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환 목사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3. 7. 30. 21:48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8:11-21),

 

들어가는 말: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성경책입니다. 동시에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에 대해 배우게 되고, 반면에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의 모습은 언제나 대조적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봉독한 말씀에도 그러한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제목을 가지고 이 말씀이 주는 내용을 통해 함께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1. 두 개의 관심

 

순교자 손 양원 목사님이 지은 주님 고대 가에 가사를 보면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이라고 노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짧은 한 소절 안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관심이 그대로 녹아져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 신령한 것에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의 관심은 보이는 것, 육신 적인 것, 세속적인 것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의 현실적인 빵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53:5)에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자꾸만 눈에 보이는 것을 요구합니다. 본문 11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은 예수님을 힐난하고 시험하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많은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보는 것에 의지하는 자는 끊임없이 보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을 보아도 믿지 못합니다. 16장에 나오는 부자는 지옥의 고통 속에서 이 땅에 남아 있는 형제들을 생각했습니다.

 

가로되 그러면 구하오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 하게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저희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해도 안 듣는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증언은 곧 성경말씀입니다. 성경의 증언을 듣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살아 돌아가서 전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2.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경계하실 때 제자들의 반응은 전혀 엉뚱한데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누룩 하니까 당장 떠올려지는 것이 떡이었습니다. 아 우리가 떡을 두고 왔도다. 우리에게 떡이 없도다. 이것이 제자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고도 깨닫지 못하면 주님께서 책망하십니다. 망각하는 제자들에게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느냐 가로되 열둘이니 이다. 또 떡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느냐 가로되 일곱이니 이다. 그런데도 염려하는 것이 제자들의 한심한 모습인 것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떡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물론 천국 갈 믿음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믿는 믿음은 우리를 넉넉히 천국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떡과 건강과 가정문제를 비롯한 삶의 전반을 책임져 주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젼 목사님은 작은 믿음이란 구원받은 것은 물론이고 살아가면서 생기는 모든 문제들을 믿음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믿고 회심하여 새로워졌다 할지라도 아직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깨달음이 둔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사람들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라. 만일 그대가 좋은 일을 하면서 사람들은 그대에게 숨은 동기가 있을 거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만일 그대가 성공하면 그대는 가짜 친구들과 진짜 적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만일 그대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그대는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솔직 하라. 오늘 그대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일지라도 내일이면 모든 사람에게서 잊혀 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가.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가진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가장 작은 사람의 총탄에 의해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라.” ‘리더스 다이제스트’ 198212월호에 소개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3.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본문 13절에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신앙의 무리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자제들이 급하게 나서느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사람은 열 세 명인데 떡은 하나밖에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누룩은 발효 식품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합니다. 주님은 거짓된 교훈을 누룩에 비유하였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듯 거짓된 교훈은 미미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마침내 치명적인 힘을 가집니다.

 

반면에 누룩이 들어가는 곳은 전부 변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거짓된 교훈이 들어가면 그것이 온 몸에 퍼져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것은 그들의 교훈을 주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경계에 경계를 더하시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셔서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삼가란 모든 것보다 우선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 보다 우선하여 그들의 거짓되고 잘못된 교훈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교훈은 한마디로 공로주의입니다. 자기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공로만으로는 부족해서 뭔가 자기의 공로를 보태야 구원받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 의에 배불러 쉽게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 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예수님 부활 믿으면 의롭게 된다. “고 하면 그것을 값싼 복음, 구원이라고 비웃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인간의 타락한 이성과 지성은 이 공로주의가 더 타당하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희석시키는 것이 바리새인의 교훈입니다. 이들은 대단히 잘 믿는 것 같고 양심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 보는 자신의 바벨탑을 쌓는 자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헤롯의 교훈은 세속주의, 물질주의, 현세주의입니다. 이들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것이 축복의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무신론자들이나 유물론자들이 매우 바람직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처럼 그런 것이 축복의 전부라면 복음을 위해서 온갖 고난과 박해를 겪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저주받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4. 마지막 표적

 

표적을 구하는 자들은 이미 많은 표적을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표적을 보았음에도 표적을 구하는 것은 그 마음이 악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기적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이적은 심판의 이적이 아닌 구원의 이적이었습니다. 주린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로서 온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 패역한 자들을 향하여(12:39-40).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 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읽다보면 참으로 흥미 있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이적을 보고도 안 믿는 자들에게 마지막 표적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표적인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영원히 가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식을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외쳤습니다. 오늘날에도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보여 줄 최대의 표적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뿐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찬송:(369)

 

결론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본문의 사건은 무려 이 천년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 속에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왜 떡 문제로 염려하느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이러한 말씀을 주의 깊게 들을 수 있는 깨어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023730(참빛교회)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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