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역사서

기드온이 만난 하나님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5. 4. 6. 13:17

기드온이 만난 하나님

사사기 6 : 11 - 18

 

1. 사사 기드온

 

기드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드온이 살았던 그때 이스라엘은 미디안 사람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300(삼백)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135,000(십삼만 오천)명이나 되는 미디안 연합군과 싸워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지배하게 되었고, 40년 동안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때 기드온은 민족적인 영웅이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친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나아가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당신의 자녀들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기드온은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기드온은 나와 내 자녀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너희를 다스리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를 다스리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역사 속에 종종 있어 왔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거나 교회가 부흥하게 되면,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은 그 사람에게 과도한 관심을 가집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경우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자신을 따랐던 300명의 용사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면,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며 살아가게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그런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능만 하면 그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해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세습은 성도들도 동의해야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세습이 이루어진 교회에서는 왜 성도들이 세습에 동의하였을까요? 그것은 그 교회를 개척하고 섬겨온 담임 목회자의 공로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자녀에게 교회를 세습하려는 것에 동의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달랐습니다.

기드온이 먼저 왕권을 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백성들이 의견을 모아서, 자신들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준 기드온의 공로를 인정해 주면서, 기드온과 그 후손들이 왕이 되어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기드온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나와 내 자녀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서 다스리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기드온

 

이 기드온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기드온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사기 6:11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기드온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미디안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미디안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땅 아래로 파둔 포도주 틀에서 숨어서 은밀하게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의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을 두려워하였던 졸장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큰 용사라고 하며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라고 하였습니다. 6:12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6:13절입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셨나이다 하니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가 미디안 사람들의 압제 속에 살고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상들에게 듣고 배운 것은, 하나님이 애굽이라는 강력한 나라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살아오면서 그런 이적을 전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신 것이 우리 현실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드온의 이 말속에서는, 자신들이 미디안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도록 놓아두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불평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22절을 보면 기드온은 죄를 징벌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죄인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정리해 보면,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기드온은, 인간적으로는 졸장부였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족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인에게 고난받도록 놓아두고 계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 하나님을 만난 후의 기드온

 

기드온이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하나님을 만난 후 기드온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공의의 하나님, 두렵고 엄하신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사랑의 하나님,‘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기드온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기드온을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까?

 

첫째, 그 백성들에게 평강이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23-2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샬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날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기드온은 부정적인 하나님 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긍정적인 하나님 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기드온에게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하나님 인식은 부정 적입니다.

엄위하신 하나님, 율법적인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등등 부정적인 하나님 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등등 긍정적인 하나님 상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변화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공통적인 변화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그 주인을 잘 알고, 그 주인의 은혜를 입고 살았던 두 달란트를 받은 종,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주인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자신을 믿고 그 소유를 맡겨 주신 주인을 좋은 주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다릅니다. 이 종은 그 주인을 굳은 사람, 엄한 주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으로부터 책망받지 않기 위하여 그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돌려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보고 있으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어떻게 믿고 있느냐?’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다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 등등 하나님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과 관점을 가지게 되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는데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명명백백한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은 엄위하신 하나님, 율법적인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등 부정적인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는 용서해 주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 살았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수도 없이 많이 실수하고, 많은 잘못을 범하였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예수님을 저주하며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심각한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수하고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다릅니다.

가룟 유다는 베드로와 똑같이 제자로 부르심을 받아,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실수하고 넘어지자, 그 실수하고 넘어진 일로 그 양심이 가책을 받아 자살하고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공동 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앞에서는 인간의 그 어떤 죄도, 어떤 잘못도, 어떤 실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죄인이 된 우리 죄를 사해주시기 위하여, 성자 하나님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들 은사로,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는, 더 이상 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는, 죄를 통해 우리를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죄를 통해 우리를 정죄하는 것은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는 범죄 한 가룟 유다의 양심에 역사하고 정죄함으로, 가룟 유다가 스스로 자살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거룩하신 하나님, 죄인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벌하시고 심판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기드온의 어떻게 변했습니까? 부정적인 하나님 관이 긍정적인 하나님 관으로 변한 것입니다. 두려웠던 하나님 이해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 이해로 변하였습니다. 죄는 반드시 엄벌하시고 정죄하시는 하나님 이해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그 이해가 바뀐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도 기드온이 만났던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기드온과 같이 긍정적인 하나님 관을 가진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예배를 통해 이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드온을 만나주시고 평강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만나주시고 평강을 주시는 한 주간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또 기드온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둘째, 현재의 약점을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기드온이 사사로 부으심을 받을 때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13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조상들과 함께해 주셨던 것 같이, 우리와는 함께 해 주지 않으셔서, 우리가 미디안 사람들의 압제 속에서 살고 있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기드온의 불평은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불평과도 매우 흡사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다 건강하게 잘 사는데, 나는 왜 늘 건강을 걱정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라고 불평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부유하고 평안한 삶을 사는데, 나는 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늘 염려, 걱정, 근심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라고 불평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사회적인 지위를 누리며 사는데, 나는 왜 늘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라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 삶이 힘들고 어려워지면 기드온과 같은 불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불평하는 기드온에게 주신 말씀이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내가 전에 모세를 애굽에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낸 것 같이, 내가 지금 너를 미디안 사람들에게 보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도록 할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기를 모세와 같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택해 주셨다는 말씀을 듣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고 싶은데, 내가 예물을 준비해 와서 바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예물을 준비해 오자, 그 예물을 받으신 표징으로 불태우셨습니다. 기드온은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심을 받게 됩니다.

