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오경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4. 1. 21. 14:22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창세기 50:15-26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보면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 삼손, 다윗, 솔로몬 등등을 보면, 이 사람들은 모두가 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고,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살아온 삶 속에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함으로 인류를 불행에 빠뜨린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노년에 술에 빠져서 각종 추대를 보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한목숨 살아보겠다고 그 아내에게 동생이라고 두 번씩이나 거짓말을 하게 했던 사람입니다. 삼손은 복잡한 여자관계 때문에 낭패를 당했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충성스러운 부하의 아내를 범하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하여 죽이도록 명령했던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산 사람이면서도 그 말년이 좋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요셉의 삶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요셉의 삶에서는 별다른 허물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요셉이 를 지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요셉이 살았던 환경이 좋았던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살았던 가정은 4명의 엄마가 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쟁했던 그런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배다른 형제 13명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난하고, 갈등하며 살았던 그런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좋지 않은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런 요셉을 보면서 우리들은 나는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자기 합리화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와 같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요셉은, 우리가 허물을 찾아볼 수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24년도를 시작하는 이 첫 달에, 특히 종말의 징조들과 예수님의 재림이 아주 가까이 이른 것 같아보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요셉과 같이 온전한 삶, 깨어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종말의 시대, 심판의 날이 가까이 이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꼭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꼭 기억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중에서 특히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라는 구절을 꼭 기억하고,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가는 성도, 죄에서 떠난 삶 즉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고, 나의 죄를 용서받는 삶을 통해, 죄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우리 삶의 좋은 모델이 되고 좋은 모범이 되는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창세기 37장에서 50장까지 기록되어 있는 요셉의 삶을 통해,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셉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 요셉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22절입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이 말씀은 요셉이 가지고 살았던 믿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평생을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요셉으로 인해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의 비옥한 고센 땅에 정착하여 살면서 큰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애굽에 들어갈 때는 70명이었는데, 애굽에서 나올때에는 250만에서 400만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번성은 애굽에서 총리로 있었던 요셉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애굽 땅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원히 살 땅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 땅은 하나님이 그들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될 때 자기 뼈를 거두어 가지고 애굽에서 나가 달라고 유언하였습니다. 이 유언을 통해 요셉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지 않았고 하나님과 그 약속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통치하고 계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요셉은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요셉의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면서 형통함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고 의지하며 살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현실의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의지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은 어떤 삶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그 통치와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믿음의 삶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믿고 살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셉은 그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가게 됩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죄인처럼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셉은 이렇게 점점 나빠지고 있는 그 삶의 현실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 자신이 믿고 의지하며 살아온 하나님, 그의 삶에 함께해 주시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형통한 삶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요셉은 자신에게 어려움을 가져다주는 사람들,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들을 만나도,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원망하거나 대적하지 않고, 마음속에 앙심과 복수심을 품고 살지 않고, 그런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살았습니다. 이런 삶들이 바로 요셉이 믿음으로 산 삶의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살아온 삶,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은 어떠합니까?

요셉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제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오늘 살아가고 있는 삶을 살펴보면, 요셉과 같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온전히 믿고 살아가는 삶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이라는 환경을 바라보며 현실 속에 메여서, 때로는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갈등하며 살아가고 있는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우리들이 요셉과 같은 삶을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는 요셉과 같이 우리들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그다음은 우리 삶의 환경을 극복하고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조건들을 넘어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과 이런 삶이 우리가 한 해 동안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요셉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둘째, 요셉은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게 되자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하기를 네 형들의 죄를 용서해 주라고 하셨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셉의 형들은 전에 요셉에게 지은 죄가 있습니다. 요셉은 전에 형들이 애굽에 곡식을 사러 왔을 때 만나서 이미 그 형들의 죄를 다 용서했다고 말해 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들은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언제 그 형들의 죄를 용서해 준 것입니까?

요셉은 형들에 의해 자신이 노예로 팔려 갈 때, 이미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형들의 죄를 다 용서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목사님은 무슨 근거를 가지고,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갈 그때 이미 그 형들의 죄를 용서했다고 말하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죄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죄를 지은 형제들을 용서해 주는 삶을 통해 보여주며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그러면 요셉이 언제 하나님의 죄 용서를 경험했느냐 하는 것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셉이 언제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였다고 생각합니까? 가나안 땅 아버지 집에 있을 때 경험했겠습니까? 아니면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가면서 경험했겠습니까? 아니면 애굽의 노예로 살면서 경험했겠습니까?

