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손가락
출애굽기 8:16-19
1. 당시 애굽의 상황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이주한 후 430년이 되었을 때(출12:40)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출애굽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행하신 연후에야,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막았습니까?
출애굽 당시 애굽의 인구는 약 400-500 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를 보면 당시 애굽에는 약 20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유대인이 아닌 이방 잡족들을 포함한 숫자임). 이렇게 보면 당시 애굽 인구의 약 40%에 해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애굽을 떠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큰 노동력의 손실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또 당시 애굽은 약 2만 명의 훈련된 정예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각각 자기 산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약 60만의 장정을 거느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든든한 지원 세력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전쟁 시에 동원할 수 있는 중요한 인적 자산으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번성은 애굽 통치자들에게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만약 애굽과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국과 함께 한다면 애굽으로서는 큰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 왕 바로는 적당한 수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를 통제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왕 바로가 낸 정책이 무엇입니까?
애굽 땅의 방비를 위해 성을 건축하는 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 동원했습니다. 이를 통해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전쟁도 대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도 줄여보려고 했습니다. 바로는 성을 건축하는 일에 동원한 남자들이 집을 오래 떠나 있게 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생아 출산을 줄여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이제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까지도 강제노역에 동원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를 줄여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이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 산파들에게 은밀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남자아이가 나거든 죽이고, 여자들이 나거든 살려 두라.’ 그러나 산파들은 대부분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서 남자아이들이 태어나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일도 왕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제 바로는 공개적으로 인구 감산을 요구하였습니다.
바로는 애굽의 식량의 증가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너무 빠르게 늘어난다고 하면서, 오늘날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산아제한을 명령했습니다. 그 방법은 남자아이가 나면 나일강에 던지라는 아주 반인륜적인 명령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를 선택해서 낳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그 자녀를 낳게 되면 언제나 그 절반은 남자입니다. 바로의 이 엄한 명령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신을 기피 하게 되었습니다. 또 임신을 하면 그날부터 남아가 태어날지 여아가 태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걱정과 고통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여아를 태어나면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남아가 태어난 집에서는 고통스러운 절규와 울부짖는 소리가 메아리쳐 나왔습니다.
이 고통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부르짖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세우셔서 애굽에 열 재앙을 내리시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도록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신 10가지 재앙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무엇입니까?
제가 신대원에 다닐 때는 이렇게 외웠습니다. ‘피개이파 악독우메 흑장’ ‘피개이파’는 피, 개구리, 이, 파리,라는 뜻입니다.
그 첫 번째 재앙은 ‘피’ 재앙입니다. 모든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이었습니다.
그 두 번째 재앙은 ‘개구리’ 재앙입니다. 애굽 하수에서 수를 셀 수 없이 많은 개구리가 생겨나서 땅으로 올라오는 재앙이었습니다. 그 세 번째 재앙은 ‘이’ 재앙입니다. 땅의 티끌이 전부 다 이가 되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은 애굽의 요술사들도 따라 했다고 합니다.
마술사들은 그 손재주로 입고 있는 흰옷을 순식간에 푸른 옷으로, 또 입고 있는 푸른 옷을 순식간에 붉은 옷으로 바꾸지 않습니까? 애굽의 마술사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물을 한순간에 피로 변하도록 했습니다.
두 번째 ‘개구리 재앙’도 애굽의 요술사들이 따라 했다고 합니다.
마술사들이 그 손에 들고 있는 보자기를 흔들면서 열면, 그 보자기 안에서 비둘기가 나와서 날아가도록 하지 않습니까? 혹은 그 보자기 안에서 수도 없이 많은 꽃잎 들이 나오도록 하지 않습니까? 애굽의 마술사들도 그렇게 개구리가 물에서 나와 땅으로 올라가도록 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이 재앙’은 애굽의 요술사들이 따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마술사들이 보자기에서 이가 조금 나오게 눈속임할 수는 있겠지만, 땅의 티끌이 모두가 다 이가 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8:19절 말씀을 보면 애굽의 요술사들이 ‘이 재앙’을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나이다......’ 여기 사용되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할 수도 있다. 라는 각주를 달아 놓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땅의 티끌이 모두 다 이가 되게 하는 이 재앙은 애굽의 요술사들이 마술을 부려서, 그 손으로 사람들의 눈속임을 하여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땅의 모든 티끌이 이가 되게 하는 이 일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하신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손과 손가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손가락을 가지고 무엇을 합니까? 인간이 하며 사는 거의 모든 일들이 다 이 손가락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글씨를 쓸 때도 이 손가락으로 쓰고,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음식을 만드는 일들도 다 이 손가락으로 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손가락은 엄청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은, 사람이 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기능이 엄청나기 때문에 손가락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그 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엄청납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손가락으로 하실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더 많으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가락은 어떤 손가락인지, 또 그 손가락으로 하시는 일들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
3. 하나님의 손가락
하나님의 손가락은 어떤 손가락입니까?
