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1-31(히브리서 11:1-6)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살고 있는 창세기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보다 먼저 계신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 살펴볼 것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이 창세기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첫째, 이 세상보다 ‘먼저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이 세상보다 먼저 계신 하나님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창세 전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창세기 1:1절의 말씀을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믿음은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3절에서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안다....’ 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뿐 아니라 성경 말씀도 사람이 지식이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영감 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이 증거해 주고 있는 말씀을 믿으려면 먼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는데, 이렇게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영감 해 주신 말씀을 믿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 요한1서 2:20 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그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의 모든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요한1서 2:27 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는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이 성령이 가르침을 주신 그대로 믿고 살면 된다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성경 말씀을 지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는 지식적으로 이해하고 이성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말씀 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적인 이해를 믿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지식적으로 이해해서 알면 되는 말씀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나,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세상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계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또 창세기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둘째, 하나님이 이 세상의 창조주시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빼어내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누가 이 세상을 창조하였는지, 이 세상과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하나님을 빼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이론이 바로 진화론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빼어 놓고 이 세상의 근원, 이 세상의 기원을 진화론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믿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믿음을 가지고 읽을 때 비로써 이해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그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을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도울 같은 사람이, 범륜 스님 같은 사람이, 성경을 인용하고, 성경을 강론하고, 심지어 성경 강해서까지 쓰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알고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이론과 견해를 세워나가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이용하고, 성경 말씀으로 자신들의 이론과 견해를 포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과학자들은 어디서 이 세상 기원을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까?
과학자들은 이 세상이 진화 되어왔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가지고, 지각 변화의 상태를 살펴보고, 물질들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들을 살펴보고, 각종 화석들을 연구하여서, 이 세상이 어떻게 진화 되어왔는지 정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화론이라는 전제를 깔고서는 이 세상의 기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진화론은 이 세상의 기원을 밝히는데 백해무익한 이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세상이 다 진화론을 말하더라도, 이 세상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이 그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굳게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창세기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셋째, 하나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그 말씀으로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이 말씀의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면 그 즉시 그 말씀 하신 대로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자’ 그 즉시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 물로 나뉘라 하자’ 그 즉시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이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물은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곧 바다와 땅이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창세기는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는 전능하신 창조주의 능력이 담겨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일점일획도 폐하지 않고 다 이루어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에는 능력이 있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으신 분이셔서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창세기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넷째,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 만물의 소유주가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인 만물을 이용하고, 위탁받아서 관리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시라는 이런 이해는 사람들의 삶을 달라지게 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청지기는 그 주인의 뜻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주인에게 칭찬을 듣고 또 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은 재물을 모으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으며 살아갑니다.
이런 삶의 방식의 차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분시켜 주는 기능을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것들을 잘 보전하고, 잘 관리하며 살아가는 선한 청지기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첫째 날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빛을 만드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둘째 날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셋째 날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바다를 가르고 땅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드러난 땅에는 자라나는 각종식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넷째 날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이것들을 통해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다섯째 날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물에 사는 물고기와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를 만드셨습니다. 여섯째 날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땅 위에 사는 동물들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일곱째 날에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세상을 창조하시는 일을 다 마치시고 안식하셨다고 합니다.
창세기 1장은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살펴보려고 하면 그 양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중에서 넷째 날 하신 일만 살펴보겠습니다.
이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큰 우주를 보면 지구가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는 우주의 한 변방에 있는 우리은하에 속해 있는 태양계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넓은 우주 속에는 지구보다 더 크고 더 아름다운 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우주 속에서 지구를 그 마음에 두고 계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이 지구 안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구에 마음을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지구는 또 얼마나 넓습니다.
하나님은 이 넓은 지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그 마음을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보신다.’ 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믿음을 그 무엇보다 더 귀하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그 대적이 되었던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이때 다윗의 부하들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기회이니 사울 왕을 죽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내 손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죽이지 않겠다.’라고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안에서 원수를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포기하였습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은 어떻게 인정해 주셨습니까?
