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오경

태초의 약속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3. 10. 1. 14:18

태초의 약속

창세기 3:15-21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상거래를 할 때 많이 쓰는 것이 어음입니다.

어음은 물건을 납품받은 기업이 그 하청기업에 써 주는 것으로, 그 기간이 되면 현금으로 맞교환됩니다. 그래서 이 어음을 약속어음이라고도 합니다.

 

어음은 그 약속이 지켜지기 전까지는 한 장의 종이에 불과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어음을 발행한 기업의 재무 구조입니다. 재무 구조가 튼튼해야 부도가 나지 않고, 약속한 기한에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급전이 필요해서 이 어음을 팔기도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도 바로 그 어음을 발행한 기업의 재무 구조입니다. 재무 구조가 튼튼한 기업의 어음은 높은 가격을 받고 팔 수 있으나, 재무 구조가 엉망인 기업의 어음은 잘 팔리지 않습니다. 혹 잘못되어서 투자금을 날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같습니다.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대상이 정말 믿을 수 있는 분이냐?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불교 신앙을 가지고 석가모니를 믿고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믿음의 대상으로 섬기는 석가모니가 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석가모니는 한 사람의 죄인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죄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죽어 지금까지 무덤에 묻혀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문제 하나도 해결할 수 없었던 이 석가모니가, 그를 믿는 신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회교의 마호메트나 수많은 이단의 교주들도 같습니다.

과연 마호메트가 이단의 교주들이 사람들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으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런 사람들을 믿고 따르는 것은 다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우리 신앙은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 세상을 보고,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장차 믿는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하늘나라 즉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신앙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믿고 있는 대상이 정말 믿을만한 분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과 잘못된 믿음을 구분해 주는 시금석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드릴 때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확고한 창조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을 닮은 존재,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에덴동산을 조성하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게 하시면서,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라는 단 한 가지 금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이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하게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처럼 범죄한 아담은 이후 죄와 사망의 지배 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말씀처럼 결국에는 그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정죄를 받아서 영원토록 불타는 지옥 형벌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당면한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절망에 빠진 아담과 하와에게 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은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태초의 약속입니다. 오늘은 이 약속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 주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3: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죄인이 되고, 그 지은 죄에 대한 심판과 형벌을 받아야 했던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거의 모든 성경 학자들이 메시야에 대한 말씀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 주셔서 구원해 주신다는 이 약속보다 아담과 하와에게 더 희망을 주는 말씀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약속을 원시 복음이라고도 하고 혹은 태초의 약속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인류의 구세주로 오실 여자의 후손은 어떤 분입니까.

저나 여러분은 여자의 후손이 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다 남자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부모에게서 육신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여자의 후손이란? 남자의 개입이 없이 여자에게서 태어나신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남자가 없이 어떻게 여자 혼자 아기를 낳는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여자에게서 태어나실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오시게 될 그분이 인류를 그 죄와 저주와 사망과 형벌과 심판에서 구원해 주실 메시야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시어서,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진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자와는 관계가 없이 여자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대해 갈라디아서 4:4절에서는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여기서 때가 찼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의 구세주를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보내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는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때이고, 인류의 구원계획을 실행하실 결정적인 시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메시야가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3:15절에서 하신 약속의 성취로 오신 분이심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또 예수님을 율법 아래서 나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해 주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해 주시기 위해서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되었던 아담과 그 후손 된 우리들을,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다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죄를 속량해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시켜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 약속은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 약속이라고 합니다.

이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2:6-7)

 

하나님은 이 구원의 약속을 십자가를 통해 드러내셨는데, 이 세상 통치자들은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2:8)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사단이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가 승리할 줄 알았더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겠습니까? 사단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당시 유대 관원들과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승리하실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못 박았겠습니까? 이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단은 가롯 유다를 충동하여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까?

유대인의 관원들은 왜 은 30을 주고 가룟 유다를 매수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죄를 이기고 승리하신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지도 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자축했습니다. 자기들에게 늘 걸림이 되었던 예수를 이제야 제거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이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아마 큰 소리로 웃었을 것입니다.