 

요셉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산 것은, 이미 그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 살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음으로 살고 있던 요셉에게, 그가 장래 이루어 가게 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꿈을 통해 미리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일지라도 한순간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적인 분노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곧바로 그 마음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그 마음 안에 용서의 마음, 자비의 마음, 긍휼의 마음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은 저절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의 경험이고 증거가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사기를 치고, 여러분의 돈을 떼먹은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 일을 당하게 되는 그 순간에는 그 사람을 향해 섭섭한 마음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에게 사기를 친 그 사람을 계속 미워하지는 않게 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의 분노와 미움을 사라지게 해 주시고, 오히려 죄를 지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안에서는 죄지은 그 사람을 용서해 주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도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그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가는 충격적인 일을 경험하고서도, 그 형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정탐꾼이라는 누명을 씌워 어려움을 주어 본 이유는 그 형들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보복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 형들이 믿음 안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는지 회개하지 않았는지를 확인해 보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죄를 지으면 곧 바로 그 지은 죄를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이 그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이 자신들의 과거 잘못을 따지며 복수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함께 요셉을 찾아가서, 아버지가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서 하며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악감정을 가지고 자신들에게 보복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다시 용서를 구하는 그 형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 슬픈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울었다고 합니다.

 

이런 요셉의 형들을 통해 우리는, 죄책감이 얼마나 끈질기게 사람들을 얽어매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특성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 죄의 용서에 대한 말씀을 아주 많이 해 주시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죄 용서를 믿지 못해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최근에 성도들에게 신앙생활 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교회에 다니고는 있지만 내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계속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그 죄의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의 죄 사함에 대한 확신,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죄 사함의 확신이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확신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가 아버지 지갑에서 돈 만 원을 꺼내어서 친구들과 과자 사 먹는데 썼어요. 용서해 주세요.’ 라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그래 다시는 그런 일 하지 말아라. 그건 나쁜 일이야.’ 라고 하시면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다음날 다시 아버지를 찾아와서 아버지 제가 아버지 지갑에서 돈 만 원을 꺼내 쓴 것을 용서해 주세요.’라고 했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 일은 내가 어제 용서해 주지 않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다시 아들이 아버지께 나와서 제가 아버지 돈을 모르게 꺼내 쓴 것을 용서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어떻게 할까요? 아버지가 화를 내시면서 내가 그 일을 용서해 준다고 하지 않았니라고 할 것입니다.

 

잘못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우리 대신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지은 죄를 오늘 하나님께 고백하고, 내일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다음 날에도 똑같은 고백을 계속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신앙의 자유도 양심의 자유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의 형들의 문제는 그 동생 요셉과의 관계였습니다.

동생 요셉이 정말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죄의 용서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죄는 거의 다 사람에게 지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 사이에 있었던 죄의 문제도 해결해야 합니다. 내가 죄를 지은 사람에게 가서 죄의 용서를 빌고 죄를 용서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 용서만 강조하고 사람 사이의 죄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 잘못된 신앙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밀양이라는 영화입니다.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확신하지 못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 대신 독생자를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를 확신하려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얼마나 큰지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용서를 믿을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람 사이에 긴밀한 교제가 없어서입니다. 요셉과 그 형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긴밀한 교제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용서를 믿지 못하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형들은 17세가 된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판 후 오랫동안 요셉과 단절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후에는 요셉이 에굽의 총리로 있었기 때문에 또 단절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 단절된 관계는 요셉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장애 물이 되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관계는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친밀해지면 친밀할수록 용서에 대한 확신을 쉽게 가지게 되나, 사람과의 사이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용서에 대한 확신을 잘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합니다.

로마서 5장을 보면 언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합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을 통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겨 버리셨다고 합니다.

아침 안개가 태양이 뜨면 사라짐같이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죄 용서를 확신하지 못하고 죄의식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만큼 나와 하나님의 사이가 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사이가 친근하면 부모가 무섭지 않습니다. 부모가 무서워지면 친근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죄 용서를 확신하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요셉은 늘 하나님과 친근한 교제 속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갈때에 어떤 깨달음을 가지게 됩니까? 그 믿고 살고 있는 하나님께서 형들을 통해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고 계신다는 섭리적 통치를 믿었습니다. 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용서의 마음으로, 그 형들의 죄를 용서하고 잊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내가 형들이 지은 죄를 보복할까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가족의 구원을 위해 형들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일이니 내가 어떻게 형들에게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느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형들이 지은 죄를 심판하고 형벌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시라고 한 것입니다.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미워하여서 애굽에 노예로 팔았으나, 그 일의 배후에는 형들이 그렇게 하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아는 내가 어떻게 형들을 미워하고, 형들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신 것을 다시 선을 악으로 바꾸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이런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분이 일어나더라도 그 분노를 다음 날까지 품고 살지는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나 괴로움은 그 한 날로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멘.