“저는 나와 마음이 합한 자다.” ‘저는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다.’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다윗의 믿음을 받으시고 그 평생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우리의 선한 마음을 귀하게 보십니다.
이 뿐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시간을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우리의 기도 생활을 아주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하루하루의 삶을 아주 귀하게 보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과부의 두렙 돈 사건을 보십시오.
사람이 볼 때 그녀가 드린 것은 아주 작은 헌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 헌신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과부의 헌신하는 믿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오늘 구제 헌금을 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은 헌금을 하였다.’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3: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분이라면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안식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 계명을 어기고 그 병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를 보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 주신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안식일에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볼 때 이 말씀은 창세기의 말씀과 아주 달라 보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분명히 ‘하나님이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신 후에 제7일에는 안식하셨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이제까지 그렇게 해석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아버지께서 안식일에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안식일에 무슨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까?
창세기 2: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은 무슨 일을 하셨다고 합니까?
그 백성 된 사람들에게 복 주시는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한편 손 마른 자에게 치료의 복을 주시려고 안식일에 그 병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이 치료의 복을 통해 이 손 마른 자가 그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의 복을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정해 놓으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귀찮게 하시려고, 우리가 손해 보도록 하시려고, 우리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정해 놓으신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영으로 계신 하나님께는 안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안식의 쉼은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주일 날에 우리가 육신의 쉼을 누리면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며 살도록 특별히 구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가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6일 뿐 아니라 제7일째인 안식일에도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하나님께서는 자신과 같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큰 것을 맡기신다.”고 하십니다.
“세상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신다.”고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놀고먹다가” 부름받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다.”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구약성경의 아모스를 보십시오.
그는 드고아에서 목자로 있을 때 하나님에 의해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동일합니다. 누가복음 2장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그 밤에 베들레헴 들에서 양들을 지키고 있던 목자들이 천사를 만나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 사람들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도 동일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치고 게으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남들이 놀 때 놀지 않고, 남들이 쉴 때 쉬지 않고, 남들이 잘 때 자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고 일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한 결과 성공이라는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게으른 사람을 두둔하지 않습니다.
잠언 서를 보면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가서 배우고 지혜를 얻으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게으른 자를 얼마나 싫어하시면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게, 하찮은 미물인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고 하셨겠습니까?
우리가 잘못하면 예수 믿으면서 자기 일에 게으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는 공부나 직업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또 육체적인 노동을 열등한 직업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문명이 발달 되기 이전 시대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 자신을 쓸 것을 자신이 준비하고 예비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명이 발달 되고 산업혁명이 일어나 일이 분업화 되면서 직업이 세분화 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수만 가지 직업으로 분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중에서 한 가지 일만 잘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용실을 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머리만 잘 깎아 주면 됩니다. 그러면 고객들이 많이 찾아오고,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얻은 수익금으로 내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받고, 필요한 물품들은 구입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분업화가 잘 되어 있어서 우리는 적은 돈을 지불하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원하는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 목적지까지 가려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또 우리는 적은 수도세를 내고 원하는 만큼의 온수 냉수를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물을 길어와서 쓰려고 하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통해 사회 속에서 일정 부분의 역할을 감당하고, 그 나머지는 내가 일해서 얻은 소득으로 값을 지불하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부품과 같은 존재입니다.
부품 하나가 잘못되면 전체 기계가 마비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전체 사회는 마비됩니다. 은행 전산망이 마비되면 모든 상거래는 멈추고 은행 결제가 불가능해져서 경제에 큰 혼란이 올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배를 탄 운명공동체입니다. 한 사람의 실수가 전체 구성원들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고, 성실하고 지혜로운 한 사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볼 수도 있습니다. 범죄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한 사람이 사회에 큰 짐이 되며, 똑똑하고 성실한 한 사람이 수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 현대사회입니다.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모든 직업을 소명으로 여깁니다.