사단은 이제 메시야는 죽었다.’ ‘내가 드디어 메시야를 이기고 승리하였다.’라고 소리 지르며 승리의 개가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더 높은 곳에서 허허 어리석은 사단이여’ ‘허허 어리석은 관원들이여하시면서 그런 사단을 비웃고, 어리석은 관원들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시편 2편에 잘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시편 2편을 보면 온 세상이 메시야를 대적할 때,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셨다.”하늘에 계신 자가 비웃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무엇이라고 하시면서 웃으셨을까요?

사단아! 너는 모른다. 너는 십자가의 비밀을 모른다. 이 십자가는 나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승리이고 나의 영광이다.’라고 하시면서 비웃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사단은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에게 부분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처럼 사단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사단의 머리 즉 그 모든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사단이 이 땅에 가져다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림으로, 이제 인류가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아멘.

 

이렇게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 생명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평생 이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생명의 문이 열리고 죽은 영혼 들이 살아나는 역사를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태초의 약속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바울이 볼 때, 이 세상에는 이 태초의 약속보다 더 귀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 태초의 약속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태초에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이 복음 안에서 승리를 확신한 바울의 고백이 로마서 16:20에 나오고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하나님이 창세기 3:15절에서 약속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상한 사단은 그 권세를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도 승리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단에게 명령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패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승리의 삶을 믿음으로 내다보면서 하나님이 사단을 너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한 것입니다. 아멘.

 

우리는 이 예수님의 승리에 연합한 승리자들입니다.

우리는 결코 영적 싸움에서 패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심으로 사단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런 승리의 역사는 사도 바울의 사역 속에서도, 우리들의 생애 속에서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예수의 승리를 믿는 성도들에게 계속 패할 것이고, 계속해서 성도들의 발아래 밟히고 상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승리의 삶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이 주신 태초에 약속에서 옵니다. 태초의 약속대로 승리하신 예수님을 통해 옵니다. 우리들도 이 태초의 약속을 믿는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 모두는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약속성취의 예표로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창세기 3:2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우리와 같은 이런 옷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였다.’라고 합니다.(2:25)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자신들이 벗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3:7)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3:10)

 

이런 말씀에서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의해 창조함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비록 우리와 같은 이런 육신의 옷은 입고 있지 않았지만 영적인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혀 주신 의의 옷, 거룩의 옷은 입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이 영적인 옷이 벗어진 것입니다.

의의 옷, 거룩의 옷이 벗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를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죄에는 원죄와 자범 죄가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세상에 들어온 것은 원죄입니다. 이 원죄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입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원죄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기 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셔서 그 원죄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시편 32:1절에서는 이 믿음으로 허물이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원죄는 오직 믿음으로 해결되는 죄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원죄가 사함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죄인이 된 아담과 하와가 지으며 살게 되는 죄범 죄는 어떻게 됩니다.

이 자범 죄는 그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 해결됩니다. 성도들의 거룩함은 이 회개를 통해 유지됩니다. 우리가 회개에 민첩한 성도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을 거부합니다. 왜요. 내가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려야지 어떻게 예수님이 내 발을 씻어주실 수 있습니까? 라고 하며 거부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씻겨 주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13:8) 그러자 베드로는 그렇다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목욕은 원죄를 의미하고, 발을 씻는 것은 자범 죄를 의미합니다.

원죄는 어떻게 해결됩니까? 믿음으로 해결됩니다. 그러면 자범 죄는 어떻게 해결됩니까? 매일 그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 해결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이루어지기 전인데 어떻게 베드로는 원죄를 사함받을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는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예수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으로 그 원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살아가면서 짓게 되는 자범 죄만 해결하면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발만 씻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원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제 살아가면서 짓게 되는 자범 죄만 회개하며 살면 됩니다. 그러면 거룩한 성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멘.

 

성경을 보면 이 죄 이야기옷 이야기와 연관되어 나옵니다.

창세기의 말씀에서도 아담의 범죄를 옷이 벗겨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죄에서의 구원 또한 다시 옷을 입혀 주신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짐승을 죽여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그 지은 죄를 사함받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멘.

