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누가복음 2:8-14
창세기 3장을 보면 ‘인류의 가장 슬픈 날’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을 존귀한 존재로 창조해 주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미혹하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범하게 되는 일입니다.
이 범죄는 아담과 하와 자신들은 물론, 그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게 했습니다. 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과 같이 죽음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존재가 되게 했습니다. 이 일이 인류의 모든 불행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절망에 빠진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사건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메시야가 사람들 대신 죽어주심으로, 사람들을 죄와 죄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최초의 복음 혹은 원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가장 복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선악과 금지 계명을 어기고, 죄인이 된 아담과 하와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 이보다 더 희망을 주는 소식이 있었겠습니까?
이후 인류는 이 약속을 믿고, 그 성취를 기다리면서 살아왔습니다.
아담은 그 자녀들에게 소식을 전해주었고, 그 자녀들은 또 자기 자녀들에게 이 복된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이 언제 성취되었습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성자 하나님이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해 예수라는 사람으로 태어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약 2000년 전에, 아니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약 2028년 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성탄절이라는 절기를 삼아 오늘 기념하며 지키고 있습니다.
이 성탄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살고 있었던 제사장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백성을 가르쳤던 율법학자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며 살았던 서기관들입니까? 아니면 경건한 삶을 살았던 에세네파 사람들입니다. 아니면 존귀한 신분을 가졌던 귀족 들입니까? 성경은 이 성탄의 기쁜 소식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먼저 전해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가축들을 돌보기 위하여 들판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었던 목자들에게 전해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주 이외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네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첫 번째 부류가 세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민족을 배반한 배반자라고 생각하며 유대인의 공동체에서 배척했으며 회당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두 번째 부류는 중병에 걸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병이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중병에 거린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이라고 하며 회당 예배에 참여할 수 없게 했습니다. 심지어 나병환자들은 길을 가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 소리치도록 했습니다.
그 세 번째 부류는 창기들이었습니다.
창기들도 그 부정한 삶 때문에 유대인들이 기피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당 예배에 참여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그 네 번째 부류는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밤낮으로 가축을 돌보아야 하는 직업입니다. 그 직업의 특성상 목자들은 안식일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목자들도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일지라도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이방인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유대인의 신앙공동체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예로 세리장 삭개오가 있지 않습니까?
유대인이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이 자신을 이방인과같이 배척했기 때문에 예수님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가에 있었던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한번 보려고 했던 것이지요.
사람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사람들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도 다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메시야의 오심을 누구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다고 보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는 사람들을 구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다고 제외해 놓았던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인류가 기다려 온 메시야가 탄생하셨다는 기쁜 소식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될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여주시려고 유대인들이 구원 밖에 있다고 생각했던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메시야의 탄생을 알려주시고 메시야를 볼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해 목자들에게 전해주신 소식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목자들은 하나님이 약속해 오신 인류의 구세주, 그 조상들이 믿고 기다려 왔던 메시야가, 그 약속하신 말씀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메시야는 왕궁이나 부잣집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셔서 짐승의 먹이통이었던 구유에 누워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아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표적’, 즉 ‘싸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홀연히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나타나서 이런 찬양을 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찬양은 메시야가 세상에 와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아주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려 온 메시야는 왕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신성을 부인하고 사람이 되어 오셨을 뿐 아니라, 가장 낮고 가장 천한 사람으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는 메시야로 오셨음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은 목자들은 “우리가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자”라고 하며, 들에서 지키고 있던 가축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서 구유에 누워 있는 아이가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천사들이 말한 대로 정말로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목자들은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자기들에게 해준 말을 다 전해주고, 자기들이 듣고 본 그 모든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일터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창세기에서부터 약속해 오셨던 인류의 구세주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이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기다려 온 가장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죄과 마귀의 지배 아래 살고 있던 인류에게 이보다 더 기쁘고 좋은 소식은 없었습니다. 이 기쁨을 찬송가 115장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 찬양하여라.
구세주 탄생했으니 다 찬양하여라.
이 세상의 만물들아 다 화답하여라. 다 화답하여라. 다 화답 화답하여라.
온 세상 죄를 사하려 주 예수 오셨네.
죄와 슬픔 몰아내고 다 구원하시네. 다 구원하시네. 다 구원 구원하시네.
은혜와 진리 되신 주 다 주관하시니.
만국 백성 구주 앞에 다 경배하여라. 다 경배하여라. 다 경배 경배하여라.
지금 여러분에게는 가장 기쁜 소식, 가장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도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로또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도 병치레를 많이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건강하게 되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하고 있는 사업이 성공하는 것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고, 혹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얻고, 권세를 얻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일 수 있습니다.
이런 소식들도 각각의 개인들에게는 기쁜 소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일시적인 기쁨이고, 그 개인에게 한정되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전해주었던 그 소식은, 일시적이고 대상이 한정되어 있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인류,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류,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될 모든 인류에게 미치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되는 기쁨의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글을 우리는 복음서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마태가 기록한 복되고 기쁜 소식, 마가가 기록한 복되고 기쁜 소식, 누가가 기록한 복되고 기쁜 소식, 요한이 기록한 복되고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왜 이 복음서를 귀하게 여기고 애독합니까?
