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며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4. 11. 17. 13:29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며

하박국 3:17-18

 

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추수 감사 주일은 성경에 나오는 절기가 아닙니다. 미국에서 처음 지켰던 절기입니다.

 

그러면 미국교회는 왜 추수 감사 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까?

미국은 영국에서 신앙의 박해를 받으며 살았던 청교도들이 이주해 가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1620916102명의 청교도 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가게 됩니다. 이들은 66일이라는 긴 항해 끝에 44명의 희생자를 내고 58명만이 그해 1120일에 신대륙에 도착하게 됩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그곳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그 겨울을 나고, 다음 해 파종하고 수확한 것을 가지고 축제를 열게 되는데, 이 축제가 나중에는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가 된 것입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해도, 우리나라는 왜 미국교회가 지키고 있었던 추수 감사 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까?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온 초기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미국교회가 파송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선교사님들의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미국교회가 지키고 있었던 추수 감사 주일을 함께 지키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청교도들은 무엇에 근거하여 이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까?

청교도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초막절에 그 기원을 두고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유대인의 초막절은 일명 수장절(23:16)이라고도 하기도 합니다.

초막절은 한 해 동안 수고하여 농사지은 곡식을 추수하여 창고에 저장하는 절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초막절을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나님이 먹여주시고 입혀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또 한편으로는 이제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서 풍성한 추수를 할 수 있게 은혜 주신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초막절은 단순히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어서 수확한 것을 감사하는 절기만은 아니었습니다. 초막절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 은혜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포함하고 있는 절기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초막절이 되면 그 조상들의 광야 생활을 자신들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지금도 집에 초막을 지어놓고 칠일 동안 그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풍성한 수확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이 절기를 지키면서, 혼자만 즐거워하고 혼자만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추수의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절기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사는 그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절기로 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이 유대인들의 이웃 사랑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이 추수감사절에는 이웃에 살고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사랑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날로 삼아오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매년 1월 첫 주일에 모든 성도들에게 사랑의 저금통을 나누어 주면서, 삶 속에 감사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이 되면 그 저금통을 교회로 가지고 오도록 해서, 그것들을 모아 교회 인근에 있는 불우한 이웃이나, 어려움 속에 있는 목회자들을 돕는다고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이 되면, 낮선 한국 땅으로 시집을 온 외국인들, 아직 우리나라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다문화가정들을 위하여, 김치를 담아 나눠주기도 하고, 김치 담구는 법도 가르쳐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이 되면 사랑의 쌀 나누기 행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 해 농사지어 수확한 햅쌀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일을 통해, 자신들이 받은 하나님 사랑을 그 이웃에게도 전달해 주려고 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추수 감사 주일을 매년 11월 넷째 주에 지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추수의 계절이 빨라서, 초기 선교사들이 한 주간을 앞당겨서 11월 셋째 주일에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11월 셋째 주가 추수 감사 주일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우리나라 실정에 맞추어서 우리의 전통 명절인 추석날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교회들도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켰던 감사절인 초막절은 어떤 절기였습니까?

첫째는, 광야 40년 동안 먹여주시고 입혀주시며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둘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는 풍성한 수확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감사를 이웃 사랑을 통해 표현하였습니다. 이 이웃 사랑을 한국교회도 이어받아 추수감사절을 사랑을 실천하는 날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내용입니다.

이 초막절에는 미래적인 의미, 예언적인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초막절에 담겨 있는 미래적인 의미 예언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셋째는, 초막절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미래에 누리며 살게 될 천국 생활을 예표 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절기였습니다.

 

성도들이 천국에 가게 되면 어떤 생활을 하게 될 것 같습니까?

성도들은 천국에서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은혜를 인하여,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천국 생활을 미리 예표 적으로 보여주는 절기가 바로 초막절이었습니다.

