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5. 3. 16. 13:25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

마태복음 16:21-24

 

말씀의 배경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주로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가이사라 빌립보 지방으로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왜 유대인들의 땅을 떠나 이방인들의 땅으로 가셨을까요?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땅에 있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을 만나 병 고침을 받으려고 계속 찾아오기 때문에, 따로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을 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가이사라 빌립보 지방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 교육에 전념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아주 만족해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베드로가 고백했던 믿음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신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주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7-18)

 

베드로가 고백한 이 믿음은 예수님이 원하시고 기대하신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제자들이 꼭 가지고 있어야 할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들도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믿음을 갖게 해 주시려고, 이제까지 함께 지내면서 가르쳐 오셨습니다.

 

이후에도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제자들이 꼭 가지고 있어야 할 믿음에 대한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은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믿음, 우리가 고백하며 살아야 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아멘.

 

그러면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배워서 가지게 된 믿음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신 믿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해 온 서기관과 율법사들은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의 권세를 가지고 오실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였던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실 때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의 권세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디서 오시는지 알지 못하게 오신다.’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들이 다 알고 있는 요셉의 아들로, 마리아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누구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까?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위대한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듣고, 보고, 배운 제자들은 어떤 믿음을 가졌습니까?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이 보내 주신 메시야로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했던 이 고백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고 한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가르침을 극복한 고백이었으며,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언제나 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믿음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주신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우리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은 아직 완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을 받은 것에 기초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믿음, 우리 모두가 고백하며 살아가는 믿음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신 믿음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또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까?

둘째, 우리는 고난받은 메시야를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제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그 다음으로 두 번째 단계의 교육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두 번째 단계의 교육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1절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두 번째 단계의 교육은,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2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라는 것은 알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야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으신다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메시야가 그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서, 인류를 그들의 죄에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했던 서기관과 율법사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는 왕의 권세를 가지고 오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가 오시면 죄악 된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오늘날 우리들과 같이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을 구분해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 소망을 전할 때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 심판의 주로 오시는 메시야에 대해서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분명히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말씀들을 읽으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들은 금서로 지정하여서 아무도 읽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이사야서 53입니다.

이 말씀은 금서로 지정되어 있어서, 랍비들이 회당에서 백성들에게 성경 말씀을 읽어줄 때 이 부분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메시야의 고난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메시야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렇게 강하게 항변하며 자기주장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후에도 이런 가르침을 거듭거듭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였고, 그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였고, 또 그 말씀에 대해 예수님께 묻기도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요. 우리의 신앙은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어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10-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 말씀은 세례받을 때 반드시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려주신, 고난받으신 메시야를 믿는 믿음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아멘. 이 믿음이 우리가 고백하며 살아가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까?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이 나는 고난받는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22절에서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하며 예수님을 붙들고, 강하게 항변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피조물인 베드로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할 수 없는 태도였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고난받는 메시야가 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향해, 고난받는 메시야가 되지 말고, 자신이 알고,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 영광의 메시야가 되어 달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을 수 없는 일입니까?

이것은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를 향해서 할 수 있는 요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변하며 이런 요구를 하였습니다.

 

이런 요구를 전에 누가 했습니까?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앞두고, 40일 금식기도 하신 후에 주리실 때, 사단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런 요구를 한 일이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메시야가 되지 말고 자기 뜻을 이루고 자기 영광을 이루어가는 메시야가 되라고 유혹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그런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스스로 이 요구를 한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베드로의 배후에서 역사하여, 베드로로 하여금 이 요구를 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사단을 향해 ‘...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베드로는 향해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단의 도구가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살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베드로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그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가 한 그 말은, 사단이 그 배후에서 역사하여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유혹하는 말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사단의 도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일만을 생각하시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 전하셨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들만 하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그 모든 말들과 그 모든 일들은 모두 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들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분명하게 구분해 주고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가 행하며 살아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그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일로 믿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열두 명의 정탐꾼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12명의 정탐꾼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그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자신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자신들을 출애굽 시켜 주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가나안 땅을 자신들에게 주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장차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게 될 때까지 경험하게 되는 그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능력으로 역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일로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그 가는 앞길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며 살아야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에 아무리 강대한 민족들이 살고 있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자신들에게 주시기 위해서는, 그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 하는 하나님의 일로 보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10명의 정탐 군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까지 가는 과정에서 당면하게 되는 그 모든 일들과 그 모든 어려움 들을, 자신들이 스스로 해결하고 자신들이 스스로 극복 해나가야 하는 사람의 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홍해가 그 앞을 가로막고 있자 좌절하였고, 애굽 군대가 그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절망하였고, 광야 40동안에는 생활이 너무 힘들고 어렵다고 원망하였고, 가나안 땅에 강대한 민족들이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겁을 먹고 두려워하면서 우리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났겠다.’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그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 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일로 보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 세상 속에서 경험하며 살게 되는 그 모든 일들을 사람인 내가 스스로 해결 해나가야 하는 일, 사람의 일로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그 고백하는 믿음이 다르고, 그 살아가는 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삶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처지, 자기 이해와 생각대로 말하고, 행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사람이 믿음으로 하지 않는 그 모든 것은 다 죄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인정해 주시지만, 믿음으로 살지 않은 삶은 인정해 주시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들도 자칫하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사람인 내가 하나님이 되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극복하고,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야 한다. 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은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면서도 나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고,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날마다의 삶을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동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바른 삶입니다.

