공유적인 속성입니다.
그리고 더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만물 통치권’까지 포함합니다.
이것은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고 태어난 우리 자녀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아담과 인류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물 중에서 유독 인류를 사랑하시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까지도 사랑하게 하신 이유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했습니다. 이런 아담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랑으로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보배와 같은 존귀한 작품일 뿐 아니라,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특별대우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 같이 늘 지켜보고 계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손수 빚어 만드신 특별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는 셋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셋째,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하였을 때 파괴되었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오염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완전하였던 지식은 외곡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을 따라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우리들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듯이,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고 또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고 그의 자녀가 된 우리들을 보는 것이 기쁨입니다.
우리를 보는 하나님의 기쁨을 설명해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서 사랑하는 자녀를 유괴를 당했다가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면 이것이 그 부모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마차 죽었던 자식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기쁨을 갖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우리를 보는 기쁨이 이런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탕자의 비유라고 일컬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보면 그 아버지는 잃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을 가지고 잔치를 배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다시 찾으시게 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드라크마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돈이 귀하던 시대에 귀한 동전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게 된 어떤 사람이 그 잃었던 동전을 찾은 기쁨 때문에 잔치를 베풀며 즐거워했습니다. 이 비유도 우리의 잃었던 영혼을 다시 찾은 하나님의 기쁨과 행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기쁨을 아시겠습니까?
제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기쁩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늘 기도해줍니다. 어떻게 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었나를 생각하면 너무 귀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그 즉시 하나님 나라에서는 잔치가 열린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구원 받게 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면 이렇게 잔치까지 배설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자식을 버릴 부모는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부모이시기 때문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도 결코 인간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사단의 꼬임을 받아 범죄 한 아담과 하와를 보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마치 사랑하는 자식이 친구를 잘못 사기어서 범죄 하게 되었을 때, 그 부모는 자기 자녀가 나쁜 친구들에게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아담이 나쁜 친구 같은 사단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범죄한 아담에게 주신 창세기 3:15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담이 나쁜 친구 같은 사단의 종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복음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하는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전해야 할 복음입니다.
이 복음에는 어려운 요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쉽습니다. 다만 복음을 믿는 믿음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복음을 잘 전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런데도 왜 우리 가족들은 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범죄 한 아담에게 복음의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그 자녀가 죄를 범했다고 자녀를 버리지 않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도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범죄하고 잘못된 일을 행했다고 해서 결코 버리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아니 버리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이렇게 범죄한 우리들을 찾고 찾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한 작품으로 만드시고, 또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도록 창조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죄를 범한다고 해서 우리를 버리시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범죄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어떻게 하셨습니다. 비록 범죄하고 죄를 지었지만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결정을 어디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죄를 범한 그 순간부터 이미 그 아들의 복음 안에서 우리 인류를 사랑하시기로 이미 결정하셨습니다. 성도의 견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 실수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어떻게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변하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넘어지신 분계십니까? 실족하신 분계십니까?
그러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일어서십시오. 우리가 믿음으로 새롭게 결단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잃었다 다시 찾은 아들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처럼 우리들을 대우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들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우리 자녀를 조건 없이 사랑하듯, 하나님도 영적 자녀 된 우리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마치 보석 같은 걸 작품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세상에 자녀를 버릴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께서도 영적 자녀 된 우리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 자녀 된 우리들을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5. 그러면 사람들이 형벌을 받고 심판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복음에 대한 믿음의 유무에 의해 형벌을 받고 또 심판을 받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15절에 원시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복음이 아담에게 주어진 이후 모든 인류는 이제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심판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는 기준은, 하나님께서 전해 주신 복음을 믿느냐 믿지 않으냐 하는 신앙과 불신앙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후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아담을 따라 다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면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절에서 전해주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죄에서 구원받는 방법은 오직 이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 말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아들 중 누가 이 복음을 믿었습니까?
바로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입니다. 가인은 이 믿음을 갖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재물이 거부되었다는 분노 때문에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게 됩니다.
비록 가인이 동생을 죽였지만 가인이 심판 날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정죄를 받게 되는 것은 그 동생을 죽인 살인죄 때문이 아닙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복음에 대한 믿음 없음 때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같습니다. 우리 중에는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살인을 하고 사형집행을 앞두고 있는 사형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족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그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며, 우리 가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믿음은 너무 귀한 것입니다. 믿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믿음은 심판도 이기게 합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357장)
사람들이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둘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행한 행위 때문에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켜보시면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한 일을 하나님께 직접 한 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선을 행한 사람의 경우를 보면, ‘나를 믿는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사람이라도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갇힌 자, 고아 된 자, 병든 자, 나그네 된 자 등등 에게 한 것을 예수님께 한 것으로 보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선을 행하되 특별히 믿음의 형제들에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악을 행한 사람의 경우를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는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2:8)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의 눈을 범한 것 같이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온전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셨습니다.
장차 사람들이 심판을 받고 정죄를 받는 것은 그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믿음 유무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에게 한 행위 때문입니다. 이 외 심판을 받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존귀하게 여기고, 또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성심성의를 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세상을 복되게 하는 복의 근원입니다. 또 이런 사람들을 지성으로 대하고 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은혜와 복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70억이 넘지만 하나님의 눈은 이 모든 사람들이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들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도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답답하다고 사람 찾아다니면서 위로를 구하지 않게 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게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시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을 이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버릴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도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하는 행위를 통해 은혜를 입기도 하고 심판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고 또 날마다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어떤 처지에 놓이든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