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
창세기 31:48-50절
들어가는 말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만나게 될 때 묻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께서 나의 이 어려운 처지를 아시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이 어려움과 고통, 좌절과 힘든 삶’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다른 말로 하면 ‘전지하신 하나님’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께서 내가 당하며 살고 있는 어려움과 고통을 아신다면 ‘나를 이 고통 속에 그냥 내 버려둘 수는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사랑해 주신 분이신데, 나를 이 고난 속에 그냥 내버려 두실 수는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사랑의 손길, 구원의 손길을 펼쳐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다른 말로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질문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전지(全知)하시고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살펴볼 것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중에 모르시는 것은 하나도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모든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첫째, 에서와 야곱의 선택에서 볼 수 있습니다.
리브가는 이삭과 결혼한 후 20년 만에 쌍둥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쌍둥이들이 리브가의 뱃속에서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아이가 평생을 그렇게 싸우면 어떻게 하나 염려가 되었던 리브가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게 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는 응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이삭의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그들이 왜 서로 다른 민족이 되어서 싸울 것인지를 이미 다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는 말씀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야곱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믿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에서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미워하실 삶 즉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유다와 에돔은 AD 70년경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신 야곱의 후손들은 다시 국가를 회복하게 되지만, 하나님이 미워하신 에서의 후손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말씀들을 읽으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의 삶뿐 아니라, 그 후손들이 살아가게 될 모든 삶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증거가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가 죽고 사는 것까지 다 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다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뿐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움직임,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은밀한 생각과 계획들, 우리 행동의 배우에 숨겨져 있는 은밀한 동기들까지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또 우리 하나님은 우리나 이 세상의 현재 상태만 아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나 이 세상의 과거의 일, 현재의 일, 미래의 일까지 모두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과거는 알고 있어도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은 내가 장차 어떤 학교에 들어갈지, 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될지, 또 누구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게 될지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 세상 역사가 끝이 나는 그날까지의 모든 일들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전지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섬기며 사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둘째, 야곱의 생애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처가살이를 할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야곱이 7년 동안 외삼촌의 가축을 쳐 주면, 외삼촌은 그 대가로 둘째 딸 라헬을 야곱에게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게 된다는 기대를 가지고 7년을 하루 같이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려 온 신혼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지난밤을 자기와 함께 보낸 신부는 라헬이 아니라 그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분노하여 외삼촌을 찾아가서 ‘외삼촌이 이렇게 나를 속일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때 외삼촌 라반은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결혼시키는 것은 우리 지방의 풍습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신혼 기간인 7일을 채우고 나면 그 동생 라헬도 너에게 줄 것이니 라헬을 위하여 다시 7년을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라헬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하여 다시 7년 동안 외삼촌을 위해 일하게 됩니다.
이렇게 야곱이 외삼촌을 섬겼던 이 14년 동안 라반은 야곱 때문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복을 이어갈 야곱을 보고, 그 외삼촌의 집에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듣는 말 중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복 있는 여자가 그 집에 새 식구로 들어와서, 그 집이 잘 되고 형통케 되었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라반도 그랬습니다. 라반은 전에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집에 온 이후에 라반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라반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고 자기 집에 복을 주셔서 자기 집이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이 14년의 계약기간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할 때, 야곱을 더 붙잡아 두려고 새로운 제안을 하게 됩니다. 네가 지난 14년 동안은 두 아내를 얻기 위해 일했지만, 이제부터는 그 일한 품삯을 후하게 쳐줄테니, 너는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가지 말고, 네 소유의 재산을 모아서 떳떳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야곱도 그 외삼촌의 말을 좋게 여겨서 품삯에 대한 구체적인 계약을 맺고 머물게 됩니다.
그 첫 계약은 가축 중에서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 태어나면 야곱의 것이 되고, 그 나머지 것은 다 라반의 것이 된다.”라는 계약이었습니다.
