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맺은 언약
출애굽기 24:1-11
출애굽기 24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 맺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 길을 걸어서 이제 시내 산에 도착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도착한 이 시내 산을 이제까지는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에 있는 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미디안 광야에 있는 산으로 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정황 증거로 따져보면 미디안 광야 설이 더 정확해 보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이 미디안 광야에 서울 면적의 44배에 달하는 미래 신도시 네옴시티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게 됩니다.
24:1-2절입니다.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명과 함께 여호와께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들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이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장소에 모아 놓고 맺은 것이 아닙니다.
모세와 장로들과 백성들을 서로 다른 장소에 세워두시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모세에게는 산 정상까지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장로 70명은 산 중턱까지 올라와서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산 아래에 있는 그들의 친 영 앞에 나와서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각각 다른 장소에 세워 놓으시고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이 언약 체결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첫째, 사람마다 하나님을 섬기는 위치가 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언약 맺을 때뿐 아니라,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도 같았습니다.
성막의 중심인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전 안마당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전 바깥마당에는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도 나아갈 수 있는 자리를 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로 섬기고, 어떤 사람은 집사로 섬기고, 어떤 사람은 성도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공평하신 분이신 줄 알았는데, 모세와 장로들과 일반 백성들을 구분하시는 것을 보니, 교회에서도 직분으로 성도들을 구분하시는 것을 보니, ‘하나님도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시냐? 고 묻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도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으로 보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모세와 장로들과 백성들로 나누신 것은 차별하신 것이 아니라 구분하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입장과 처지와 형편에 맞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 자리를 정해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정해주신 그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고, 또 하나님이 맡겨주신 책임을 다하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장로들과 백성들을 나누신 것은 오히려 배려해 주심이었습니다.
사람마다 믿음이 다르고, 자질이 다르고, 그 준비된 정도가 다른데, 만약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설교자의 직분을 맡기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반하는 설교,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설교를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설교자의 직분 받음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저주를 받고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레위기 10장을 보면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아직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준비도 안 된 상태로 제사장 직분을 행하다가, 율법의 규정에도 없는 다른 불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분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었고,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를 구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모세와 장로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있을 자리를 구분해 주신 것은 일종의 안전장치, 보호 장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면 되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 정상까지 올라가서 하나님을 섬긴 것은, 모세가 아론이나 백성들보다 더 잘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나 아론이나 백성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습니다. 죄인이 죄를 심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와서 백성들에게 전해 주어야 했습니다. 이 힘들고 위험한 일을 맡아서 했던 사람이 바로 모세였다는 것입니다.
이후 성막이 세워진 후에는 대제사장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7월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해서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대제사장도 죄인이기 때문에 속죄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속죄의 피가 없이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늘 죄인의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마음에 조그마한 거리낌만 있어도 대제사장은 자기 대신 다른 제사장을 지성소에 들여보냈습니다. 죄를 짓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정말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금으로 만든 방울을 옷에 달고 갔습니다.
그리고 허리에는 끈을 묶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방울 소리가 들려오면 아직 대제사장이 살아 있다는 표시였습니다.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치심으로 대제사장이 죽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지성소 안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허리에 묶고 들어갔던 그 끈, 일부 성소에 남아 있는 그 끈을 잡아당겨서, 죽은 대제사장의 시체를 끌어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은 불평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더 안전했습니다. 백성들은 이 안전한 곳에서 위험성이 별로 없는 일을 하며 살면서도, 똑같이 그 믿음을 인정받고, 똑같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은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멀리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그 자리를 정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가 제가 새벽마다 교회 나오듯이 그렇게 열심히 교회에 나오며, 마치 자신이 교회 지도자나 목회자라도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섬긴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성도를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이런 성도를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런 성도에게는 큰 은혜와 은사를 내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으며 사는 길이 명확하게 보입니다.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성도들은 어느 교회에서 신년 부흥사경회가 있다고 하면, 50리 6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그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1-2주 동안 계속되는 사경회 동안 그곳에서 직접 밥을 해 먹으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모든 집회에 참석하면서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사모했던 그 믿음이 한국교회 부흥의 기본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당시 성도들에게는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전서 5:5-6절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야고보서 4:6절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하라.’고 합니다. 10절입니다. ‘주 앞에서 (너희 자신을)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높이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은 흔히 보여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며 겸손한 성도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 겸손한 성도들의 모습은 제 3세계 교회들에게서, 혹은 중국교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중국교회에는 변변한 신학교도 없고, 목회자 양성도 원활하지 않습니다.