 

천국에는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을 곳은 없습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 함만 있는 곳입니다. 천국에는 감사만 있다는 이 말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늘 감사하며 사는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삶을 살지 않고 늘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사람들이 다 하며 삽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감사와 세상 사람들의 감사는 다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좋은 일, 감사하는 일이 있을 때 감사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감사는 이 세상의 형편과 조건과 처지에 영향을 받지 않는 감사, 이 세상의 형편과 조건과 처지를 넘어서는 감사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가 그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어떻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하박국서 3:17-18절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였던 감사는 세상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는 감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인정해 주셨던 이 보여주고 있는 것도 이런 감사입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10명의 자녀를 동시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와중에 건강까지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었던 욥을 그 아내도 싫어하여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비참한 당신 모습을 더 보고 싶지 않다.’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욥은 무엇이라고 신앙 고백을 합니까?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하며 그 극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 아들이삭이 보여주고 있는 것도 이것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실 때, 한 마디 원망도 불평불만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22:11-12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을 이 일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사랑과 순종과 헌신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삭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오자 우물을 파서 기근의 때를 견뎌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우물을 파서 물이 나왔는데 그랄 사람들이 와서 이곳은 우리 땅이라고 하면서 그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또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파면 다시 와서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랄에서 아주 먼 곳에 있는 브엘세바로 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그랬더니 그랄 사람들이 빼앗으려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우리의 땅을 넓게 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삭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삭이 그 판 우물을 빼앗기고 또 빼앗기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이동하여서 한 고백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자신에게 더 넓은 땅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삭은 불평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넓은 땅을 주신 감사하며 살았더니, 하나님께서는 이삭으로 하여금 그 극심한 가뭄 중에서도 농사를 지어서 100배의 수확을 거두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삭은 이 곡식을 비싼 가격에 팔아서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삭의 삶을 보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전깃불을 주시고, 전깃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의 삶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하며 사는 삶이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삶입니다.

이 감사하는 삶에 대해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18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상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는 본래 감사의 종교입니다.

범사를 감사하며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범사는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범사에는 히브리어 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헬라어 파스는 어떤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까? 헬라어 파스는 영어의 ‘all’이라는 단어와 같이 모든’ ‘전체’ ‘어떤 것이든지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 사용되고 있는 범사는 좋은 일은 물론이거니와 좋지 않은 일까지 그 모든 일과 그 모든 사건들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담아서 데살로니가 전서 5:18절의 말씀을 다시 의역해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이 말씀은 좋은 일이든지 좋지 않은 일이든지 관계없이 우리 삶에 다가오는 그 모든 일들 가운데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하며 사는 삶이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요구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의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일이 일어나면 감사하지만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을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다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삶에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감사한 일이 있을 때도 감사하지만, 감사할 일은 고사하고 어려움과 고통이 가중되어 올 때도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삶의 악조건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처한 환경과 삶의 조건들은 전혀 감사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도록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셔서, 우리가 낙심하고 좌절 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모든 일들은 우리 신앙과 삶에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도록 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도록 주신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며 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하며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이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범사를 감사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이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우연히 이루어진 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우연의 산물로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좋은 일을 만나게 되면 우연히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그 삶에 임하여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삶에 나쁜 일,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재수가 없어서 운이 나빠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다 내가 그때 그 자리에 있어서 봉변을 당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을 다 주관하시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을 때나, 믿음이 어린 신자로 있을 때, 하나님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친히 주관하고 계시는 것을 점점 더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역사하심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이 세상에 단 한 가지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바로 믿음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 장성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가정생활 속에서, 교회 생활 속에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이제 미국의 대통령이 바이든에서 트럼프로 바뀌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슨 의도로 트럼프를 미국 대통령이 되게 하셨는지를 생각하고 알려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역사하심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지게 될 때, 우리는 그 이루어지고 있는 범사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왜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까?

둘째, 내가 중심이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될 때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범사를 감사하며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해서 큰돈을 벌게 되었을 때 그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범사를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까?

나를 내 인생의 중심에 두지 않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중심에 두는 사람들이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성공하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내가 내 지혜로 내 능력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실패하게 되면 어떤 생각 할까요? 내 능력이 부족하고, 내 지혜가 부족해서 실패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자신의 삶이 하나님과는 무관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공했을 때 내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나에게 좋은 가정을 주시고, 또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시고, 장사를 하고, 사업을 하고, 기업체를 운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성공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나를 그 삶의 중심에 두지 말고,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 세상 역사의 중심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 속에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깨닫게 되어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에 두고 사는 사람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하심을 인정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 삶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들만 가지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 삶에 고통과 아픔이 찾아오더라도, 그 고통과 아픔까지도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유익을 주시고자 주신 고통이요 아픔으로 생각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왜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까?

셋째,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살게 될 때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적인 위치에 있든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다른 사람을 비교한다는 것은 나의 관점이 이 세상 조건에 매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 조건을 기준으로 삼고 보게 되면 그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보다 못한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자라고 불평불만이 없겠습니까?

