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에 주신 은혜
출애굽기 12:1-10
성경은 교회를 말할 때 두 가지 서로 다른 교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 ‘신약의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7:3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광야교회’입니다.
광야교회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교회를 말합니다. 이 광야교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지켰던 유월절에 기원을 두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의 교회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교회입니다. 이렇게 신약의 교회는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수님께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교회 중에서 유월절을 통해 광야교회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유월절은 어떤 절기입니까?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특별한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세상 죄를 심판하러 온 천사가, 어린 양의 피가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라 놓았던 이스라엘의 집은 넘어가고,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발라 놓지 않았던 애굽 사람들의 집에서는 장자를 죽이는 심판이 행해졌던 절기입니다. 이 유월절 심판에 놀란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애굽에서 나가는 것을 허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유월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유월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유월절을 통해 베풀어 주셨던 네 가지 은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유월절을 통해 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사죄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유월절에 어린 양이나 염소 한 마리를 취하고 잡아서, 그 어린 양이나 염소가 너희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표시로, 너희가 사는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그 피를 바르고, 너희는 그 집 안에 모여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2:5-7절입니다.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러면 심판의 천사가 문설주와 문 좌우 인방에 발려져 있는 그 피를 보고, 그 집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그 집은 넘어갈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2:12-13절입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유월절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참 특별한 약속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받고 죽어야 할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은 것은 죄 없는 어린 양이나 염소였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에 이 무죄한 어린 양이나 염소의 희생을 통해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죄를 사해 주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특별한 약속입니까?
그렇다고 그 어린 양에게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는 능력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때 죽은 어린 양은 장차 인류의 구세주로 오셔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사람들 대신 죽어주실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가 어떻게 사함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유월절에 죽은 그 어린양의 피는 문밖에 칠해졌습니다.
그래서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린 양의 피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심판의 천사만 보았습니다. 천사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 와서 본 것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발라두었던 그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이 유월절 사건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느냐? 얼마나 죄를 많이 짓고 살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보시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를 믿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도 여기에 대해 아주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문설주와 인방에 발려 있는 그 어린 양의 피를 볼 때에, 그 집에서는 이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내가 그 집을 넘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지식도 아닙니다.
우리의 선행도 아닙니다. 우리의 공로도 아닙니다. 그 외 또 다른 그 무엇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보고자 하시는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어주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믿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위해 희생해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유월절 밤에 심판의 천사가 그 문에 어린 양의 피가 발려 있지 않았던 애굽 사람들의 집에서는 장자를 치는 심판을 집행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에 어린 양의 피가 발려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유월절에 죽은 어린 양의 피의 유무가 이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 집 문에 어린양의 피가 발려 있느냐? 발려 있지 않느냐? 에 따라서 생과 사가 갈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모든 사람들은 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사람이 볼 때에는 좀 더 나은 사람도 있고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많이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어린양의 피가 발려 있는 죄인인가? 어린 양의 피가 발려 있지 않는 죄인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똑같은 죄인들 중에서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믿는 죄인들은 용서해 주시고,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믿지 않는 죄인들은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다."(히9:22) 이것이 하나님의 정하심입니다. 이것이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외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장자를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언제나 이 믿음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를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면 구원해 주시고 또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흘려 주심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 방법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도 오직 이것뿐입니다. 이 믿음을 끝까지 지켜 나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유월절을 통해 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둘째는 평안의 축복입니다.
당시 유월절 밤은 애굽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밤, 통곡과 절규의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아주 평안한 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고 난 후, 그 집안에 모여서 양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만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에서는 심판의 천사가 넘어갈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에 뿌려 놓았는데도 사람이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헛된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양의 피를 뿌린 집에서는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았습니다. 단 한 사람도 상한 자도 없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켜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피는 그것을 믿은 사람들에게 구원이 되고 평안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어린 양에게 내려졌고, 자신들에게는 죄에 대한 심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밤에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구운 양고기를 먹으면서 심판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을 찬송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확신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우리 죄에 대한 심판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께 행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는 죄에 대한 심판은 하지 않으십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죄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피가 우리 구원을 보장해 준다.”라는 지식적인 이해, 객관적인 이해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믿는 내가 실제로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누리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에 대한 지식을 가진 것과 믿음 안에 사는 것은 다릅니다.
믿음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아직 믿음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아직 그 믿음의 능력과 역사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구원받은 확신이 있습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걱정과 염려 속에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평안은 잠시 잠깐 불안을 잊게 해 주는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그 마음 안에 있는 불안의 근원을 완전히 제거해 주심으로 갖게 되는 참 평안입니다.
이 평안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내가 너희에게 주는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이 평안은 ‘세상은 죽었다 깨어나도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평안’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평안이 있습니까?
