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제로 드려지신 예수님
레위기 1:1-9
1. 제사 제도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셔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 만민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이 세상에는 여러 민족과 여러 국가가 존재하고 있어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다릅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백성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이방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은 다 이방인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섬기며 살아야 했던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신데, 자신들은 아담 안에서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해결책을 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해결책으로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제사 제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 제도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 제도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고 해서, 이 제사제도를 통해 ‘그들의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에는 동해보상의 원칙이라는 아주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동해보상의 원칙에서 볼 때 인간의 지은 죄는 반드시 인간만이 속량해 줄 수 있습니다. 제사제도에서 흘리는 짐승의 피로는 인간의 죄를 해결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사 제도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제사 제도는 앞으로 인류의 구세주로 오실 메시야를 미리 보여주는 예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임시적인 방편으로 주신 것이 바로 제사 제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임시적인 방편을 통해서 그 믿음을 고백하고, 죄사 함을 확인하며 살았습니다.
이 제사 제도는 유대인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와 이방 종교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자신의 죄를 사해주실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다면, 이방 종교에서는 메시야에 대한 믿음이 없이 다만 희생과 헌신의 상징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유대인 제사와 이방인 제사의 차이점입니다.
2. 번제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제사제도 중에서, 레위기에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는 번제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번제는 어떤 제사입니까?
번제는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물을 가지고 와서 그 제물 전체를 불로 태워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 번제는 우리 죄를 대속해주시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실 우리 주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번제에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들이 아침저녁으로 반차를 짜서 드리는 번제가 있었는데 이것을 상(常)번제라고 하였습니다. 이 상 번제의 제물은 일 년 된 흠 없는 수양만을 사용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개인들이 그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드리는 일반 번제가 있었습니다.
이 일반 번제는 상 번제와 달리, 번제 드리는 사람의 가정형편에 따라, 소나 양이나 염소나 새 등의 제물을 드렸습니다.
3. 번제 드리는 방법과 원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제를 드릴 때, 꼭 지켜야 했던 4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바른 제물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또 레위기 22:22 절을 보면 “너희는 눈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습진이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 앞에 드리지 말며, 이런 것들은 제단 위에 화제 물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에서 보듯이 번제 드리는 첫 번째 원칙은 반드시 흠 없는 제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흠 없는 재물로 번제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메시야는 흠이 없는 분이셔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약 40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와 같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 죄의 종으로 태어난 죄인 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까?
그 모든 사람들을 영적으로 보면 모두가 다 거짓된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살아가는 삶을 보면 모두가 다 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3절 말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3절에서는 분명하게 인류의 죄를 대속해주실 메시야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메시야는, 흠이 없는 분 즉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인 인간은, 흠이 있는 인간은 결코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도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어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는 메시야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이단의 교주들은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악한 영에게 미혹을 당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이런 사람들이 갈 곳은 지옥뿐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충신 정몽주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도’ 자기가 이제까지 섬겨온 임금을 향한 충절을 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다르게 적용해 보면, ‘죄인인 인간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고 죽어 일백 번을 거듭 죽어준다고 한들’ 그 죽음이 자기자신의 죄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불교의 석가모니가 사람들을 그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회교의 마호메트가 사람들을 그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유교의 공자가 사람들을 그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비록 인류가 성인이라고 떠받들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은 비록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고 했던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가 다 죄인으로 태어나고, 죄의 종으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결국에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죄인들입니다.
그러면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남자인 아버지와 여자인 어머니를 통해 남자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남자인 아버지가 없이 성령으로 여자인 하와에게 잉태되시어서 인류 가운데 유일하게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아담의 범죄와 무관하게 태어나신 분이시며,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죄 없으신 분으로 태어나신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제를 드릴 때 제물로 사용하였던 흠이 없는 제물은 바로, 이렇게 점도 없고 흠도 없으셨던 우리 주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남자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담의 죄와 무관하게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유혹과 시험을 말씀으로 이겨내심으로, 죄의 유혹을 전혀 받지 않으셨던 분, 죄가 없으신 분이심을 친히 증명해 보여주셨습니다. 마귀는 세 번이나 거듭 거듭 예수님을 시험하며 유혹했지만,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은 결코 죄의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무죄함을 누가 증거해 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던 가룟 유다가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유다는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 라고 함으로,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거해 주었습니다.
또 예수님을 재판하고 정죄했던 빌라도가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나는 저 사람이 정죄되는 것과 상관이 없다”라고 하면서 손을 씻었습니다. 빌라도도 이 행위를 통해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죄하신 분, 점도 없고 흠도 없으신 분은 우리 주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해주시는 속죄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자기 죄를 속함 받게 되는 속죄 제물로 삼는 사람들은 그 죄를 사함받을 수 있게 됩니다. 아멘.