이 세상 권력을 가졌다고 불평불만이 없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도 부족한 점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은 가졌지만 그 가족들과 마음이 맞지 않을 수도 있고, 권력은 가졌지만 다른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전에 권력과 부를 다 가졌던 중국의 진 시 황제의 고민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이 힘들게 얻은 권력과 부를 얼마 누리며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하들을 세계 곳곳으로 보내어서, 불로장생할 수 있는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이루어낸 성공과 부와 권력도 죽음 앞에 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제일 부자는 삼성전자의 이재용 회장이라고 합니다.

이재용 회장은 경제적으로 보면 누구도 부럽지 않은 사람, 아니 다른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할 그런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재용 회장이지만 그 삶을 들여다보면 해결할 수 없는 아픔, 남모르는 아픔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재용 회장은 지금 몇 년째 재판을 받고 있습니까?

재판받으러 가는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의 제일 부자라는 그런 위세는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몇 년씩 감옥살이를 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재용 회장에게 가장 부러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무런 법적인 문제도 없이 일하고, 가족과 함께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살게 되면 그 누구도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필요한 것

 

사람들은 늘 부족하고, 만족이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예수 믿고 구원받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범사를 감사하며 사는 삶은 오직 믿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믿음으로 세상만사를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범사를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만나게 되는 하박국 선지자는, 범죄하며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그 백성들의 죄악을 징벌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갈대아 사람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징벌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반문합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으며 살고 있지만, 갈대아 사람들보다는 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더 악한 갈대아 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심판할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그 나라도 죄를 범하면 내가 심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박국서 2:4절입니다. 그 심판하시는 와중에서도 의인들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을 믿고,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박국서 3:17-18절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당시 하박국이 하나님께 드렸던 감사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감사였으며, 그 처한 현실이나 삶의 조건을 넘어서는 감사였습니다.

 

이런 감사는 오직 성도들만이 할 수 있는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감사입니다. 여러분이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은혜를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경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나 자신이나,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은 그대로인데, 그런 나를, 그런 나의 삶을 보는 나의 관점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전에는 새를 보면서 새가 슬피 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이후에는 그 새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전혀 새롭게 보이지 않았습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면서도 그 나무의 가지가 손을 흔들며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 않았습니까?

 

구원의 은혜가 사물을 보는 우리의 관점을 바꾼 것입니다.

전에는 창세기 1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평가하셨지만, 우리 눈에는 이 세상이 그렇게 좋은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혹독한 추위더위가 있습니까?

지진은 왜 그렇게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매년 반복되고 있는 태풍으로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말씀하셨어도, 우리 눈에는 세상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비가 많이 오면 비가 많이 온다고 하늘을 원망하고, 비가 적게 오면 비가 적게 온다고 하늘을 원망하고, 태풍이 불면 태풍 때문에 많은 피해를 봤다고 하면서 하늘을 원망하고, 태풍이 오지 않아 대지가 메마르게 되면 마실 물도 없다고 하늘을 원망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면 어떻게 됩니까?

천지 만물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배려가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의 유기적인 기능과 역할을 보면서 나를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제 날이 추워지면 물이 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불편한 점이 많이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물이 얼지 않으면 물속에 있는 고기들이 그 추운 겨울 동안 생존할 수 없게 됩니다. 추워서 물이 얼게 되면 그 얼음 밑에 사는 고기들이 혹독한 겨울 날씨를 견디고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물이 어는 현상을 보면서도 물고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정과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풍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바라봅니다.

