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집인 성막
출애굽기 36:8-19
전에 우리나라는 부동산 경기가 가열되면서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갔습니다.
집값이 오르니 함께 전세도 많이 오르게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래서 경기도의 인구는 불어나고 서울의 인구는 줄어들었던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어 집값도 전제 값도 많이 내렸습니다.
그래서 집에 투자했던 많은 사람들이 신용불량자가 되고, 또 전세 사기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은 집값이 올라도 걱정 내려도 걱정인 시대입니다.
지난주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교회로 쓰고 있는 건물의 임대료를 너무 많이 올려 달라고 해서 교회를 이전하려고 하는데, 그 주변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교회가 옮겨갈 만한 장소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까지 찾아보고 있는데 거리가 멀어지면 성도들이 따라올지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이전은 쉽지 않습니다.
이전 비용도 만만치 않고 또 새롭게 시설을 꾸며야 합니다. 상가교회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교회를 이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마찬가지입니다.
될 수 있으면 이사를 가려고 하지 않고, 웬만하면 타협해서 그냥 눌러앉아 살려고 합니다. 이사를 가면 그 비용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짐 정리의 번거로움도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사 철이 되면 아주 연중행사처럼 이사를 오고 갔습니다. 그래서 한 동네 한 10년쯤 살게 되면 이사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하나님도 엄청나게 이사를 많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예 자주 이사할 것을 각오하시고, 하나님의 집인 성막을 지을 때 이사하기 쉽도록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인 성막을 볼 때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 집 지으실 땅이 없으셔서 하나님의 집을 이동식으로 지으라고 하셨겠습니까? 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신데 이 땅 위에 그 집을 가지실 필요가 있으셨겠습니까? 또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로서 그 창조하신 우주보다 크신 분이신데 그 하나님을 위해 이 좁은 지구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속에 집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을 이 세상 속에 지어드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집을 지으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필요 때문에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집이 필요하셔서 하나님의 집인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막은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려고 지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 가운데 지어져 있는 하나님의 성막을 보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그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하시려고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왕 하나님의 성막을 지으려면 우리 생각에는 어떻게 지어야 할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크고 영화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면 크고 화려하게 지어야 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성막 설계도를 보면 조립식 건물로서 그 면적이 30평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지은 성막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이 성막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막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성막의 겉은 수수하나 그 안은 영광스러웠다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 살았던 유목민들은 텐트 생활을 했습니다.
민족에 따라서 텐트 치는 모양이 약간씩 달랐지만, 대체로 중앙에 하나 혹은 두 개의 높은 기둥을 세우고 그 주위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위에 텐트를 덮으면 가운데가 뾰쪽 솟은 텐트가 됩니다.
이렇게 텐트 중앙에 높은 기둥을 세웠던 것은, 그렇게 해야 빗물이 잘 흘러 내려가고, 또 강한 바람에도 잘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텐트 안에 바람이 잘 통할 수 있도록 옆면에는 말아 올릴 수 있는 창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유목민들이 치는 텐트라도 족장이나 귀족들의 텐트는 조금 달랐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텐트는 그 중앙을 아주 높게 하고, 화려한 천으로 그 위에 덮어서, 멀리서 보아도 그 텐트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높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성막은 중앙에 높이 솟아 있는 기둥도 없습니다.
또 성막 사방에 문도 내지 않았고 널빤지로 삥 둘러 세워 놓았습니다. 이 널빤지를 세울 때 남쪽과 북쪽 벽에는 20개씩의 널빤지를 세웠고, 서쪽 벽에는 6개를 세웠으며, 동쪽은 성막의 입구가 있기 곳이기 때문에 널빤지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 널빤지들은 쉬띰 나무라고 하는 광야에서 자라는 가시나무로 만들었고 순금으로 그 위를 감쌌습니다. 또 이 널빤지 중간에는 고리를 달아서 널빤지와 널빤지를 서로 꿰어서 세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아주 견고한 벽을 가진 텐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널빤지들 위에 천막을 덮는 방식으로 성막을 쳤습니다.
이 성막에는 기둥이 없었으며, 하나의 넓은 공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방해되는 기둥이 없었습니다.