첫째, 능력의 손가락이었습니다.
출애굽기 8:19 절 말씀을 보면 “요술사들이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담겨 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창세기 2:7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의 몸을 지으실 때 무엇을 사용하셨겠습니까? 발을 사용하셨겠습니까? 머리를 사용하셨겠습니까? 손을 사용하셨겠지요? 하나님은 그 손으로 흙을 뭉치고 깎아 내시면서 사람의 모양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손에는 창조주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능력으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8:3절입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그 능력의 손으로 하늘과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다고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는 창조주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또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그 창조한 세상 즉 ’혼동하고 공허하며 흑암의 깊음에 잠겨 있었던 세상‘에 신적 질서를 부여해 나가셨던 창조도 있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이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로 아담과 함께 죽었던 인류를,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다시 살려내 주시는 창조도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복음을 믿는 이 믿음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그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실 때 거기에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약 2만 명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창조주의 능력이 예수님의 손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손에는 창조주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창조주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우리들은, 무슨 일을 계획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을 계획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까지 믿음으로 계획을 세우고 또 믿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참빛교회를 세울 때도 그랬습니다.
참빛재가복지센터를 세울 때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역사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현재 총회 법에 의하면 내년 2월에는 은퇴해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은퇴한 후에는 어떻게 할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은퇴한 목회자는 하나님을 섬기며 지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같은 처지에 있는 은퇴한 목사님들이 중심이 되어 예배드리는 교회를 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입장에 있는 분들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시고, 또 혼돈하고 공허한 이 세상에 질서를 잡아 주시는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오신 하나님께서, 아무 계획도 잡혀 있지 않은 은퇴 후의 삶에도, 은혜로 함께 해 주시면서 새로운 삶의 질서를 잡아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믿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삶에 개입해 주셔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애굽에서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애굽 왕의 반인륜적인 명령 즉 남아가 나거든 나일강에 던져 죽게 하라는 이 명령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왜 이런 기도를 했습니까?
그 일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애굽은 세계 패권국가였고 초강대국이었습니다. 당시 애굽은 군사적인 힘뿐 아니라, 물질적인 부와 번영을 다 가지고 있었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지 않으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르짖어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애굽 왕의 폭정에서 구원해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하나님의 손가락은 어떤 손가락이었습니까?
창조주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 능력의 손가락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손가락은 어떤 손가락입니까?
둘째,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신 손가락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3:3절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날을 기념하여 유교 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곳에서 인도해 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은 그 권능의 손가락으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베푸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로운 삶을 가져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동일한 손가락으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해방과 자유를 주십니다.
골로새서 1:13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오늘날도 하나님은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흑암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해 주십니다.
누가복음 11:2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손가락)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손가락은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들에게 해방을 주시는 손가락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7:33-3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하나님은 그 손가락으로 육체적인 장애에서, 육체적인 질병에서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치유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권능의 손가락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혹은 바벨론의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능력의 손가락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마귀와 사단과 귀신의 올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치유의 손가락을 가지고 수 많은 사람들을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손가락은 창조주의 권능을 소유한 손가락일 뿐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 해방을 주시고, 자유를 주시고, 치료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손가락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손가락은 어떤 손가락입니까?
셋째, 하나님의 법인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손가락입니다.
출애굽기 32:15-16절입니다.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 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쪽저쪽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출애굽기에 나타난 또 다른 하나님의 손가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기록해 주신 손가락입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친히 그 손으로 두 돌 판을 만드시고, 그 돌판 위에다 십계명을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율법을 주셨습니까?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며 살라.‘고 주신 법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은 죄인 된 인간들이 지켜 행하며 살라고 주신 법이 아니고, 그 율법을 통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거울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율법을 지켜 행하며 살지 않아도 됩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의 법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임을 알려 주시고, 또 다른 율법인 제사법의 인도를 받아, 죄에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해 주는 몽학 선생의 기능을 하도록 주신 것이 바로 율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손가락은 어떤 손가락입니까?