 

어떤 개척교회 이야기

 

어떤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한 집사님이 함께 하겠다.고 하며 헌신을 약속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늘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시작하게 해 주신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믿음 좋은 집사님을 보내 주셔서 시작된 교회입니다.’라고 늘 말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일이 생겨서 그 집사님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더 이상 교회를 유지하지 못하고 교회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교회가 하나님이 세운 교회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사람이 세운 교회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세운 교회는 교회 운영이 잘 되고 있어도 하나님이 그만두라고 하시면 그만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운 교회는 교회 운영이 어려워도 하나님이 그만두라고 하지 아니하시면 계속 사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헌신을 약속한 집사님이 교회를 떠났다고, 그래서 교회 재정이 어려워졌다고 문을 닫은 이 교회를 하나님이 세운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나 선지자의 사건

 

어떤 사람들은 요나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가드헤벨 사람이었다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왕하14:25) 우리는 논쟁거리도 되지 않는 이런 논쟁에는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가드헤벨은 스블론 지파에 속한 땅으로 나사렛 동북쪽 약 5km쯤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실존 인물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또 전승에 의하면 요나는 엘리야가 살려 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라고 하기도 합니다.(왕상17:8이하)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 2세 때 살았던 인물입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또 하늘에서는 완전 일식이 일어나 24시간 동안 캄캄함이 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로 앗수르는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잠시 안정과 평화와 부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대한 앗수르가 언제 다시 이스라엘을 침략해 올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요나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2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요나는 어떻게 합니까? 3절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다시스는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에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요나는 이렇게 했습니까?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사람으로서 늘 이스라엘을 괴롭혀 온 앗수르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에게 너는 앗수르로 가서 그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외치라.’라고 하시면서,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그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앗수르가 회개하면 살려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앗수르가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앗수르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것을 거부하고,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에 있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것입니다.

 

무엇이 요나로 하여금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앗수르에 대한 편견이었습니다. 요나는 민족주의적인 편견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편견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 편견을 극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편견을 극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요나 선지자의 사건은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나라는 진보와 보수로 극명하게 갈라져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보 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보수 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우리는 진보 편도 보수 편도 아닌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이 극한 대립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 속에서, 사람의 일을 생각하며 살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람의 일을 하며 살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해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 눈을 가지게 되면 먼저는 우리 생각의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다음에는 우리 인생관의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의 변화가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보여주고 있는 현실은 어떠합니까? 원수가 나와 함께, 내 가까이에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원수라고 표현될 정도의 사람을 가까이에 두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삶이겠습니까?

 

이때 사람의 생각, 사람의 일은 그 사람을 원수라고 생각하고 원수 관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일은 그 사람이 비록 나에게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에 포클랜드 군도의 소유권을 가지고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전쟁을 했습니다.

그때 영국 사람들은 성공회 교회당에 나가서 영국이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성당에 나가서 아르헨티나가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기도를 들어주셨습니까? 영국이 전쟁에서 이겼으니 영국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까?

 

이런 사건들은 우리 믿음, 우리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해 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생각사람의 생각, 하나님의 일사람의 일을 구분해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까?

넷째, 우리는 사단의 미혹을 이기고 극복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말씀을 들으신 이후에, 두 번째 단계의 신앙교육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두 번째 단계의 신앙교육의 내용은 고난받은 메시야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21절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때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2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런 반응을 보인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책망의 말씀 바로 앞에서는 사단을 책망하는 말씀을 먼저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 말씀은 당시 베드로의 배후에서 사단이 역사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신앙을 가진 우리가 싸우고 씨름해야 할 대상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에베소서 6:12절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는 언제나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바로 이 영적 싸움이 일어나는 현장이라고 합니다.

 

사단이 가룟 유다의 마음에 역사하여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사단이 베드로의 마음에 역사하여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며 부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이 베드로의 마음에 역사하시자 자신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을 뉘우치고 통곡하며 회개하도록 하였습니다. 성령이 베드로로 하여금 사단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이 충만해 계시면, 우리 마음은 하나님 나라가 되고, 우리는 인간의 편견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살게 되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 안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사단의 유혹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이 말씀을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할 믿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첫째, 우리는 사람에게서 배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주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어주신, 그 고난의 메시야를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이 세상을 목적으로 삼게 하는 사람의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며,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넷째, 우리는 사단의 미혹을 이기고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해 주는 깨어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주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생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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