이런 중국교회에 우리나라 목사님들이 들어가서, 1주일 정도 함께 지내면서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옵니다. 이때 단기선교를 나간 우리나라 목사님들과 중국 조선족 교회 지도자들은 한 곳에서 먹고 마시면서 오직 은혜받는 일에만 몰두한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겸손하게 배우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크다고 합니다. 이렇게 겸손히 은혜를 사모하는 중국교회에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역사가 지금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으려면 먼저 은혜 받을 믿음과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할 것 같습니까?
목회자입니까? 안수 집사나 장로입니까? 사실 목사와 장로의 자리는 힘도 들지만 아주 위험한 자리입니다. 성도들의 자리보다 더 큰 책임이 요구되는 자리입니다. 목사와 장로라는 직분을 맡아 놓고 그 직분에 상응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자신의 신앙도 무너지고, 그 섬기는 교회도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직분을 보고 인정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목회자라고, 장로라고 해서 인정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을 얼마나 겸손히 성실하게 감당했느냐? 하는 것을 보고 인정해 주십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는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어떤 직분을 맡았든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게 얼마나 겸손한 마음으로 성실했느냐? 충성을 다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회자는 목회자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직분이 적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큰 직분을 받고 그 직분을 감당하지 못해서 책망을 받는 것보다, 작은 직분을 받았더라도 그 직분에 충성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직분이 작다는 것은 나의 작은 섬김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표시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내게 작은 직분이 주어진 것이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자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나는 얼마나 충성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이 언약 체결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둘째,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로 맺은 언약을 체결하는 모습입니다.
언약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순데케’ 인데 이것은 나와 상대방이 1:1로 맺게 되는 언약 즉 쌍방 계약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디아데케’ 인데 이것은 쌍방 계약이 아니라 일방적인 계약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맺는 내용들이 출애굽기 19장에도 나옵니다.
5-6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세계가 다 내게 속하여 있는데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라고 하시면서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고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이 말씀을 전해 주자, 백성들은 일제히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19:8절입니다.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24:3, 7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들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화답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시 시내 산으로 올라가서 백성들의 말을 여호와 하나님께 전해 드렸습니다.
이렇게 쌍방의 합의로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고 언약 백성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언약 백성이 지키며 살아야 할 10계명과 또 10계명을 그 삶에 적용하며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율례를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율법과 율례를 준수하며 살아갈 것을 요구하셨습니까? 이렇게 볼 때 이때 체결된 언약은 어떤 언약 같아 보입니까? 쌍방의 합의로 체결된 ‘순데케 언약’ 같아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이른 아침 일찍이 일어나 산 아래에 단을 쌓고, 이스라엘 지파의 수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소를 잡아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5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이 제사는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살겠습니다.’ 라는 의지와 결단을 담고 드린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6절 말씀을 보면 그 분위기가 급하게 반전되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 잡은 소의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8절 말씀을 보면 여러 양푼에 담아 둔 그 피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뿌리면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너희와 세운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언약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순데케’ 인데 이것은 나와 상대방이 1:1로 맺게 되는 쌍방 계약을 말하며, 또 하나는 ‘디아데케’ 인데 이것은 일방적인 계약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1:1로 언약을 맺고 그 맺은 순데케 언약에 성실할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1:1로 맺은 쌍방계약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약속하고 있는 일방적인 계약 즉 디아데케 언약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이 쌍방의 계약이 되려고 하면 서로 대등해야 합니다.
대등하게 서로 약속하고 그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은 대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쌍방 계약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평하고 평등한 계약은 맺어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쌍방 계약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야 하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해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실 수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쌍방계약이 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우리 구원을 예로 들어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면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대로 놓아두시면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생명을 예로 들어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면 우리는 살고,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시면 우리는 곧 죽게 됩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이 구원이고 또 생명입니다.
이것은 언약에서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너희는 지금 내가 요구하고 있는 대로 율법과 규례를 다 지켜 행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지만, 나는 너희가 내 요구대로 다 행하지 못한 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내 요구대로 살지 못하여도, 너희의 죄를 사해 주고, 너희를 내 백성 삼아주고, 너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일방적인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증표로 사람들에게 뿌린 것이 바로 언약의 피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 잡은 소의 피를 받아서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지금 내게 약속하고 있는 그대로 살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너희에게 뿌린 이 대속의 피를 통해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고, 너희를 구원해 주고, 너희를 내 백성 삼아줄 것이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구원의 약속은 이미 창세기 3:15절에서부터 계속해 오신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너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너희 행위 때문이 아니고, 메시야가 흘려주실 대속의 피 때문이라고 약속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이 쌍방 계약이라면, 하나님도 도장을 찍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장을 찍으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언약의 피.’에 대한 약속을 해주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21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맺은 언약을 폐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우리가 언약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대신 피를 흘려주신 언약의 피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다르게 정리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님의 보혈의 피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멘.
