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架上七言)
요한복음 19:25~30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내일부터는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나아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치며 환영하였던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왜 이렇게 예수님을 환영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약속하신 메시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구원자로 믿고 환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로 인정하고 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의 바람대로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어주시기 위해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죄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어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보낸 한 주간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왜요. 유대 당국자들은 호시탐탐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예수님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언하고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구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어떠하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그 십자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보고 실망하게 됩니다.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이 기대한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신들이 메시야로 믿고 따랐던 그 예수님이, 금요일 새벽에 당국자들에게 붙잡혀서 심문을 받으시고, 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었던 헤롯에게 보내져서 마치 죄인처럼 심문을 받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빌라도에게 재판받으시는 것을 보고 기대가 실망으로, 실망이 분노로 바뀌어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금요일 날에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왜 그렇게 죽으셔야 했는지 자세히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자랑이며, 우리의 능력이며, 우리가 세상에 전해주고 있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은 다릅니다.
그 종교 창시자의 죽음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죽음보다는 그 살아온 삶과 그 가르침에 더 큰 관심을 가집니다. 그 종교의 교조가 살아 있는 동안 무슨 일을 하였고. 또 무슨 가르침을 주었는지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다른 종교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가 그렇게 중요시하는 교조의 삶이나 가르침들을 보면, 예수님의 삶이나 가르침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산 사람도 없고, 예수님처럼 가르침을 준 사람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땅과 하늘의 차이처럼, 사람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가르침의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사람이 깨달아서 가르쳐 준 내용이지만, 예수님이 가르침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전해주고 있는 말씀의 내용과 수준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의 위대하심은 그 살았던 삶이나 가르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위대하심은 바로 그 죽으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 대신 죽어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이 특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의 삯이 사망’이어서 사람들은 모두 그 자신의 죄 때문에 죽지만,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성자 하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 대신 대속의 죽음을 죽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특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유월절에 죄 없는 어린 양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갔던 것처럼, 그렇게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처럼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쓰시다가 할 수 없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 아셨고, 그 죽으심을 스스로 준비해 오셨고, 우리들을 위해서 기꺼이 그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 죽어주시려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열 열이 환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실 몇 년 동안 사람들이 경험한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하시고, 능력이 있는 분이시라면, 능히 로마 군대도 쳐부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깔아 놓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로마 군대를 몰아내시지도 않으셨고, 예루살렘 성과 왕궁을 접수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고, 그날 밤에는 밤을 새워 기도하시다가, 금요일 새벽에 당국자들에게 잡혀 재판을 받고, 결국에는 골고다라는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중에, 보배 같은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그 남기신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는, 예수님이 누구시고, 왜 그렇게 죽으셔야만 했는지를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주간을 앞에 두고 있는 이 뜻깊은 날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남겨주신 그 일곱 마디 말씀들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첫째, 사람들의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절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록을 보면 로마 황제가 식사하는 자리에서 십자가 얘기를 꺼냈다가 처형당한 신하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로마의 사상가 키케로는 “십자가는 로마 시민의 머리에서 생각조차 해서 안 되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형벌이 얼마나 끔찍하였으면 키케로가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가장 먼저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죄 사함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대신 죽어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면 살아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원수를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해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병들을 위한 기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로마 군병들만을 위해서 한 기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이 기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로마 군병들을 위한 기도이고, 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를 위한 기도이고, 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울을 위한 기도이고, 또 한 평생 죄를 지으며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한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기도 덕분에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게 된 것을 감사하며, 지금 이렇게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이시기에, 인류의 죄를 사해주실 권리가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이 권세는,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대속 적인 죽으심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죄를 사해주실 권리가 있으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친구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 나온 중풍 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면서 그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형제가 죄를 범하면 하루에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하루 490번까지는 용서해 주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되, 계속해서 용서해 주는 삶을 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즐겨 암송하는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를 용서받은 우리들은,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해 주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또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둘째, 회개하는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3:43절에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이 죄악 된 세상에서 구원하셔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까? 그것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시는 방법 이셨습니다. 이를 위해 무죄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죄인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좌우편에 강도 둘이 함께 못 박혔습니다.
그중 한 강도는 예수님을 불신하며 모욕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강도는 그 자신이 지은 죄를 뉘우치며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구원을 요청하는 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은 그 강도의 영혼이 지금 어디에 가 있다는 것입니까?
그 영혼이 낙원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강도의 영혼은 어떻게 낙원에 간 것입니까? 먼저는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이 강도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 죄를 대신 지시고 죽어주신 것에 근거합니다. 다음은 이 강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님을 죄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구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고백이 바로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 강도와 같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져주신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또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있는 이 믿음 때문에, 이 세상 삶을 다 살고 죽게 될 때, 음부를 거쳐 불타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낙원을 거쳐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주심과 그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의 믿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 믿음이 사람들을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게 합니다. 이 믿음이 사람들을 영생과 영벌로 갈라지게 합니다.
2025년도 고난 주간을 맞이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십자가 강도가 예수님께 드렸던 그 믿음의 고백을 함께 드릴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강도에게 해 주신 약속의 말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하신 그 말씀을, 오늘 우리들도 들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셋째,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26-27절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기독교에는 ‘효(孝)가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기독교는 ‘효’가 없는 종교가 아닙니다.
십계명을 보십시오.