이 성막은 그 외형이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나 로마의 신전들을 보면 그 신전들의 모양이 어떠합니까? 지금도 남아 있는 이집트의 신전들을 보면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또 우리가 유럽 각국에 건축 되어 있는 옛 천주교의 성당들을 보면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이런 건물들은 모두가 다 아주 웅장한 건축물로서, 중간에 크고 굵은 기둥들을 많이 세워서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건물들은 웅장함도 있고 또 아름다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설계하신 성막을 보면 전혀 기둥이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거대한 기둥으로, 웅장한 기둥으로 그 위엄을 나타내시고, 사람들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또 성막의 지붕에는 내 겹의 천막을 덮었습니다.
맨 안쪽의 천막은 성막의 천장을 이루는 천막으로 열 폭의 하얀 세마포를 덮도록 하였습니다. 8절입니다. “일하는 사람 중에 마음이 지혜로운 모든 사람이 열 폭 휘장으로 성막을 지었으니 곧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들을 무늬 놓아 짜서 지은 것이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그룹’들은 천사들을 말합니다.
흰 세마포 위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여러 천사의 모양을 수놓아서, 제사장이 성막에 들어가서 천장을 올려다보면 마치 그 천정은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것 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 위에는 염소 털로 짠 열한 폭의 천막을 덮었습니다.
14절입니다.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 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었으니” 이 염소 털은 요즘 우리 표현으로 설명하면, 건물을 지을 때 벽과 벽 사이에 반드시 단열재를 넣듯이, 단열재 역할을 하는 염소 털로 만든 천막을 덮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붉은색 수양의 가죽으로 만든 천막을 덮었습니다.
19절입니다.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이 붉은 색 수양의 가죽은 아주 질긴 가죽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수양의 가죽은 성막의 견고한 지붕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맨 위에는 물개 가죽이나 돌고래 가죽으로 덮었습니다.
19절입니다.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 덮개를 만들었더라.” 이 물개 가죽이나 돌고래 가죽으로 성막의 맨 바깥을 덮었던 것은 이것이 비를 막아주는 성막의 지붕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물개 가죽이나 돌고래 가죽으로 덮여 있었던 하나님의 성막은 밖에서 보면 그 모습이 아주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 정도로 수수하였습니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제가 군대 생활을 할 때는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는 부대 밖에서 텐트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도 같았습니다. 과거에도 군인들이 부대를 떠나 전쟁에 나가면 임시 막사로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 참여한 왕이나 장군들의 텐트는, 지붕이 높고, 규모도 커서 멀리서도 그 위엄과 권세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집인 성막은 비록 텐트라고 할지라도 크고 화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성막의 설계도를 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저 평평한 지붕으로 덮여 있는 텐트였습니다. 그리고 그 외형적인 색깔도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우중충하게 보이는 물개 가죽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성막을 볼 때 ‘도대체 이처럼 보잘것없어 보이는 성막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성막의 외형은 아주 수수했습니다.
요한복음 5:39절 말씀을 보면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어진 성막은 누구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까? 성막은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막 안에 있는 법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요1:14) 보여주고 있고, 진설 병은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 생명의 양식되심을(요6:32-35) 보여주고 있으며, 물두멍은 우리를 정결케 하고 성결케 해 주시는 그리스도를(요13:7-10) 보여주고 있고, 분향 단은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을(히7:25) 보여주고 있습니다. 번제 단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요일2:2) 보여주고 있고,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해 주었던 휘장은 그리스도의 육체를(히10:20) 보여주으며, 성막 안을 밝혔던 그 촛대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계1:13)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막의 초라했던 외형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겸손하신 성품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하심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도 하신 일이 있으십니다.
또 그리스도는 겉모습을 치장하심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시려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겉모습을 평범하고 수수하게 하심으로서, 누구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나 올 수 있게 해 주신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라면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목회자가 되고 하나님을 닮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름 있는 목사님들을 보면 예수님을 닮지 않고 정치 지도자들을 많이 닮아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그렇게 권위 있어 보이는 목회자를 존경하고 따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그 외형이 아니라 그 안의 모습이 중요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막 안에 들어가면 그 외형적인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성막의 벽은 모두 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금으로 된 이 성막 안보다 더 찬란한 곳이 있겠습니까? 또 성막의 천장은 하얀 세마포로 덮여 있었는데 그 세마포 위에는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천사들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그 성막 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곳이 하늘인지 땅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그 모습이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막은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름다움과 신비로움과 찬란한 영광의 광채가 가득한 그런 곳이었습니다.