 

또 요셉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셋째,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50:24-25절입니다.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은 이 유언을 하고 죽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무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그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또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모세와 함께 출애굽할 때에 요셉의 유언을 기억하고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갔던 것입니다.

 

요셉이 가졌던 이런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서 왔습니다.

그 약속이 창세기 15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요셉은 애굽에서 아주 출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출세한 애굽에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래가 없었던 부요함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전에는 우리나라가 가난했고, 할 일도 별로 없었고, 보리고개도 있어서 참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밥을 굶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잘살게 된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꽤 성공한 성도들도 있습니다.

수십 수백억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부지기수입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소망을 저 천국에 두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하나님과 그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신앙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졌던 시편 기자는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내 소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산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우리 신앙의 기초를 하나님과 그 주신 말씀과 약속 위에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또 요셉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넷째, 요셉은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꾸었던 꿈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꾼 꿈은 요셉과 그 형들이 밭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는데, 요셉의 곡식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요셉의 곡식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이 말은 요셉이 왕이 되고 형들은 요셉을 섬기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두 번째 꾼 꿈은 밤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형들뿐 아니라 그 아버지와 그 어머니들도 요셉에게 절하며 섬기게 될 것을 보여주는 꿈이었습니다.

 

요셉이 꿈꾸었던 꿈은 요셉 개인의 야망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바로 요셉이 꾼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자기의 비전으로 삼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꿈이 있습니까?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꿈을 통해 주신 계시를 자기 꿈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꿈이 그의 삶에 다가온 모든 어려움과 절망들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어 주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잡고 극한 고난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미래를 말하나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과거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과거를 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젊을 때만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늙게 되어서도 미래를 보고 사는 사람으로 삽니다.

 

갈렙을 보십시오.

40세 때 정탐 군의 한 사람으로 가나안 땅을 정탐하면서 가장 강대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헤브론 땅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38년 광야 생활과 7년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을 마친 후에 45년 전에 꿈꾸었던 그 땅 헤브론을 자신에게 기업으로 줄 것을 여호수아에게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이때 갈렙의 나이 85세였다고 합니다. 갈렙은 85세가 된 나이에도 꿈을 간직하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꿈꾸는 사람으로 알려진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심지어 죽음 앞에 두고 그 후손들에게 유언을 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꿈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였는데 그 일을 이루어 줄 때가 되어서 너희가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갈때에 나의 유골도 가져가겠다고 약속하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50:26절입니다.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요셉은 비록 약속의 날을 보지 못하고 애굽에서 죽었으나 그가 품고 살았던 비전과 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나라에 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가 죽은 후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꿈을 꾸며 그 생애를 마쳤습니다.

 

요엘 선지자도 꿈을 꾸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예수님의 초림 때 있을 성령 강림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엘이 꾸었던 이 꿈은 신약시대 오순절 날에 이루어진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또 요엘은 예수님의 재림 때 있을 전쟁과 형벌의 날에 대해 꿈을 꾸었습니다.

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이렇게 널리 선포할지어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병사로 다 가까이 나아와서 올라오게 할지어다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지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지어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 그리고 그날 이후에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을 내다보며 살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지고 삽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꿈을 꾸며 살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함께 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시대 깨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또 요셉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섯째, 요셉은 그 가진 믿음과 꿈을 증거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유언을 통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신앙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25절입니다.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유명한 설교자 아더핑크는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 가지고 올라간 요셉의 운구행렬은, 이스라엘 사람들뿐 아니라 애굽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요셉의 모든 꿈과 희망과 가치관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과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이를 통해서 그가 모시고 산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 사람들에게 증거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요셉은 언제나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도 그 꾼 꿈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있을 때에도 그와 함께 하시면서 형통함을 주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를 유혹하였던 보디발의 아내에게도 요셉은 그가 섬기며 살았던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감옥에서도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주면서도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중에 애굽 왕 앞에 서게 되었을 때도 내가 왕의 꿈을 해석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 주실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시인할 것이요.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며 나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너희를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하나님을 증거 하되 그 마음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으면 이것은 위선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하나님에 대해 침묵을 하나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으면 이것은 비겁한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도 하나님을 증거하고 우리 마음 안에도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성도들이 충성된 성도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믿고 있는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아서,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맹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때도 성도들은 나의 주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라고 증거하며 죽어갔습니다.

 

오늘날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심판하실 마지막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죽은 성도들이 가지고 살았던 믿음을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이들이 가졌던 신앙에 대해 증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셉처럼 어떤 환경 속에 있게 되더라도, 바울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에 대해 증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오늘 요셉의 삶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요셉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요셉은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요셉은 약속을 믿고 소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넷째, 요셉은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섯째, 요셉은 그 믿음과 그 꿈을 증거 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그 주신 약속의 말씀을 세상에 전해주며 말세에 깨어 있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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