이 평안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주시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려주실 대속의 피에 근거하여 이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우리 찬송가 370장에 있는 ‘주안에 있는 나에게’라는 찬송의 가사를 보면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이 찬송은 주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근심이 있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그 마음 안에 충만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천둥치 치고 벼락이 쳐도 더 높은 곳에 피뢰침이 있으면 안전합니다. 높은 곳에 있는 그 피뢰침이 벼락을 대신 맞아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은 있으면 안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질 심판과 형벌을 이미 우리 대신 다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형벌도 없고, 지옥도 없고, 심판도 없고, 영원한 죽음도 없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나는 너의 머리털의 숫자까지도 다 헤아려서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이런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너는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여 주고, 내가 너를 도와 줄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 위에 굳게 서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소유하고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유월절을 통해 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셋째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축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때에는 삶의 희망도 목표도 없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종으로 살고, 자유도 없이 살았는데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애굽 사람들에게 매를 맞지 않으면 다행이었고, 먹을 양식을 배급받아서 굶어 죽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지키면서 자신들 대신 죽은 어린 양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이 죄를 심판하는 천사의 손에서 구원받게 해 주고,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건져내 주어서, 이제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자유는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계획하고, 설계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은혜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지금은 문명이 발달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갈 뿐이지요. 여러분들은 건강을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건강을 잃으면 자유 또한 제한 됩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안다면 건강을 잘 지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너무 가난해도 자유가 제한됩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자는 되지 않더라도, 노년에도 자기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은 꼭 가질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살아갈 삶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 목표는 하나님께서 그들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유롭게 사는 것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땅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서 자유를 누리며 평화롭게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에서 전에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장래에 대한 꿈을 꾸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서, 헛된 일에 시간을 재물을 낭비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이제 우리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참된 목표를 모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돈을 모으기 위해서 살고, 어떤 사람들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 살고, 어떤 사람들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살고, 어떤 사람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다가 보니, 그것을 이루고 성취하기 위해서 각종 편법을 쓰고 불법을 자행하여 사회적으로 큰 물의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은 어그러지고 왜곡된 사회구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왜곡되고 어그러진 사회구조를 뜯어고치고 개선해 보겠다고 일어난 것이 바로 공산주의 혁명입니다. 공산주의는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고, 모두가 똑같이 잘 사는 삶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종이 된 인간이, 죄의 지배를 받고 사는 인간이, 자기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인간이, 공산주의라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며, 그런 사회를 만들어 보려고 혁명을 일으켰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결과는 오히려 공산주의가 등장하기 이전보다 더 심각한 계급 사회를 만들었고, 심지어는 진실도 팽개치고, 인권도 무시하고, 오직 권력을 잡은 소수를 위해서 인민들을 억압하는 사회, 각종 선동과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를 만들어 갔습니다. 공산주의는 그렇게 그 본래 가졌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붕괴되고 만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무너짐은 그 목표를 잘못 설정한 것에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돈이 많은 부자들을 끌어내려서, 그 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모두가 잘 사는 사회, 경제적인 정의가 실현된 사회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모두가 다 못사는 사회를 만들어 갔습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전에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나아와서 물었듯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또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내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그 사랑과 은혜 안에서, 나도 그리스도를 따라 그렇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율법 아래 사느냐? 은혜 아래 사느냐? 의 차이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얽매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며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누구에게 삶을 길을 묻고, 삶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삶의 길과 삶의 방법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내 안에 와 계신 성령 하나님이 나를 가르쳐 주시고, 또 모든 진리 가운데로 나를 인도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삶에 대해 요한1서 1:20, 2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는 내 안에 와 계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삶은 이렇게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성령이 주시는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축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 유월절을 통해 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넷째는 주님이 주신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축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밤에 집에서 양고기를 불에 구워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애굽을 나가도 좋다는 해방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때는 깊은 밤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즉시 이미 싸놓았던 짐들을 들고, 아이들을 등에 업고, 짐승들을 몰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2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집에서 나와서,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진군나팔 소리를 들으며 가나안으로 가는 대열에 합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행군은 힘겨운 행군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먹었던 양고기가 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번에 애굽을 떠나 홍해 바다 앞까지 이를 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밤에 양고기를 배부르게 먹지 않았더라면 얼마 가지 못하여 기진하였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내보내 준 것을 후회하고 그 뒤를 쫓아오는 애굽 군대에게 붙잡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밤에 먹은 양고기가 힘이 되어 주어서 홍해 바다까지 단숨에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마음에 평안을 얻고 올바른 삶의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할지라도,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서 계속해서 힘을 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이 험한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그렇게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하고, 계속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고,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더욱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종말 시대에는 그 믿음에 더하여 성령 충만함이 요구됩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해둔 구원의 시대가 끝나고, 이방교회 시대가 시작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적인 배교가 있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들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까? 성령 충만함을 받고 살아갔던 사가랴, 엘리사벳, 마리아, 요셉, 세례요한, 시므온, 안나, 예루살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 등등은 아기 예수로 오신 메시야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교회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교회 시대가 끝이 나고, 유대인에게 남아 있는 한 이래가 도래하면 어떤 사람들이 그 믿음을 지키게 됩니까? 이때도 성령충만한 성도들만 믿음을 지키게 됩니다. 성령충만한 성도들만 믿음으로 승리하고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열 처녀의 비유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상징되는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해 가지고 있던 처녀들만 혼인 잔치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재림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림 신앙을 가진 성도들만 그 나타나는 종말의 징조들을 이해하고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종말 시대에 적 그리스도가 등장하게 되면,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예비 처로 도망해야 할 때가 오게 됩니다. 이때는 지금처럼 말씀으로 인도를 받으며 사는 때가 아닙니다. 이때는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이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깨어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고,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진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늘 성령 주시기를 구하며, 늘 성령 충만한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다줍니까?
누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해 줍니까? 누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어 주십니까? 또 누가 나를 넘어뜨리려고 시시때때로 유혹하는 죄의 세력을,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십니까? 누가 우리를 도우셔서 어려움을 당하나 낙심하지 않게 해 주고, 소망을 갖고 이 힘겨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까? 우리 삶에 주어지는 그 모든 힘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힘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이 힘에 대해 이사야서 40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그리고 시편 29:1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우리들을 늘 새롭게 해 주시고, 성령을 통해 새 힘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시는 새 은혜, 새 능력, 새 힘을 공급받아서, 이 한 주간에도 힘 있게 살아가고, 능력 있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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