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하나님
신명기 8 : 2-3
마틴 부버는 “나와 너”(Ich-Du)라는 그의 책에서, 인간을 관계적인 존재라고 정의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인 만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버는 만약 인간이 ‘나와 너’라는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나와 그것’이라는 비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게 될 때 외로움과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같습니다.
신앙의 건강성은 하나님과 인간이 얼마나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교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단지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능력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가지고 있는 신앙이 다르고, 신앙을 통해 맺어가는 열매가 다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우리에 의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위스의 신학자 ‘에밀부르너’는 “만남의 진리”라는 그의 책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들에게 열어 보여 주실 때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강한 욕구와 의지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은 능동적으로 역사하시고,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반응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이런 관계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게 되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되며, 성령 하나님이 능동적으로 역사해 주심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역사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주님으로 믿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해 주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누구라도 이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멘.
더하여 ‘에밀부르너’는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한 사람들은, 반드시 그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하나님께 맡기고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그 살아가는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기 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살던 사람들이, 믿음을 가진 이후에는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 그 삶이 송두리째 변화되는 이런 사건을 그는 신앙 사건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신명기 8장 말씀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생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생활을 하면서 매일매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신명기 8:2-3절 말씀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생활을 통해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믿음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신명기 8: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생활이라는 어렵고 힘든 삶을 주신 이유는, 그들이 가진 마음을, 그들이 가진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험은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입니다. 이런 시험은 창세기 3장에서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여, 죄에 빠지도록 했던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테스트로서의 시험입니다. 우리나라의 고등학생들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수능이라는 시험을 봅니다. 그러면 국가는 왜 학생들에게 수능시험을 보게 합니까? 전국에 있는 학생들에게 동일한 시험을 보게 함으로, 그 학생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려고 수능시험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실력에 맞는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능 시험은 그 학생이 가지고 있는 실력을 테스트해 보는 시험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명기 8: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시험은 테스트로서의 시험입니다.
2절 하반 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어떠한지’ 알아보려고 테스트해 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낮추시며”라는 말씀은 ‘괴롭게 하시며,’ ‘천하게 하시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괴롭게 하시고, 또 그들의 삶을 천하게 하심을 통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과 신앙을 시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험하셨습니까?
때로는 물이 없어서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고, 때로는 양식이 없어서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으며, 때로는 낯의 더위 때문에, 때로는 밤의 추위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마치 유목민처럼 광야에서 살면서, 문명 세계를 떠나 살아가고 있는 집시들처럼 그렇게 유랑하며 살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시험을 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로는 물이 없다고 원망을 하고, 때로는 양식이 떨어졌다고 원망을 하고, 때로는 따분하고 단조로운 광야 생활이 싫다고 원망을 하고, 때로는 광야에서 고생하며 사느니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서 노예로 사는 것이 더 좋겠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살았던 신앙과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도 없었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진심은 언제 잘 드러납니까?
상황이 잘 풀리고 상황이 좋을 때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어려워지면 그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던 진심이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어느 부자 집 아들이 매일처럼 술을 마시고 밤늦게 귀가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걱정이 되어서 ‘너는 무엇을 하는데 매일 밤늦게 술에 취해 돌아오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은 ‘좋은 친구들을 사귀다 보니 술도 먹게 되고 귀가 시간도 늦어진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네 친구가 몇 명이나 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한 백 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또 ‘그 친구들이 너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냐?’라고 물었고, 아들은 "같이 죽자 해도 죽어줄 수 있는 친구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그런 친구인지 증명해 보일 수 있느냐?’라고 묻자, 아들은 ‘당장에라도 증명해 보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하인에게 큰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털을 깨끗이 밀고, 가마니로 둘둘 말아서 지게 위에 지워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밤이 깊어 가는 시간에 아들에게 그 지게를 지우고서는 "네가 가장 믿을 만한 친구에게로 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내 친구들은 다 믿을 만하다.’라고 하면서 어느 한 친구의 집으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친구를 깨워서 이렇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친구야! 내가 실수로 누구와 싸우다가 사람을 죽였는데 어쩌면 좋겠는가? 나는 몇 대 독자요. 부모님도 연로하셔서, 만약 내가 감옥에 가면 두 분은 분명 제명을 살지 못하시고 돌아가실 것이네. 그러니 자네가 나를 대신해서 이 일을 잘 처리 해주게‘, ’그러면 내가 자네의 가족들을 잘 돌보아주고, 자네가 감옥에서 속히 나올 수 있도록 힘써 주겠네‘. ’그리고 자네가 감옥에서 나오게 되면 내가 그 일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네."라고 말하라고 시켰습니다.