우리는 왜 주일마다 이런 말씀을 설교하고 또 들으며 은혜를 받습니까?
이 성경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던 그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인들이 사랑의 고백을 담고 있는 연애편지를 읽고 또 읽듯이 그렇게 성경 말씀을 읽고 또 읽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성령이 영감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신 ’영이요 생명‘인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은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말씀이고, 생명이 역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고, 우리 영을 살려주는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우리 영이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에게 가장 최고의 기쁜 소식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서 죽어주시고, 3일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구주로 계시기에 우리에겐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기쁨들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성취가 가져다준 기쁨이고 일시적인 기쁨입니다. 예수님만 우리의 참 기쁨이 되시고, 영원한 기쁨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이전에는 진정한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 모두가 다 일시적인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우리는 참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기쁨, 영원한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찬송가 95장의 가사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요,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의 생명이 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성탄절을 기념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기다려 온 메시야가 되어주시기 위해 이 성탄절에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우리는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상황들이 악화되고 어려워질 때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은혜는 이 세상 모든 조건들을 넘어서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주는 기쁨은 하늘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성자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시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신성을 부인하시고 피조물로 살아가시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수치요,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이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이 미련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있다.‘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음식을 먹게 될 때는 그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먹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까지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할까요?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주신 구원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구원의 가치, 구원의 은혜, 구원의 영광을 알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십자가를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별 가치도 없는 이 세상의 영광들을 배설물같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된다고 찬양했겠습니까?
그것은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실 일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 은혜,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고 계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라.” 하나님의 목적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은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라고 한 하박국서 2:14절 말씀에서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보리라 그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X3)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민족이 다 구원을 얻을 때까지 절대로 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쉴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듯이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전쟁을 일으켜 수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히틀러입니까? 아니면 테러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빈 라덴입니까? 아니면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고 있는 푸틴입니까?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까지라도 예수 믿고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은 30에 자신을 유대인들에게 팔았던 가룟 유다까지도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사랑하며 기다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은혜를 입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거의 마치시면서 대 제사장적인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기도 중에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부께서 성자 예수님께 하라고 주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는 영혼들을 살려내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고 그 영이 살아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자신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고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날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습니까?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이 복된 소식을 세상에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전도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아멘.
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셋째,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이,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을 통해 어떻게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평화를 내려 주십니다.
사람들은 왜 무서워하고 왜 두려워합니까?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느낀 감정이 바로 죄인의 두려움과 공포였습니다. 죄지은 사람들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두려움의 시대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분단국가인 우리들에게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더구나 북한은 핵무기를 가지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핵폭탄이 떨어지면 순식간에 죽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죽는지도 모르고 죽게 될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묻지 마 살인, 무차별적인 테러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요즘은 묻지 마 살인, 무차별적인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즘은 대낮에도 테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한번 테러를 당한 사람들은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하고, 평생 낯선 사람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 살아간다고 합니다.
또 환경의 파괴와 지구 온난화로 인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지구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은 온난화로 빙산들이 녹아내리고 있고, 이상 기온으로 가뭄, 폭우, 폭설 등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릅니다. 남태평양의 섬들로 이루어진 국가들은 언제 국토가 물에 잠길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섬들로 국가를 이루고 있는 싱가포르는 지구 온난화에 대비하여 섬 둘레에 높이 2미터 이상 되는 제방을 쌓는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평화는 누리며 살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평화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강력한 경찰력으로 평화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온실가스를 줄임으로 평화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고 알려진 시대는, 예수님 오시기 전후 약 200년간입니다. 이때의 강력한 로마 군대의 힘으로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힘으로 유지되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북한 사이에 휴전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 선언을 하자고 합니다. 평화는 선언한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참 평화를 주시려고 이 땅에 임하셨다고 합니다.
에베소 2:14절 말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던 죄의 담을 무너뜨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을 이뤄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죽어주셨습니다. 이 대속적인 죽으심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우리 사이에 화평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성탄절 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먼저는 하나님과 우리 인류 사이에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다음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도 화목의 직분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디를 가든지 화목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들어가면 분쟁이 끝나고, 다툼이 물러가고, 화평케 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화목의 직분입니다.
이 성탄절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을 누리게 되었음을 상기시켜 주는 날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화목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절기입니다. 이를 깨달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목의 직분 주셨음을 감사하며, 하나님과 세상을 화목 시켜 나가는 일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푼 섬김의 사역을 인정받아서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기자가 테레사 수녀에게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 소감을 물었습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테레사 수녀는 가난하고, 병들고, 배고파하는 사람들이 받는 사랑보다, 더 작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우리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이 말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이 세상이 그렇게 사랑이 없는 세상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사랑,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며 살아서,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을 주고, 병든 자에게는 치료를 베풀어 주고, 가난한 사람들은 도와주고 위로해 줄 뿐 아니라, 사랑에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까?
저도 내년에 은퇴하게 됩니다.
만약 은퇴한 후에도 교회를 하게 된다면, 이렇게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며 살아가는 교회를 이 세상 속에 세워 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2024년 이 성탄절에, 가족에게, 교인들에게, 이웃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작은 사랑이라도 나누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 드리고, 사람들에게는 평화와 쉼을 전해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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