이 계약을 맺고 난 후 야곱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서, 튼튼한 가축들이 물을 먹으러 모이는 곳 앞에 세워두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낳게 되는 새끼들이 다 점 있는 것이나 아롱진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한 가축이 물을 먹으러 모일 때에는 그 가지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약한 가축은 다 라반의 것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소유가 된 이 ‘점 있는 것이나 아롱진 것’을 라반의 소유와 분리해 두어서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43절입니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이렇게 해서 야곱이 부자가 되자 야곱을 대하는 라반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라반은 계약을 잘못 맺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야곱과 맺은 계약조건을 바꾸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번에는 검은 가축만 야곱의 것이 되고 그 나머지는 다 자기 가축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면 실한 가축은 다 검은 것이 되고 나머지 약한 가축은 라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흰 가축은 야곱의 것이 되고 나머지는 다 자기의 것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실한 것은 다 흰 가축이 되고 나머지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라반은 6년 동안 무려 10번이나 야곱에게 주는 품삯을 변경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한 야곱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14년, 외삼촌의 양 때를 위하여 6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10번이나 바꾸셨으며”라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42절에서 무슨 말을 했습니까?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20년 동안의 자신의 수고와 억울함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외삼촌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해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야곱의 말을 통해서 또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야곱이 섬겼던 하나님은 그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억울함을 다 아시고 신원해 주셨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또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셋째, 라반의 고백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밧단 아람에서 살고 있던 라반은, 그를 찾아와 함께 생활하였던 야곱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고 살아가는 야곱 때문에 자신의 가정에 복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전에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너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라.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리라.”라고도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로 이어졌고, 또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로 이어져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은 오늘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믿는 우리들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복을 누리며 살길 바랍니다. 이 복이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주신 복인 것입니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았습니까? 라반이 자신의 소유 가축을 야곱과 그 아들들에게 나누어 맡겼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맡긴 가축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는데, 그 아들들에게 맡긴 가축은 세월이 지나가도 별로 숫자가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라반은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야곱 때문에 그 집에 복을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야곱을 더 붙잡아 두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두 딸을 주면서까지 붙잡아 두려고 했고, 품삯을 후하게 쳐서 줄테니 더 남아있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야곱의 의도와 라반의 의도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더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의 소유재산을 마련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객지 생활 20년을 하고 나서 빈손으로 고향에 가는 것보다, 자기 소유재산을 마련해 가지고 가는 것이 더 좋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반은 달랐습니다.
라반이 말로는 ‘네가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것 보다 너의 소유재산을 마련해서 가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라고 하였지만, 실재로는 야곱을 가나안 땅으로 가지 못하도록 계속 붙잡아 두면서, 그 야곱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더 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야곱을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까지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야곱의 가축은 많아지는데 라반의 가축은 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라반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라반의 아들들의 눈에도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해 주시는 것을 막아 보려고, 6년 동안 10번이나 계약조건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으로는 야곱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야곱의 소유가 라반의 소유보다 더 많아지게 되었고, 야곱은 소와 양과 나귀와 낙타의 큰 때를 이룬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잘 알고 있었던 라반은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말씀에서 야곱과 언약을 세우면서 누구를 증인으로 세우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신 하나님을 언약의 증인으로 세우고 있습니다. 50절입니다.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라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면서, 나는 나의 딸이 야곱에게 어떤 대우를 받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 언약의 증인이 되사 공평하게 판단해 주실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라반이 야곱과 함께 생활하면서 알게 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넷째, 라헬의 생애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은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라헬은 야곱이 20년 처가살이할 때 야곱에게 큰 힘이 되어준 아내였습니다. 만약 라헬이 없었다면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의 20년의 고난을 견디어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이 있었기에 20년의 고난도 기쁘게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갈 때, 라헬은 아버지가 가정의 수호신으로 섬겨오던 ‘드라빔’을 몰래 가지고 나왔습니다. 라헬은 왜 ‘드라빔’을 가지고 나왔을까요? 라헬이 생각하기를 이 ‘드라빔’이 아버지 집을 지켜 주었던 것처럼, 자기와 자기 가정도 지켜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져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라헬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라헬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았던 야곱의 가장 사랑받는 아내였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은 야곱이 가진 신앙과 달랐습니다. ‘드리빔’을 훔친 이 사건은 라헬의 신앙이 야곱의 신앙과 달랐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라반의 생각은 어떠했습니까?
라반은 야곱이 자기 때문에 가정도 이루고, 또 부자가 되었으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는 사람처럼 도망치듯 자기를 떠난 것에 분노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이 일은 내가 시킨 것이니 선악 간에 문제 삼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라반이 문제를 삼았던 것은 그 가정의 수호신인 ‘드라빔’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라빔’을 훔친 라헬은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겼습니까?
그 훔친 ‘드라빔’을 낙타 안장 밑에 넣고, 그 안장을 깔고 앉아서, 마침 경수가 났다는 거짓말로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런데 당시 라헬은 출산을 앞둔 여인이었습니다. 라헬은 이제 몇일 있으면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어찌 라반과 그 아들들이 이것을 모를 수 있었겠습니까? 라헬의 거짓말은 금방 탄로가 날 수밖에 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던 라반과 그 아들들을 속여 넘길 수 있었겠습니까?