넷째,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손가락‘이 되십니다.
우리가 그 예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다니엘서를 5장에 보면 바벨론 왕 벨사살이 메데 바사와 전쟁 중이면서도 전국에 있는 귀인 천명을 왕궁으로 불러서 술 파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파티에서 사용한 기명들은 느브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온 것으로,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썼던 금 그릇과 은그릇이었습니다. 벨사살 왕은 이 그릇으로 술을 마시면서 자기의 영광을 칭송하고, 바벨론의 신 마르둑의 영광을 칭송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더니 왕궁 벽에 히브리어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자를 썼습니다. 벨사살 왕은 히브리어를 몰랐기 때문에 그 뜻은 몰랐지만, 이 기이한 일로 인해 놀라고, 얼굴빛이 창백해졌으며, 다리의 힘이 빠지고 후들후들 떨려서, 두 무릎이 소리를 내며 심하게 부딪쳤었다고 합니다.
왕은 갈대아 술객들과 점쟁이들을 불러서 그 글자를 읽고 해석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읽고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왕비가 ’거룩한 신들의 영에 감동되어 있는 다니엘을 불러서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려 나온 다니엘이 이렇게 해석해 줍니다. ‘왕과 왕의 나라는 오늘부로 망할 것이고, 왕의 나라는 메데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5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권위를 짓밟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심판의 손가락이 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할 때에, 바보 섬에서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엘루마라고 하는 남자 무당이 총독이 복음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자꾸 옆에서 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리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행 13:11)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박수 엘루마는 소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손가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손가락은 어떤 손가락입니까?
다섯째, 자기 죄를 회개하고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용서의 손가락’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 행하며 살려고 합니다. 율법을 지켜 행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할 수 없다는 것과 또 하나님의 율법이 거울의 기능을 하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거울을 통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것이 바로 제사 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또 동일한 말씀이 전해 주고 있는 제사 제도를 통해 그 죄를 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자기가 지으며 살아온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은 제사 제도를 통해 유지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도 우리가 충성과, 희생과, 헌신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님의 속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율법에는 간음한 여인은 돌로 치라고 했는데, 당신은 사랑을 강조하시는 분이시니, 우리가 이 여인을 율법에 따라 돌로 쳐야 합니까? 아니면 사랑으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무엇을 쓰셨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십계명을 썼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정죄하는 사람들의 죄를 썼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없다고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는지 모릅니다.
저는 아마 산상수훈의 말씀인 마태복음 5:27-26절 말씀을 쓰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옛사람에게 말한바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하다가 현장에 끌려온 여인과 이 여인을 정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여인에게 주신 말씀은 ‘옛사람에게 말한바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말씀을 듣고서도 너는 간음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을 정죄하던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면서, 그 마음속으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이 저질렀던 은밀한 성행위를 상상하면서, 음란한 마음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그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기 전에 이미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때 저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법은 사람들이 행동으로 실행한 범죄를 죄라고 다룹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도 사람들은,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혀 온 그 여인의 드러난 죄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속으로 어떤 악한 생각을 하고 있어도 그것이 행위로 드러나지 않으면 세상은 죄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산상수훈에서는 외형적으로 드러난 죄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근본적인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처음 읽었을 때 그날 하루 동안 제 마음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들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부드러운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마음속에는 위선자와 같이 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깨달았을 때에는 아직 교회에 나가기 전입니다.
그때 저는 산상수훈에 기록된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계신다면, 나는 그 예수님에게 ‘내 자신을 맡기고, 내 인생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저의 신앙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으실 때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저와 같이 어쩔 수 없는 죄인인 자신의 누추한 모습을 보셨습니까? 저와 같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의도 행할 수 없는 절망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셨습니까?
저는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저와 같았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행동으로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의 말씀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마음속에 음란한 생각을 품고 있고 음란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런 너희도 역시 이 여인과 동일하게 간음한 자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마태복음 5:27-28절의 말씀을 쓰신 후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쓰신 그 말씀을 읽고 마음속에 숨어 있던 은밀한 죄가 드러나서 당황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그 누구도 돌을 들어 이 여인을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두 번째 글을 쓰셨습니다.