 

이렇게 성경의 옷 이야기짐승의 제물과 연결되고 있고, 짐승의 제물은 곧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이사야서 53장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사람들이 입는 옷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속옷이고 또 하나는 겉옷입니다. 성경에서 이 속옷은 원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하고, 겉옷은 삶의 행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61:10절입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내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구원의 옷은 속옷입니다. 이 속옷은 원죄로부터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으며, 공의의 겉옷은 자범 죄에 대한 말씀으로서 그 삶의 행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속옷과 관련되어 있는 원죄는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에게 입혀 주시는 옷입니다. 겉옷과 관련되어 있는 자범 죄는 회개함을 통해 입게 되는 옷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은혜로 가죽옷을 입혀 주셨듯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내 의지, 내 지혜, 내 능력, 내 자격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빚진 자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는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면 그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섬기는 성도인지 은혜를 받지 못하고 섬기는 성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은혜를 아는 자답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은혜를 모르는 자 같이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아는 성도답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셋째, 태초에 주신 약속을 믿고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초의 약속을 받았던 아담과 하와는 먼저 자신들이 믿고 그 믿음을 후손들에게 전해 주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들이 전해 주는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런 믿음은 혈통이나 육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약속하신 것이며, 성경을 통해 계속 적으로 말씀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 구원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담은 이 태초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그 자녀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후 그 자녀들은 두 부류로 갈라졌습니다. 한 부류는 이 구원의 약속을 믿는 자녀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이 구원의 약속을 믿지 않았던 자녀들이었습니다. 구원의 약속을 믿었던 자녀의 대표자는 아벨이었고, 구원의 약속을 믿지 않았던 자녀의 대표자는 가인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성장하여 각자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다고 합니까? 성경은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가진 믿음을 보시고, 제사를 열납 하기도 하시고 또 거부하기도 하신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후에 나오는 인류의 역사는 구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고 장차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서 형벌을 받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류 역사는 민족들의 흥망성쇠의 기록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인류의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해 내시는 구원의 역사가 바로 인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볼 때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긴박한 것은 없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고, 쇠하고, 결국에서 없어지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믿음을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마귀의 권세를 이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라고 찬양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온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오다가 각각 다른 시점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이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또 같은 믿음으로 구원이 완성될 그날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큰 행복이 무엇입니까?

저는 예수를 믿는 이 믿음 가진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무슨 소망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이 믿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려운 삶을 살아오면서 좌절하고 낙담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믿음이 우리 삶에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어서, 오늘까지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오게 해 준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는 것이 인생 최고 행복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행복 속에 살았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그 백성 된 사람들보다 이 세상에 더 행복한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며 살았던 은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신명기 33:29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모세가 말씀하고 있는 이 이스라엘은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신약시대에는 예수를 믿는 우리들을 말합니다. 우리들이 바로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스라엘이라는 말 대신에 우리의 이름을 넣어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말씀이 됩니까? 김종하 목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게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 모두 각자 자기 이름을 넣어 이 말씀을 읽어보고, 우리 가족들의 이름을 넣고 읽어봅시다. 이렇게 해 보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우리 가족들이, 얼마나 존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그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사랑해 주신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은 믿음을 가진 우리 가족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우리에게 예수 믿는 부모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 된 형제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더 많은 재물을 가지지도 못하고, 또 더 높은 지위에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그런 사람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기 때문이며,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붙들고 살았던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이 태초의 약속이었습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이 붙들고 살았던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이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고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이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며 사는 그 어떤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버리지 않으신다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어 주고 견인해 주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 어떤 환난도, 고난도,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려운 삶 속에서도 여유가 있고, 의연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 역사를 주권적인 의지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랑해 주시고, 결코 폐하지 않는 약속의 말씀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늘 환난이 있고,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요?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역사의 주인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수 많은 약속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이 어려울 때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어려워지고, 나를 둘러싼 환경들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가 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을 저의 삶에도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믿고, 또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약속의 말씀들을 붙들고, 그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그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아가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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