이 성막은 장차 이 땅에 오실 진짜 성막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 외형적인 모습은 보잘것없는 분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도 아니셨습니다. 높은 학벌을 가지신 분도 아니셨습니다. 그 외모도 특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외형에 대해 예언하기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사53:)고 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꼭 “갈릴리인”이라고 하며 차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갈릴리가 아주 시골이고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릴리 출신이신 예수님을 만나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메시야시다.” “하나님이 약속해 오신 그 구세주시다.” 비록 예수님의 외모는 보잘 것이 없으셨지만, 누구라도 예수님을 만나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었던 그 무엇이 예수님을 이렇게 보게 했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이야기하게 되면, 그 수수한 외모를 가지신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 즉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과 사랑과 은혜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지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처음 볼 때는 훌륭해 보이고 괜찮아 보여도, 같이 지내다가 보면 그 부패한 본성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리 오래 만나도 이런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는 언제나 은혜의 말씀, 지혜의 말씀, 사랑의 말씀들이 흘러나왔습니다. 또 예수님은 그 만나는 사람들의 모든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지금 그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고,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있으며,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바로 그 사람을 치료해 주는 말씀이고, 구원해 주는 말씀이고, 믿음과 확신을 주는 말씀 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움직일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곤경에 처한 혼인집 신랑 신부를 돕기도 하셨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굶주린 군중 오천 명을 먹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 온전케 해 주셨으며, 심지어 죽은 외아들을 따라가며 슬피 우는 과부를 위해서는 그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못 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아멘’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나아가기만 하면 그 모든 문제들은 해결되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참모습을 하나님은 그 우중충한 텐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성막 내부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통해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의 화려한 외적 모습을 보고 찾아갑니다.
어느 교회가 시설이 좋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느냐? 하는 외적 모습을 보고 다닐 교회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원형인 성막의 외적 모습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도 그 구성원 중에는 가난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를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교회 안에 들어가 보면 그 안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은 초라한 외모를 가진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는 성막 금 벽과 같이 금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우리들이 교회에 들어와 예배드리고 있는 이 순간은, 우리가 사면이 금으로 싸여진 하나님의 성막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함께 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음으로 교회에 모인 성도들과 함께 하시면서, 천사들을 통해 사죄와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는 금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 뿐 아니라,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함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막 안은 쾌적하였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며 살았던 미디안 광야는 낮에는 너무 덥고 밤에는 너무나도 추웠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를 칠 때 낮에는 바람이 잘 통하도록 옆 날개를 말아 올렸고, 밤이 되면 그 말아 올렸던 옆 날개를 늘어뜨려서 보온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으라고 하신 성막은 사방이 판자벽으로 꽉 막힌 텐트였습니다.
더구나 그 성막 안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제사장들은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모자까지 쓰고 하나님을 섬기는 의식을 행하여야 했습니다.
아마 성막이 보통 텐트였다면 그 안은 찜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은 더위를 견디어 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막의 지붕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네 겹으로 되어 있었는데, 두 번째로 두꺼운 염소 털로 만들었던 천막은 완벽한 보온재였습니다. 그래서 낮에 아무리 강한 햇볕이 내리쬐어도 성막 안의 온도는 올라가지 않았고, 밤의 공기가 아무리 차가워도 성막 안은 춥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환경을 아주 쾌적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 이 밀폐된 성막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라고 하면 성막 안이 무더울 것으로 생각하고 백이면 백 사람 모두가 다 ‘나는 못하겠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막 안에 들어가 보면 그곳은 이 세상 어디보다 시원한 곳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면서 답답해할 것입니다. 1년 52주 동안을 하나님을 섬긴다고 쉬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답답하게 살아가는 우리 생활을 보며 아주 따분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우리들의 생활이 정말 답답하고 따분합니까?