여기에 대해 요한일서 4: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점도 없고 흠도 없으신 예수님을,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는 희생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 죄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자신의 희생 제물로 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 사함의 1단계에서 벌써 실패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희생 제물을 드린다고 해도 그 죄가 그대로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헌신을 한다고 해도 그 죄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그 제물로 삼아 드리는 사람들은, 그 드린 제물을 통해서 자기 죄를 사함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기가 자기의 죄를 그대로 지고 백보좌 심판을 받아야 하며, 그 해결하지 못한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 형벌이 바로 지옥 형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분으로 예정하시고 보내주신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는 우리들의 믿음이 바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되고, 또 그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믿음 위에 우리 신앙을 굳게 세우고, 그 어떤 유혹의 말에도 흔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멘.
그 두 번째는, 제물은 반드시 회막 앞에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을 중앙에 두고, 회막 근처에는 레위 지파가 진을 쳤고, 그 나머지 12지파는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 세 지파씩 나눠 진을 치고 살았습니다. 이 회막의 문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제로 드릴 흠 없는 제물을 정하였으면, 그 제물은 반드시 이 회막 문 앞으로 끌고 가야만 했습니다.
이 회막의 문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요한복음 10:7 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사도행전 4:12 절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요한복음 14:6 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회막의 문이 하나밖에 없었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들어가야 했던 문이 하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실 메시야도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사람들은 천국 가는 길도 여럿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을 우리는 종교다원주의라고 합니다. 종교다원주의 자들은 불교도 천국 가는 한 길이고, 유교도 천국 가는 한 길이고, 회교도 천국 가는 한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들은 상식이 있고 교양이 있는 사람인데 반하여, 오직 예수님만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융통성도 없고 꽉 막힌 꼴통 광신자들이라고 합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진리가 둘이고, 셋이고, 넷인 것은 참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 자들의 말과 같이, 진리가 하나 이상이라는 말은 그 모두가 다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천국 가는 길에서도 같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고, 유일한 문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다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하늘에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 하늘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으십니다.
불교 신자들이 존경하는 성철 스님은, 자기 스스로 죄를 이겨 보려고 10년 동안 앉아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화식을 하지 않고 생식을 했습니다. 또 옷은 한 벌을 가지고 50년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쑤시개 하나를 가지고 20년을 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철 스님이 죽으면서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죄를 이겨 보려고 했는데 아직도 내 죄가 저 수미산보다 더 높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죄가 많은 내가 지금 죽으니 아비규환의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성철 스님은 참 정직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고행을하고, 도를 닦고, 수련을하면서 스스로 변화되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수고와 노력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스 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그 어떤 노력을 하고 그 어떤 수고를 해도, 죄인이 의인이 되는 존재의 변화를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평생 도를 닦다가 죽어갔던 성철 스님의 고백이 우리에게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기독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고린도후서 5: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요한복음 3: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기독교는 다시 태어나는 종교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중생이라고 합니다. 개는 아무리 노력해도 개이듯이, 죄인인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의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다시 태어남이 없습니다. 그저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그런 불교에 구원이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기독교 신자이며 유명한 야구 선수인 최경주 선수의 신앙 간증입니다.
사람들이 최경주 선수에게 ‘당신은 어떻게 해서 골프를 시작하게 되었고, 어떻게 해서 유명한 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줄을 잘 섰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고 합니다.
시골에 살았던 최경주 선수가 중학교에 갔을 때, 선생님이 ‘역도 선수 하고 싶은 사람 나와봐라.’ 하시길래 역도 선수가 되려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6명의 역도 선수를 뽑는데 12명이 나와서, 선생님이 그 나온 12명을 향해 너희 6명은 이쪽에 서고, 너희 6명은 저쪽 서라고 하시더니, 이쪽에 있는 6명은 골프부로 가고, 저쪽에 있는 6명은 역도부로 가라고 정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경주 선수는 골프부에 들어가 운동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골프 선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줄을 잘 서야 합니다.
내가 어느 줄에 서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내 인생이 달라집니다. 학생들도 줄을 잘 서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 쪽에 줄을 설 것인지, 아니면 놀며 시간을 보내는 학생 편에 줄을 설 것인지에 따라서 그 장래가 달라집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도 같습니다.
우리는 불교에 줄을 서서는 안 됩니다. 유교에 줄을 서서도 안 됩니다. 회교에 줄을 서서도 안 됩니다. 오직 기독교에 줄을 서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왠 은혜인지 우리 모두는 기독교에 줄을 서 있습니다.
일단 줄은 잘 선 것입니다. 줄을 잘 섰으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 유일한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아멘.
회막에 나 있는 유일한 문은 바로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는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는 신앙을 가질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 세 번째는, 제사드리는 자는 반드시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왜 제물의 머리 위에 안수를 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의 고백(Confession of Sins)이라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레위기 16:21절 말씀을 보면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찌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제사드리는 제사장이 염소의(아사셀) 머리 위에 안수하면서, 그 지은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는 행위에는 죄의 고백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지게 된 이 염소는 광야로 보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부정해졌기 때문에, 부정한 염소를 제단의 제물로 바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보냈습니다.