인간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첫 계명에서 바로 효를 가르치고 있는 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12절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면서도 살아남아 있을 그 어머니를 생각하시고 배려하신 분이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 요한에게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였고, 그 후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처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비록 나의 혈육이 아닐지라도 연로하신 노인 어르신들을 마치 내 부모님같이 모실 수 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시면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성도들을 한 형제자매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평생 서로 도우며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성도 들 중에 누군가 먼저 죽게 되면, 살아남아 있는 성도들이 그 성도의 장례식을 치러주면서 천국 가는 길을 환송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이 장례식을 아주 중요한 예식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그 영혼이 거듭난 제자들에게, 육신의 가족 개념을 넘어서는 영적인 가족 개념을 가지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가족 개념을 가지게 되었던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된 성도들의 육 적인 필요를 채워주기 위하여 그 소유를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심지어는 부유한 성도들은 가난한 성도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그 집과 그 소유한 물건들을 함께 통용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루살렘교회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의 교회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하나 되고, 한 가족이 된 교우관계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서로를 향해 형제자매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교회는 영적인 공동체 교회, 새로운 가족 공동체 교회입니다. 우리 참빛교회는 이런 믿음을 이어받은 교회임을 알리고자 우리 교회의 이름을 영문으로 ‘chambit Presbyterian church’라고 하지 않고 ‘chambit community church’라고 쓴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넷째,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46절입니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태복음에서는 이날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철저하게 외면당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이 예수님의 외침도 역시 버림받은 상태에서 하신 외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버림받으신 것입니까?
이사야서 53: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을 우리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심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고린도후서 5:21절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는 언제나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성자 하나님으로 계실 때뿐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 속에 사실 동안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 한 번도 끊어지신 일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달랐습니다.
죄와 악은 모양이라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그 얼굴을 돌리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 사랑하는 아들로 보신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들을 대표하는 대표자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 죄의 형벌을 받아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가시는 예수님을 외면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예수님에게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가장 큰 고통은,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이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시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심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잠시나마 교제가 끊어진 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 가운데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절망적인 부르짖음은 사실상 우리를 위한 절규였습니다.
죄인이 된 우리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지옥을 향해 나가면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소리 질러야 할 그 비명을, 예수님이 우리 대신 소리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음으로 우리가 찾은 바 되었고, 예수님이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짐을 당함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연결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절규했던 이 기도의 부르짖음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누군가를 위하여 내가 버림받을 각오를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내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고난당 할 각오를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 친척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또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모세오경을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멸망시키시고, 모세와 그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가 어떤 기도를 했습니까?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모세는 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려거든 나를 먼저 버리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삶은 아무나 살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이런 삶은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져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아는 사람들만 살 수 있는 삶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요구하심이 뭘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해 주시고, 성령으로 그 마음을 감동해 주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사셨던 자기희생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 자기희생적인 삶을 통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내는 일을 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아멘.
또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다섯째, 그 육체적인 고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28절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6시간 동안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십자가에 달려 계셨습니다. 얼마나 심장이 뛰고, 내장에 열이 나고, 또 피와 땀이 흘리셨겠습니까?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우리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어떤 이단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달린 것처럼 보였다고 하는 가현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고난받으셨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실제 고난받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없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목마름을 토로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실 우리의 목마름을 드러낸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끝없는 목마름을 느낍니다.
우리는 돈이 없어서 물질에 목이 마르고, 건강한 몸이 필요한데 건강하지 않아서 건강에 목이 마르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데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행복에 목말라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목말라하는 우리들에게 생수의 강을 주시려고 우리 대신 목마름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 목마르신 고통을 당하심으로, 예수님 은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마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서 55:1절입니다.
“오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요한복음 4:14절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계시록 21:6절입니다.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예수님은 우리 대신 목마름을 당하심으로, 목마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생명수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아멘.
또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여섯째, 승리의 선언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30절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그 모든 구원의 약속을 다 성취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전도자가 전도 집회를 마치고 시설들을 철거하고 있었을 때, 한 청년이 다가와서 ‘목사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젊은이 한발 늦었네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아니 늦었다니요? 제가 집회가 끝난 다음에 와서 늦었다는 것입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네는 지금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이미 늦었다는 것이네.’ 왜냐하면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완성하셨기 때문일세.’ ‘그러니 많이 늦은 것이 아닌가?’라고 대답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된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이단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자기 힘과 자기 공로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배가 끝나면 점심을 먹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점심을 먹습니까? 먼저는 농부가 농사를 지어서 거두어들인 그 벼 이삭을 방앗간에서 도정을 하고, 우리는 그 도정 한 쌀을 슈퍼에서 사서, 점심때 먹으려고 이미 밥을 해 놓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저 수저만 들고 앉아서 먹으면 됩니다. 우리가 점심을 먹기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나를 위해 하신 일이라고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알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게 되는 그 믿음마저도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실 때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구원받은 성도 들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믿음으로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삶을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말로만 순종한다고 하고, 말로만 헌신한다고 하고,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저 말뿐인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에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어 주시고, 우리의 섬김도 다 이루어 주시고, 우리의 헌신도 다 이루어 주셔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켜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이런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너희들은, 예수님이 너희를 위해 그 모든 일들을 다 이루어 주셨듯이, 너희들도 너희 자신과 너희 목적과 너희 뜻만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지 말고, 너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가라. 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또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일곱째, 그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46절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예수님의 영혼과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이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 때문에, 장차 우리 영혼이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우리가 공로를 세워서가 아닙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우리를 인도해 주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이 기도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하며 떠나야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으면서 한 기도가 무엇입니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결국이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이 아닙니까?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도 이 세상을 떠나실 때 이 말씀을 하며 떠났습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이 세상을 떠날 때 이 기도를 하며 떠났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을 떠날 때 이 기도를 하며 떠나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을 다 마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믿음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기도를 하며, 평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 아침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과 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하신 이 가상칠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또 이 말씀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죄 사함의 은혜와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일부터 시작되고 있는 이 고난 주간에,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그 말씀들을 읽고, 암송하고, 또 깊이 묵상하므로, 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를, 새롭게 깨닫고, 풍성하게 누리며 보내시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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