우리들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기쁨, 감격과 감사, 평화와 쉼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즐기며 사는 삶보다 더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닙니까?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이 세상의 빛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열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열이 어떻게 전도되고, 또 열이 어떻게 차단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없는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행동임을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시키신다면 그 일은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너무나도 잘 아실 뿐 아니라, 우리의 입장과 우리의 처지와 또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까지도 너무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불평불만 하지 않고 늘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정도 목마름이라면 그들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거나, 이 정도 배고픔이라면 그들이 견디지 못할 것임을 이미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만나도 주시고, 반석에서 물도 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 누구보다 가장 합리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말씀대로만 하면 잘못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면서 자기 생각대로 행복을 추구하며 살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라고 하셨는데, 요즘에는 남자들끼리, 혹은 여자들끼리 결혼해도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심지어 외국에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목사안수까지 주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또 하나님은 일주일에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라고 하셨는데, 요즘은 근로 기준법령으로 주 5일 동안 일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 5일만 일하게 되자 가정과 사회에 다양한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또 소는 풀을 먹고 자라야 하는데 사람들이 소의 살을 빨리 찌우려고 소와 양의 내장을 갈아서 사료와 함께 먹였습니다. 그랬더니 광우병이 생겨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아침에 해가 뜨면 일찍이 일어나고, 저녁에 해가 지면 일찍이 잠을 자고 쉬라고 밤과 낮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기 불을 밝혀 놓고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잃고 그 생활 또한 엉망이 되어갔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삶의 지혜이고 행복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합리적인 분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내 경험에 맞지 않는다고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바로 인류에게 재앙이 되어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나를 사랑해서 내게 유익한 말씀만 해 주고 계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집을 이동식 작은 텐트로 지으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계실 집이 없어서 그렇게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세워져 있는 이 성막을 통해 “내가 항상 너희들 가운데 있다.” “너희는 내 백성이다.”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그 작은 성막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중에 짓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항상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막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부와 영광과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우리들도 구약의 성막과 같은 교회를 통해서, 또는 우리를 성전 삼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것을 늘 확인하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복들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성막은 이동식이었습니다.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신전을 이동식으로 짓는 민족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막을 이동식으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신전을 조립식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지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니 무슨 신전을 조립식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짓느냐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교 신전들을 보면 모두가 다 한적한 곳에, 거대한 규모로 지어놓고 사람들이 신에게 제사할 때만 그곳으로 찾아가곤 하였습니다.
요르단에 가면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하는 페트라 유적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바위산을 통째로 깎아서 만든 신전이 있습니다. 이 신전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을 섬기기 위해서는 먼 길을 여행하여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화려한 성전을 지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동식으로 성막을 지어서 백성들이 생활하는 한 가운데 두도록 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따라 늘 이동해야 했기에, 성막도 백성들과 같이 이동하기 쉽도록 간편한 텐트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느니라.’라는 말씀을 자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 백성들과 함께 해 주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막을 통해 함께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해 주시는 것의 보증으로, 이동식 텐트로 성막을 지어 백성 가운데 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장소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나 다 계시는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있는 장소에는 어디나 다 계시는 분이시고, 언제나 함께하시면서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각기 집을 짓고 살 때도, 하나님은 약 500년이 지나도록 고정식 성전을 지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했을 때도 하나님은 그 요구를 허락하지 않으시다가, 솔로몬 때에 비로써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돌로 만든 고정식 성전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돌로 만든 고정식 성전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느끼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백성들과 함께하시면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성막을 조립식으로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이 성막을 항상 메고 다니면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라는 것을 깨닫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같이 교회에 모일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 모임 가운데 와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학교로 돌아가고, 직장으로 돌아가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들의 집으로 가시고, 우리 학교로 가시고, 우리 직장으로 함께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는 그 모든 곳에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가는 곳곳마다 돌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가는 곳곳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그 아버지가 계시는 가나안 땅에만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벧엘 들판에서 하늘까지 닿아있는 사닥다리를 타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난 후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그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면서, 또 지금 여기에 자기와도 함께 계시는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모시고 믿음으로 20년 타향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 우리들이 바로 움직이는 성전입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 가든지 가장 먼저 그곳에 하나님의 성막을 조립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움직이는 성전의 개념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배가 끝남과 동시에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도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장소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게 되는 그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야 하고, 또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고, 그 베풀어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의 삶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말씀을 전하고 듣고 있는 우리 모두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 삶에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감사하며,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힘입어서, 믿음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이 한 주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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