사실 구약성경의 모든 피는 예수님이 흘려주실 보혈의 피를 상징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나, 각종 제사 때 흘린 짐승의 피는 모두 다 그렇게 피를 흘려주실 분이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너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너희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흘려주실 언약의 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믿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오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길 이외 구원을 받게 되는 다른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일관성 있는 증거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보내주실 이 구원자가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원자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예수님이 구원의 완성자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은 이 언약의 피를 흘려주실 예수님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39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아멘.
사람들은 아무리 결심해도 그 결심한 대로 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결코 선은 행하며 살지 못하며, 오히려 죄가 누적되어 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더 많은 죄를 짓게 됩니다. 예수님이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 앞에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이 여인을 치라.’라고 하실 때, 나이 많은 사람부터 손에서 돌을 내려놓고 돌아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나이만큼 더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다 베드로같이 장담합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에는 대단한 믿음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곧 넘어지고 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렇게 장담했습니다. 출애굽기 24:3절에서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하였고, 또 7절에서도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화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장담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후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언약을 준수하며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이들을 곧바로 망하고 끝이 났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후 역사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패한 존재이고, 우리가 얼마나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죄를 지으며 살아온 지난날의 삶을 되돌아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지으며 살아온 죄가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하시고 계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장담은 잘하고 있으나, 나는 너희의 행위를 보고 언약에 성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차 너희를 위해 대속의 피를 흘려 줄 내 아들 예수의 피를 보고 너희와 맺은 이 언약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언약의 피를 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언약의 피를 뿌려 주실 예수님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제도나, 모든 절기나, 모든 예언들은 모두 다 이 예수님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을 통해, 아담과 하와의 죄의 수치를 가려 주시기 위해 입혀 주신 가죽옷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유월절 피를 흘리며 죽었던 어린 양을 통해서,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통해서, 만나를 통해서, 각종 제사 때마다 죽어갔던 제물들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민수기에서는 장대 위에 높이 세워 두었던 놋 뱀을 통해 오실 인류의 구세주를 보여 주셨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 기생 라합의 집에 달아 내렸던 붉은 줄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여리고 성의 심판에서 라합을 구원해 주신 것과 같은 메시야가 장차 오실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생 라합의 집은 사실 멸망당할 세상 가운데 세워져 있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를 통해 교회가 어떻게 종말의 심판을 이기게 될 것인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신성을 부인하고 사람으로 오시는 성육신을 통해, 또 고난당하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음을 죽어주시는 그 사건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11-1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실을 믿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이 아무리 많아도 내가 마시지 않으면 나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약속해 오신 이 예수를 믿어야 하고, 내가 이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먹어야 하고, 생명의 음료로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셔서 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나의 귀를 열어 듣게 하셔서, 이 모든 약속들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임을 믿게 할 때, 우리는 믿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약속들이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약속이며 일이라고 믿는 것에 우리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이 언약의 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이 언약 체결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셋째, 모세와 장로들은 이 언약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9-10절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다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는 사람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위엄과 영광이 있으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 산에서 경험한 그 놀라운 경험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7:1-2절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죄인인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되면 오직 멸망뿐입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하게 뽑힌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이런 사람들은 더 거룩해 보이고 더 경건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때에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더 나은 사람이 있고 더 못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 서면 멸망이요 파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들은 죄인으로 정죄를 받아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자비하심으로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뵙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대우하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신약 시대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즉 아빠라고 부르면서, 마치 한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서 식사하듯이 그렇게 교제하게 될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이 말씀은 천국에서 성도들이 하나님과 영원히 동거동락하면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누리며 살게 되는 이런 은혜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것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흘려주신 언약의 피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주신 은혜가 바로 죄를 사해 주시는 은혜이며, 죄인들에게 손을 대지 않고 용납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님이 흘려주신 보혈의 피, 언약의 피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난 후 모세는 그 피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뿌렸는데, 이 피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 흘려주실 언약의 피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흘려주신 언약의 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착한 일 많이 하면, 그 공로로 상급도 받고, 천국에도 가게 된다.’ 라고 합니다. 이런 말들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아주 잘못된 주장입니다.
전에 로마 카톡릭 교회가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 교회를 향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을 폭로한 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우리는 이 종교개혁자들의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구원파의 주장과 같이 구원받은 이후에는 아무렇게나 막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빌립보서 2:12절 말씀에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보혈의 피를 흘려주신 것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이전처럼 아무 생각도 없이 죄를 지으며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은혜로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확신하면서, 예수님을 통해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겸손히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성도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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