여기는 목회자뿐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직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직업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개혁교회의 직업관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제가 가끔 이용하는 노원 정보도서관의 직원들은 아주 친절합니다. 그래서 도서관에 갈 때마다 기쁨으로 갑니다. 도움을 받고 나올 때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면서 돌아옵니다. 그런데 구청은 다릅니다. 직원들이 까칠하고 불친절하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구청에는 가기 싫어집니다. 구청 직원들은 그런 분위기 속에 살아와서 그런 사실을 모르겠지만, 저는 갈 때마다 불친절한 모습에 기분이 상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축복이 나오겠습니까?
왜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납니까?
그것은 자신의 직업을 먹고 사는 방편으로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직업을 출세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과, 자신의 직업을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 자기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소명 의식이 있는 사람은 결코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자기 의로움에 빠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그 자리에 왜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서비스 정신으로 업무를 수행합니다. 저는 이렇게 소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은 실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막에 가서 우산을 팔지 않고서는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게 되든지 소명감을 가지고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학생이 공부를 해도 소명감을 가지고 공부하고, 직업을 가진 성인들도 소명감을 가지고 일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세상이 발전해 나가게 하고, 이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되도록 하는 일에 기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시면서 안식일에도 일하셨습니다.
안식일에도 쉬지 않으시고 병자를 고쳐주셨으며, 그 영혼을 구원해 내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입니다.
스스로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이나,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교회를 섬기는 저와 같은 목회자들은 바쁘려면 가장 바쁠 수 있습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공부이며,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목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게으름을 피우려면 가장 게으를 수 있는 것이 학생들이고 목회자들입니다. 왜요. 간섭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해야 하고, 목회자는 스스로 설교 준비와 목회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유로울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더욱더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남보다 앞서가는 학생이 될 수 있고, 남보다 더 충실한 설교를 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합니까? 비록 사람들은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실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시고 그런 사람들을 들어 쓰십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은 기도로 새벽을 깨우고, 하루를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다가 저녁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하는 예배를 드리며 마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삶이 바로 이런 삶입니다.
다윗과 같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주어진 삶을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라 열심히 자기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 번째 살펴볼 것은, 그러면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느냐?’ 는 것입니다.
창세기 1:27-2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에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닮게 창조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창조주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셨습니까?
어떻게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무에서 즉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이 세상을 창조해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창조하실 세상에 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하고 구상하신 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속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로마서 1:20절에서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보여 분명히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속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몸만 연구해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물을 섭취하면 입에서는 소화하기 쉽게 잘게 부수면서, 적당한 소화효소인 침과 함께 버무려서 식도로 넘기게 됩니다. 그러면 식도는 그 음식물을 위로 운반해 주게 됩니다. 위는 음식물이 들어오면 그 상단을 막아서 음식물이 다시 입으로 나가지 않게 하고, 그리고 수축 작용을 통해 음식물을 소화 시킨 후에, 위의 아래쪽을 열어서 음식물을 소장으로 내보내게 됩니다. 소장은 위가 내려보낸 영양분을 당분으로 전환 시켜서 전해질과 수분과 함께 흡수하고, 그 남은 음식물은 대장으로 내보내게 됩니다. 그러면 대장에서는 다시 남아 있는 미네랄과 수분을 재흡수하게 됩니다.
이렇게 흡수된 영양소는 산소와 함께 혈액을 통해 신체 각 부분으로 보내져서 세포에 영양을 공급해 줍니다. 이렇게 하고도 영양이 남아 있으면 그 영양은 간으로 보내 보관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영양이 부족할 때 간에 보관한 영양을 꺼내어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하고도 남은 음식 찌꺼기는 대변으로 배출하고, 또 피를 통해 운반되어 온 신체에 해로운 요소들은 소변으로 배출하게 됩니다. 이 정교한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사람의 뼈와 근육과 신경조직과 얼마나 정교합니까? 작은 심장박동으로 온몸에 피가 흘러가도록 하는 시스템은 놀랍기까지 합니다. 사람의 몸을 연구해 보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의 창조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로 열등감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사람처럼 신묘막측한 존재는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창조된 우리들은 하나님을 따라 창조적인 정신,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할 때 창조적인 정신으로 일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시대를 바꾼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대표자 중 한 사람이 바로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입니다. 그는 도스 체계가 모든 컴퓨터 운영체계일 때 그 도스 체계의 불편함을 개선해 줄 윈도우 체계를 개발해 낸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윈도우 체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빌 게이츠에게만 가능한 일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까? 시중에 뜨고 있는 맛집들을 보면 그 모든 식당의 사장님들이, 창조적인 정신을 가지고, 이런 시도 저런 시도를 해 오면서 지금의 그 맛집을 이루어 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주부도 예외가 아닙니다.