아들은 그 친구에게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친구는 주먹으로 아들의 얼굴을 때리면서, ‘누구를 살인자로 만들려고 하느냐?’라고 하면서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게 하며 쫓아내었습니다.
아들은 그 친구가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황당해하고 있는데, 그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데리고 다른 친구에게로 갔습니다. 두 번째 친구에게도 아들은 욕을 먹고 거절을 당했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친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친구들이 평소에는 "너를 위해서라면 내가 대신 죽어줄 수도 있다.“라고 하던 친구들이었는데, 아들의 간절한 요청을 들어주고 받아주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날이 새기 전에 몇 군데만 더 가 보자.’라고 하셨지만, 아들은 이제 더 이상 가 볼만한 곳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 아들에게 ‘내게는 친구가 단 한 명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한번 해보자구나!’라고 하면서 지게를 짊어지고 그 친구에게로 갔습니다.
그때는 이미 닭이 우는 새벽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곤히 자고 있는 친구를 다급하게 부르자 머리가 허연 아버지 친구가 나타났습니다. 그 친구는 ‘이 새벽에 웬일이냐?’라고 하면서 두 부자를 안방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시킨 대로 말하면서 "내가 감옥에 들어가면 누가 뒷일을 보겠는가? 그러니 나를 대신해서 자네가 한 일이라고 말을 해주게나. 그러면 내가 다 알아서 뒤처리를 해주겠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오죽하면 자네가 내게 왔겠나. 내가 자네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라고 하며 ‘그렇게 하세’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날이 새기 전에 먼저 지게 위에 있는 시신을 광에다 숨겨놓자고 하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옮기기 위해 가마니를 들추니 그것은 시신이 아니라 갓 잡은 돼지였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에, 그 돼지로 그 집에서 큰잔치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친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좋을 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어려워지면 비로써 감추고 있던 진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친구들을 시험해 보지 않았으면, 아들은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을 해 보니 그 감추어 있던 마음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40년 광야 생활을 하게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마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40년 광야 생활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누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인지, 누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시험하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의 마음과 믿음도 시험하십니다. 우리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은 유혹으로서의 시험이 아닙니다. 유혹으로서는 시험은 마귀가 하는 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시험은 우리가 가진 마음과 우리가 가진 믿음을 알아보시기 위해 우리를 테스트 하시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시험하셨듯이,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시험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우리의 변함 없는 믿음을 보여 드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훈련해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시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마음과 믿음을 아신 후에, 40년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훈련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통해 훈련하셨습니까? 8:3절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을 통해 훈련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며, 만나라는 양식 주심을 통해 훈련하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만나는 신비하게도 매일 주어졌으며 매일 매일 거두어야 했습니다.
많이 거두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루가 지나가면 썩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매일 만나를 주실 것을 믿고,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는 훈련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안식일 전날에는 안식일에 먹을 것까지 이틀분을 거두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했더니 안식일 전날에 거둔 만나는 하루가 지나도 썩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만나를 거두어 먹는 것을 통해, 하나님과 그 주신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훈련을 40년간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리도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신앙의 훈련을 받으며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실 때는 마치 광야에서 생활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때로는 낮추시고, 때로는 힘들게 하시고, 때로는 어려운 일을 만나게도 하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자세로 훈련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는 자원하여 기쁘게 훈련을 받을 뿐 아니라, 빨리 내가 변하고, 빨리 내가 새롭게 되어서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시험의 날을 끝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의 지혜와 이런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요구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삶을 우리는 말씀 중심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말씀 중심의 신앙이란?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 동안 가르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바로 우리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은 세상 다른 나라들과 구별되는 민족이었습니다.
세상의 다른 나라들은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거나, 국제적으로 무역을 잘하거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삶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박해하는 애굽 왕과 그 군대를 대항했던 방법이 무엇입니까?