비가 내림으로 삼라만상이 살아나는 것에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일들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좋지 않은 일들 속에서도 여전히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째,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하심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일들뿐 아니라 좋지 않은 일들을 보면서도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통치하심을 믿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하박국 선지자에게 해 주신 말씀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하박국서를 보면,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이고,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된 갈대아 나라의 범죄를 심판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심판의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의인들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지 않고 살게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통치하심은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 좋은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불치의 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로 제 아들을 살려주세요. 아들을 살려 주시기만 하면 저의 재산의 절반을 하나님께 감사헌금으로 드리겠습니다.’라고 서원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들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성도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그 집사님이 낙심하거나 좌절하여 혹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장래 식을 마치고 몇 주간이 지난 어느 주일날, 그 집사님은 상당히 큰 액수의 감사헌금을 가지고 와서 드렸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집사님을 따로 불러서 감사 헌금하신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께 제 아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은 죽었습니다. 제 아들이 죽었을 때 잠시 실망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들을 하나님께로 보내고 몇 주일을 지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들이 불치의 병으로 고통하면서 더 사는 것보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에 빨리 가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의 은혜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제 아들에게는 더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보다 더 좋은 하늘나라로 제 아들을 데려가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아들을 살려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한 제 재산의 절반을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드린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집사님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이 세상만 바라보며 사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삶을 넘어서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실 뿐 아니라, 이 세상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관계없이,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관계없이, 범사를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범사를 감사하며 사는 것이 장성한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섭리하심을 믿고 범사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셋째,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우리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런 믿음이 없으면, 이런 신뢰가 없으면,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교육할 때, 자녀가 잘하고 있는 것,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은 칭찬하지만, 때로는 자녀가 잘못한 일을 꾸중하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녀는 칭찬도 해 주지만, 때로는 엄하게 꾸중도 하는 부모를 어떻게 신뢰하게 됩니까? 그것은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을 때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믿는 자녀는 부모의 칭찬뿐 아니라, 부모의 꾸지람도 매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우리 부모는 나쁜 부모, 믿지 못할 부모라고 생각하는 자녀가 있다면, 이런 자녀는 부모가 아무리 칭찬을 하고, 격려를 해 주어도, 그 부모를 믿지 않습니다. 그 부모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녀에게는 모든 교육이 백해무익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교육하기에 앞서서 먼저 그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먼저 부모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가 하는 교육이 먹혀들어 가는 것입니다.

 

부모의 훈계를 받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자녀는, 바로 우리 부모가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믿고 있는 자녀들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노력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녀들입니다. 부모를 보는 자녀의 인식에 자녀 교육의 성패가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정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가정을 보면 자녀와 어머니와의 관계는 거의 가다 원만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가정의 자녀에게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통계에 의하면 자녀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우리 아버지는 참 좋으신 분이라고 믿고 있는 자녀들이 잘못될 확률은 거의 제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출을 하고, 문제 청소년이 된 아이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이 아이들은 거의 다 그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어진 아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어머니들은 될 수 있으면 그 자녀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게 될 수 있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노력합니다. 이 관계가 그 자녀의 장래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요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긍휼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성도들은, 비록 그 삶에 어려움이 오고, 고통이 오고, 고난이 와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께 범사를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욥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욥의 아내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욥의 아내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으로 보는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삶에 어려움이 오자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난 가운데 있는 그 남편 욥에게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삭을 보십시오.

이삭이 청년일 때 그 아버지 아브라함은 자신을 짐승처럼 각을 떠서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힘으로 하면 늙은 아브라함이 청년인 이삭을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이삭이 아버지 뜻에 반항하였더라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묶어서 제단 위에 눕혀 놓을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이삭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따라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삭은 어떻게 자신을 번제로 드리려고 하는 아버지의 손에 자신을 맡겼겠습니까?

이삭은 그 아버지 아브라함이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좋은 부모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지금 자기를 죽이고 각을 떠서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이삭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나의 아버지가 전 생애를 다 바쳐서, 목숨을 걸고 섬기며 살아온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로 바치라는 요구를 하지 않으셨으면 아버지는 지금과 같이 자기를 번제로 드리려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에게 자신을 번제로 드리라고 요구하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실 수가 없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부인할 수가 없어서, 사랑하는 아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고 자신을 번제로 드리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자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그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더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 반항하지도 않고 스스로 자원하여 제물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모리아 산 제사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믿음의 경험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향한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그 아픈 마음을 경험하면서, 성부 하나님께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성자 예수님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내어 주셔야 했던 성부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어떻습니까?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를 번제 단의 제물로 내어 주었던 그 순종하는 삶을 통해,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이 약속해 오신 복음의 약속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아버지의 뜻대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 순종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그 아버지 아브라함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버지 아브라함이 얼마나 자신에게 좋으신 아버지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까지도 순종하는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다가오는 고난과 아픔들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좋으신 분이시고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믿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에게 저주는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저주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믿어지지 않는 불신앙이며, 성경을 읽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을 만나도 감사하지 못하는 메마른 심령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추수 감사 주일에 우리 모두는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며, 그 어떤 일을 만나게 되든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 모두 범사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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