전업주부들에게도 가능한 일입니다. 주부들도 창조적인 생각을 가지면, 매일 먹는 반찬만 반복하여 만들지 않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반찬만 만들지 않게 됩니다. 주부들도 기도하면서 가족의 건강을 지켜줄 새로운 반찬을 시도하다가 보면, 더 맛도 있고 더 영양가도 많이 담긴 새로운 반찬을 창조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먹는 김치도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농사 기술이 지금보다 떨어지고, 음식물 보관 기술이 지금보다 떨어져서, 비타민 섭취가 많이 부족 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창조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때가 지난 채소를, 오랫동안 보관하며 먹을 수 있을까? 시도하고 노력한 결과, 오늘날 우리가 애용하는 김치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김치는 우리 민족의 겨울 반찬으로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닮는 방법입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기도하고 시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설교자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설교자들이 하나님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기를 구하고, 또 오늘 성도들에게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를 구하게 되면, 하나님은 이런 목회자들과 함께해 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성경 말씀을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한 말씀으로 풀어낼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받고 살았던 사도바울은 어떤 고백을 하였습니까?
자기 같이 부족한 사람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로마 전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기록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그 일을 해내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창조적인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인류에게 유익을 주시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조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로 무엇인가를 할 때에, 인류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인류에게 해를 끼치고 재앙을 끼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인간 복제를 들 수 있습니다.
황우석 박사가 공언한 대로 줄기세포가 인간의 난치병 치료에 사용될 수도 있지만, 인간 복제에 이용되어서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고 조화 있게 창조하셨듯이, 우리들도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이렇게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조화롭게 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리며 살게 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일을 나누어 하는 분업이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분업의 역사는 벌써 2000년 전 초대교회 사도들에 의해 시도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과부의 구제 문제로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 원망과 다툼이 일어나 교회가 양분될 위기에 있었습니다. 이때 사도들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일곱 집사를 세워서 자신들은 기도하며 말씀을 전하고, 집사들은 구제를 맡아서 하도록 분업화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치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분업에 대한 초대교회 사도들의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이 세상보다 약 2,000년이나 앞서가고 있습니다.
또 민주주의는 노예, 농노, 기사, 영주, 왕으로 엄격한 신분제도가 시행되고 있던 중세 사회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이 민주주의는 종교개혁자 칼빈이 시작했습니다. 칼빈에 의해 교회 안에서 가장 먼저 시도되었습니다. 이 전통이 오늘날의 장로교 교회 정치가 되었습니다. 칼빈은 이 제도를 통해 스위스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후 칼빈의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이 세상에 영향을 미쳐서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가 싹트게 했습니다.
구약성경은 고리대금업을 율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창조적인 신학자이며 종교개혁자였던 칼빈은 돈을 빌려주고 합법적으로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산업화를 이룰 수 있는 자본의 축적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정신적인 기반은 바로 이 종교개혁 정신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보다 높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생각도 인간의 생각보다 높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 우리의 생각이나 관점이 어떻게 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나 관점보다 낮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이 세상의 생각과 관점을 넘어서 있는 사람들, 하나님이 주시는 창조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로 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개혁교회 소속의 성도들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내 백성이 꿈이 없으므로 망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꿈이 있습니까? 장래에 대한 어떤 비전이 있습니까? 우리는 먼저 창조적인 꿈과 비전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통해 이 세상의 가치보다 훨씬 높은 가치, 이 세상의 이상보다 훨씬 높은 이상을 가진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꿈과 이상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믿음으로 그 꿈과 이상을 실천하고 이루며 살아가는 이 한 주간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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