요한복음 8:8절입니다.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러면 두 번째 쓰신 글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저는 이것도 산상수훈의 말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5:21-22절입니다.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이 두 번째 쓰신 이 말씀을 읽고 유대인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그것은 자기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살인의 죄가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노하거나, 욕하거나, 미련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지옥 형벌을 받게 될 살인죄라는 땅에 쓰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쓰신 말씀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이 여인은 비록 간음죄를 짓다가 현장에서 잡혀 와서 자신들에게 정죄를 받고 있지만, 그래도 이 여인은 살인죄는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사람의 마음과 중심을 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이 여인과 동일하게 간음죄를 범한 자들이면서, 또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려고 하는 살인죄까지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되자 더 이상 그 여인을 정죄하지 못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 돌아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한 가지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왔던 이 여인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무엇을 경험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처음에 경험한 것은 죄의 수치와 부끄러움, 죄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이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죄의 수치와 부끄러움, 그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이 여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여인은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외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저는 이 여인도 고개를 숙인 채 예수님이 땅에 쓰신 말씀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여인도 그 말씀들을 보면서 자기의 죄의 실체와 자기 죄의 근원을 보지 않았겠습니까? 성경에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저는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쓰신 그 말씀들을 보고 자기 죄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 성을 깨닫고 절망감에 빠져 있었던 이 여인이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용서의 말씀이셨습니다. 이 여인에게 죄의 용서와 죄에서의 해방은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이고 기독교의 비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구원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의 심각성만 깨닫게 하시고 그냥 놓아두신다면, 우리는 죄와 죄가 가져다준 정죄의 두려움 때문에 단 하루도 편안하게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죄가 짓눌러오는 영혼의 고통과 억압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 또한 넘쳐 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심각성과 죄의 절망감을 깨닫고 느끼는 만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또한 더 크신 임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 의해 성자라고 불렸던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살펴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모두 다 다른 사람들보다 죄에 대해 더 깊은 깨달음을 가졌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깊이 깨달으면 깨닫는 만큼, 우리는 그만큼 더 거룩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의사들은 자신이 수술하는 사람의 건강을 확실히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의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실 때에는, 그 드러내신 죄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까지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손가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과 말씀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손가락이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죄를 사해 주시는 용서의 손가락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에스라서 8:2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그렇다면 이후 이 여인의 삶은 어떠했겠습니까?
계속 범죄 하며 살았겠습니까? 아니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겠습니까? 저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믿음은 반드시 그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고, 그 존재의 변화는 반드시 그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손가락은 어떤 손가락입니까?
여섯째, 하나님의 손은 구별하시는 손가락입니다.
애굽 요술사들의 속임수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구별된 것은 이 세 번째 재앙부터입니다. 첫 번째 재앙과 두 번째 재앙에서는 이 구별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재앙부터는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구별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후 네 번째 재앙부터는 아예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 백성들 사이를 구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8:23절에서는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하신 대로 이후의 재앙에서는 애굽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어디서 사람들을 구별하십니까?
하나님은 구원에서 사람들을 구별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와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구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율법을 거역하는 자와 율법을 순종하는 자를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자와 기도하지 않는 자를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은 자가 약 5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0일 후인 오순절 날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은 120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한 성도들은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여러 다른 이유로 기도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에서도 구별하십니다.
그때에는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산 성도들에게는 창세로부터 약속하셨던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아 누리며 살게 하고,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지 않아서 불순종하는 삶을 산 성도들에게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 속에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게 구별하실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구별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삶 속에 하나님의 손가락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가락의 진노와 징계하심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런 구별은 우리 하나님께서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의 자리로, 축복의 자리로, 영생의 자리로, 특별히 구별해 주시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손가락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손가락은 어떤 손가락이었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손가락은 창조주의 능력을 소유한 손가락이시며, 이 능력의 손가락으로 우리를 죄에서의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를 주시는 손가락이시며, 또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인 율법과 말씀을 주시고, 불신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특별히 구별해 주신 손가락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게 어떤 하나님은 손가락이 임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 내게 하나님의 진노의 손가락이 임하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와 복을 주시는 용서의 손가락이 임하면, 우리는 은혜와 복을 주신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손가락은 선악 간을 구별하시는 손가락이십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선악 간을 구별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서, 하나님이 다시 우리에게 주신 이 한 주간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고, 승리하며 살아가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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