둘째는 고백한 죄를 제물에게 전가(Imputation of Sins)시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제사드리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안수하므로, 그 고백한 죄는 모두 염소에게 옮겨졌습니다.’
셋째는 제사드리는 사람과 그 제물의 일치(Identification of Sins)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해서 제사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대신 지고 죽어가는 제물을 보면서, ‘아! 저 죽어가는 제물이 바로 나다. 내가 저렇게 죽어야 할 존재인데, 저 제물이 내 대신 죽어줌으로 내 죄가 사함을 받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안수는 제사드리는 사람과 제물을 일치시켜주었습니다.
이런 말씀 속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들도 우리의 참 제물 되시는 예수님께 믿음으로 안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안수함으로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내 대신 십자가에서,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구주이심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나의 옛사람은 죽었고,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함께 나는 새로운 피조물로 새 생명 가운데 살게 되었다’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나의 죽음과 부활을 일치시키는 이런 믿음의 고백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믿는 이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 네 번째는, 제사드리는 사람이 반드시 그 제물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이 말씀을 보면 번제에 쓰이는 제물은 누가 잡았다고 합니까?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 제물을 직접 잡아서 제사장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번제를 드릴 때 사용되었던 제물에는 소, 양, 염소, 새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새를 제외한 모든 제물은 그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친히 죽여야 했습니다.
번제 이외 다른 제사들은 일반적으로 제사장이 제물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번제의 경우에는 달랐습니다. 오직 새의 제물만 제사장들이 죽였고, 다른 제물들은 제물 드리는 그 사람이 직접 죽여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직접 손으로 동물을 잡아보셨습니까?
작은 공충도 아니고 소를 잡고 양을 잡는 일이 쉽겠습니까? 더구나 ‘이 소나 양이 내 죄를 대신 지고, 내가 죽어야 할 그 죽음을 내 대신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잡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내 죄를 대신 지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죽어가는 그 소와 양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렇게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번제를 통해 사람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대신 지고 고통 속에 죽어가는 그 제물을 보면서,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기 위해서, 내 대신 죽음의 고통을 당하시게 되실 메시야의 고난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내가 네게 지시하는 그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아브라함은 자신의 죄를 속함 받기 위하여 짐승의 번제를 드려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죄를 대신지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그 짐승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자신 대신 죽어주실 메시야의 고난을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달랐습니다.
이번에 바쳐야 했던 제물은 짐승이 아니라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죄를 대신 지고 죽어가는 희생 제물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했던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경험하면서, 아브라함은 인류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성부 하나님의 아픈 사랑의 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해 복음의 진수를 깨달은 것입니다. 흔들릴 수 없는 복음의 확신을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어떻게 인정해 주셨습니까?
‘...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라고 하시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깨달은 이 믿음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은, 죄가 전혀 없으신 성자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고 피를 흘리면서 내 대신 죽어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 신앙 위에 굳게 서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사드리는 사람이 제물을 죽이게 되면, 제사장들은 그 제물의 피를 받아 제단에 뿌리게 됩니다. 그러면 왜 그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렸을까요?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피를 예물 삼아 제단에 바쳤다는 것은,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죄가 용서받으려면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주장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푸줏간의 종교라고 비웃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도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 비웃든지 기독교는 피의 종교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레위기 17:11절에서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9:22절에서는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도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셔야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이 선행을 하고, 고행을 하고, 도를 닦고, 수도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것을 강조합니다. 히브리서 9:12절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아멘.
기독교는 행위로 구원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단번에 이루신 영원한 속죄를 믿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믿기만 하여라. 예수님이 너의 죄값을 다치루신 것을 믿기만 하라’고 하시면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그 제물의 가죽을 벗깁니다.
이 가죽은 우리 겉 사람, 육체적인 속성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의 속성은 인간의 위선, 가식, 거짓, 외식 등등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가죽을 벗기는 것은, 인간의 위선적인 겉모습을 제거하고, 오직 진실한 부분만을 드린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 가죽을 벗긴 제물은 잘라서 물로 깨끗이 씻은 후, 모두 제사장에게 가져갑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겉모습의 호화로움이 아니라, 내면적인 진실함과 거룩함으로 서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후에 제물의 각을 뜹니다.
먼저 머리를 자르고, 가슴을 떼어내고, 엉덩이 부분을 절단하고, 발을 자르고, 목과 기관지와 심장을 떼어내고, 마지막으로 내장과 정강이를 떼어냅니다. 각을 뜨는 것은 철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각을 뜬 제물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철저히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물이 준비되면,
제사장들은 그것들을 취하여 제단 위에 놓고 불로 완전히 태웠습니다. 이것은 화제로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봉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번제는 이렇게 드려졌습니다.
4.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번제로 드려지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번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줄 희생 제물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해 주시고 난 후에 ‘너희는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내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내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내 대신 피 흘려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내 죄가 다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번제로 드려지신 예수님을 믿는 확고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구원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죄를 이기고,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원수 마귀를 이기며 살아가는 깨어 있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