과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소돔 땅에 살고 있던 롯을 구해 주셨던 일이 있습니다. 저는 동일한 하나님께서 이제 20년 타향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을 생각하사 ‘드라빔’을 훔친 라헬이 그 아버지의 분노를 피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라반과 그 아들들의 눈과 귀를 가려 주셔서 라헬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입장을 아시고 배려해 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여기서 라헬의 범죄가 드러나서 라헬이 그 아버지의 진노를 받게 된다면, 이것은 야곱이나 그 자녀에게는 회복할 수 없는 큰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면, 조금 있으면 또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그에게로 오게 될 때 야곱이 그런 에서를 맞이할 용기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면 야곱은 에서가 겁이나서 도망함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라헬의 범죄가 드러나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라헬의 죄까지 다 눈감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이후 라헬은 베냐민 출산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러면 라헬은 왜 죽었겠습니까? 죽은 자의 특징은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라헬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후 문맥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범죄한 라헬이 분노한 라반의 눈을 피했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생각하사 라반과 그 아들들에게는 발각되지 않도록 해 주셨지만, 라헬이 지은 그 죄까지 다 눈감아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할 때 꼭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다윗이 회개할 때 그 즉시 그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그 죄에 대한 형벌까지 면제해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범죄 한 이후 그 죄에 대한 형벌로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죄를 떠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그 능력이 무한하신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 우리가 야곱의 삶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그 백성들에게 은혜로 역사해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두 번째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추어 주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구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햇빛을 비춰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 ‘보편적인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 보편적인 은혜 때문에 인류는 멸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태양을 거두어 가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즉시 인류의 멸망이 시작될 것입니다. 또 지구는 그 축이 23.5도 정도 기울어서 자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지구의 자전축을 조금만 변화시키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구의 기후와 환경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증거에 의하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달이 없으면 지구는 그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려서 결국 사람이 살 수 없는 행성이 된다고 합니다. 지금 지구의 상태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적의 상태로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것입니다. 이런 환경들은 사람들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일반적인 은총에 기인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는 이런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구분해서 주시는 ‘개별적인 은혜,’ ‘특별한 은혜’도 있습니다. 이 특별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은혜받을 만한 자격과 조건을 갖춘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려서 고통하고 아파하고 있고 또 그 가족들도 모두 염려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냥 그 사람의 병을 고쳐주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지극히 개별적이고 특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은혜는 은혜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보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고침 받은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내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내 병이 고침받을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다가가서 그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 즉시 병에서 놓여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그동안 수많은 의원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병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될 때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주시는 은혜를 덧입고자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믿고 소원한 대로 병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또 친구들에게 들것에 들려 예수님께 나아왔던 중풍 병자도 같습니다.
이 중풍 병자는 자신도 예수님께 나아가면 고침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게 했고, 그 믿고 있었던 대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는 병 고침을 받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들이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게 되었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특별하게 베풀어 주신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려고 할 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고 마음이고 기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마음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또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면 왜 그냥 역사해 주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보고, 우리의 믿음을 보고, 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런 마음의 소원도 갖고 있지 않는데,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데, 우리가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사람들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마음을 확인하신 후에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아무 생각도 없이 살면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믿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의 소원이 있든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의 마음이 있든지,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간절하게 기도하든지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 믿지 않는 가족들이 있고, 그 가족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가족들이 예수 믿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에 응답해 주셔서 우리들의 가족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시대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기대도 바람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이런 소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 역사가 어떻게 보일까요?
지금 유럽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일어나고,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또 우리나라와 북한 사이에 전쟁의 긴장이 고조되고, 중국과 대만 사이에 전쟁의 소문이 들려올 때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이 시대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민족과 민족이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시대’이며, 또 성경은 ‘이 모든 것이 종말에 있을 재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신 시대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결국 요한계시록 6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검은 말 즉 ‘인 재앙의 전쟁’으로 나아갈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인 재앙의 전쟁은 결국 온 인류가 싸우는 핵전쟁 즉 제3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이 전쟁 후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전 세계를 지배하는 단일국가를 세울 것이며, 이 3년 반이 지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인류 역사는 끝이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들을 보면서 주님이 약속하셨던 재림의 날이 아주 가까이 이르렀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전쟁들을 성경의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알려 주는 재림의 징조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재림의 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되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들이 역사 속에 일어나고 있는 징조를 보고, 시대의 변화를 읽고 깨달아서, 깨어 일어나서 그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깨닫고 깨어 일어나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하늘 나라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사모하며,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깨어 일어나서, 우리 입을 넓게 열고 기도하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응답해 주십니까? 이렇게 깨어 일어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알려주시고, 또 왜 깨어 일어나야 하는 시대인지 알려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물질문명이 극대화된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시대 속에서 믿음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깨어 일어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충만함을 주시고, 또 성령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종말 시대를 깨어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만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이나 혹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또 믿음은 있으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살고 있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보다 오히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성령이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시대가 종말시대라고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또 자기를 인도해 주시고자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눈은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는 있어도 듣지 못하는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성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성도가 되는 것이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최악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들이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우리를 도우실 수 있으십니다. 비록 이 시대가 암울하고 우리 삶이 어려울지라도, 우리 모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흔들리지 말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역을 감당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긍정하며, 약속의 말씀을 굳게 잡고 꿈과 희망과 기대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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