군대를 조직해서 대항했습니까? 비밀 결사단을 조직해서 대항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유월절 양을 잡고, 그 양의 피를 문에 발라 두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밤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어린 양의 피가 발려 있는 이스라엘 집은 넘어가게 하시고, 어린 양의 피가 발려 있지 않은 애굽 백성들의 집에서는 장자를 죽이는 심판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은 돈으로, 권력으로, 명성으로, 자기 지혜로 복을 누리며 살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길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우리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 40년 생활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훈련 시키신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8:3절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신앙의 훈련이 필요했습니까?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갔던 때는 모멕 거두는 시기였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는 언제나 요단강 물이 강둑까지 넘쳐흐르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요단강을 어떻게 건넜습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 다리를 놓았습니까? 배를 준비해서 타고 건넜습니까? 아니면 밧줄을 강 양쪽에 걸어놓고 그것을 타고 건넜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다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이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급류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던 요단강을 건너, 네가 너희에게 약속한 땅으로 들어가라고 라고 하실 때,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서가던 제사장들이 그 발을 요단강물에 담그자, 그렇게 위세 좋게 흘러 내려오던 요단강물이 위에서부터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뒤를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을 밟고 요단강을 건너갔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난공불락의 요새인 여리고성을 어떻게 점령했습니까? 오랜 시간 동안 포위하여서 그 성의 양식이 떨어지고 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서 항복을 받아 내었습니까? 아니면 마치 중공군들이 우리나라에서 했던 것처럼 그 숫자로 밀어붙이는 인해 전술로 점령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 6일 동안은 여리고 성을 한 바퀴씩 돌고, 제7일에는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돈 후에, 제사장들이 일곱 양각 나팔을 길게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 일제히 큰 소리로 ‘여리고 성아. 무너져라.’라고 외칠 때 그 성은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이성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삶을 훈련해 왔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여 사는 삶의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방법과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방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고 그 능력과 역사를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로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건강에 이상이 생겨 생존의 위기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가정이나 직장 생활에 위기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세계가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여 있는 시대에는 개개인에게 주시는 위기가 아니라, 전 세계를 경제적인 위기, 군사적인 위기 속으로 들어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위기를 우리에게 주십니까?
그것은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이 이 세상 방법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것 보다, 세상을 따라 사는 것이 더 좋아 보이고 더 유익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시면서 하루 먹을 양식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에는 더 많이 거두어서 일부는 내일을 위해 저장해 두는 것이 더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분의 양식을 거두고 안식에서는 거두러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할 때는 아무도 없는 안식일 날 혼자 나가서 거두어 오는 것이 더 유익 되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 성의 모든 것은 ‘불태워버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의 보기에는 시날 산 아름다운 외투와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되어 보이는 금덩어리를 태우지 않고 가지는 것이 더 좋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범죄 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전쟁으로 내보내시면서 아말렉 족속과 그들의 소유를 다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과 백성들의 보기에는 튼실한 짐승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서 취하는 것이 더 좋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는 어떤 토도 달지 아니하고, 그 주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방법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사는 방법입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고, 훈련하셔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신 대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은 이 세상에 속하여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3절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보십시오.
세월이 갈수록 세상은 더 험악해져 갑니다.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극한 대결이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경제를 보십시오.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으로 세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범죄를 보십시오. 범죄는 날로 날로 더 흉악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상황이 이러한데 우리 자녀들이 살아야 할 시대는 어떻겠습니까?
그 시대에 정치가 희망찬 미래를 열어줄 수 있을까요? 과학이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희망의 시대를 열어줄 수 있을까요? 경제적인 번영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런 것들로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이 세상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먼저 자신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삶을 살아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런 삶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무엇인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로 나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명을 감당하는 제사장 나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습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이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이 우리들이 먼저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과 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자신들도 받아 누리며 살고자 하는 강한 마음의 소원을 갖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나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과 성도된 우리들이 받고 사는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목적을 이루시려고 우리를 시험하시고, 훈련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백성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이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이 세상을 새롭게 하고,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도들뿐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며 사는 축복된 삶을 세상에 보여 주지 못하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는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그 주신 말씀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욕심입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 좋아 보이는 이 세상의 영광과 아름다움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은 고민하게 됩니다.
그 좋아 보이는 이 세상을 따라가야 할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할지 갈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는 세상이 주는 다양한 유혹들을 믿음으로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들도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 뿐 아니라, 우리의 이런 삶을 보고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오도록 결단하게 하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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