 

이런 기드온에게 들려온 소식이 무엇입니까?

33절입니다. 그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미디안과 연합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쳐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셨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연합군대와 전쟁을 하기 위해, 나팔을 불어 백성들을 모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모인 숫자가 32,000(삼만 이천)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적군의 숫자는 135,000(십삼만 오천)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인들보다 적군이 약 네(4) 배나 더 많았습니다.

 

그 많은 미디안 군대를 보자, 기드온은 승리를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에게 두 번째의 요구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전에 우리 조상들과 함께해 주셨듯이, 이 전쟁에서도 함께 해 주신다는 표징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양털 한 뭉치를 바깥에 둘 텐데, 새벽이슬에 양털만 젖고 땅은 마르게 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요구대로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반대로 새벽이슬에 땅만 젖고 양털은 마르게 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이 요구도 들어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미디안 연합군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하롯 샘 곁에 진을 치게 됩니다. 7:1절입니다.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모인 군인의 숫자가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이 많은 백성들이 미디안과 싸워서 이기게 되면, 백성들은 하나님이 도우셔서 이긴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잘 싸워서 이긴 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두 차례에 걸쳐서 백성들을 돌려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300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300명으로 135,000명의 적군과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기드온은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적군들은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자신들은 300명뿐이었습니다. 숫자로 따지자면 최소한 1인당 450명씩은 상대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불안해하는 기드온에게 적 병사가 꾼 꿈 이야기를 듣게 해 줍니다.

한 병사가 꿈을 꾸고 이야기하기를, 보리떡 한 덩어리가 이스라엘 진영에서 자신들의 진영으로 굴러들어 와서 전체 장막을 무너뜨리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이는 하나님이 미디안을 기드온의 손에 넘겨준 것이라고 해몽하는 것입니다.

 

꿈 이야기와 그 해몽을 듣고 기드온은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적군과 싸워서 결국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기드온이 수도 없이 표적을 구하고, 의심을 하여도, 이런 기드온의 약점까지 다 들어주시고, 다 받아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허물과 약점도 다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의 실수와 허물과 약점까지 다 받아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시고, 우리들의 입장에 서서 우리를 상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얼마나 불안해하며, 얼마나 의심을 잘하며, 얼마나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 없는 사람처럼 때로 불평불만을 토할 때도 쉽게 정죄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입장에 서서 우리를 이해해 주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치고 약점이 없고,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신앙의 용사들도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습니까?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이 우리 믿음의 조상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위대한 신앙의 용사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하면 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우리의 연약함과 약점까지도 받아주시고 용납해 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때로는 실수하고, 넘어져도, 다시 회개하고 믿음으로 일어나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시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게 되는 고통과 아픔과 실망과 좌절 등등을 다 겪으셔서 알고 계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실수하고, 넘어지고, 죄를 범하였더라도, 우리의 모든 허물과 약점들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의 허물과 약점들까지도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은혜의 보좌를 향해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또 기드온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셋째,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는 방법과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는 방법은 다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의 현재의 입장과 처지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함께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기드온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찾아가셨을 때 기드온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미디안 사람들을 무서워하여, 포도주 틀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미디안 사람들이 추수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추수한 밀을 다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드온에게서 용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용사가 아니라 미디안의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한 졸장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드온을 찾아갔을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졸장부 같아 보이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기드온의 현재 모습만 보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고, 앞으로 기드온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을 미래 내다보시고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장차 기드온이 큰 용사가 되어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볼 때 현재의 모습만 보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현재의 모습만 보고 평가하시지 않고, 그 사람의 전 생애를 다 내다보시면서 평가하십니다. 이것이 영원에 계신 하나님과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이름이 시몬이나 시몬은 갈대라는 뜻입니다. - 앞으로는 베드로라 하리라. - 베드로는 반석이란 뜻입니다. -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신적 혜안으로 베드로의 일생을 미리 내다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지금은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만, 나중에는 반석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어떤 헌신을 하게 될지를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보십시오.

그녀는 일곱 귀신 들렸던 사람이면서 또 창기였다고 합니다. 누가 이 여인에게서 희망을 찾아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막달라 마리아의 속에 있는 거룩함을 향한 열망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그 죄악 된 삶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예수님의 전도 사역을 따라다니며 헌신했고, 나중에는 초대 교회가 인정해 주는 유명한 성녀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과 유대교를 향한 열정을 가지고, 예수 믿는 성도들을 박해하는 일에 선봉장으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울이 지금은 복음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지만, 회심하고 돌이키게 되면 초대 교회를 세워나가는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을 미리 내다보셨습니다. 그래서 이 바울을 회심시키시고, 구원해 주시고, 사명을 주시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로까지 친히 찾아가서 만나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인생이 180도로 변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교회의 박해자였으나, 이후에는 기독교 신앙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기독교 신앙의 전파자가 될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바울의 미래를 미리 내다보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사명을 주어 세워주신 것입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이 삭개오를 어떻게 보았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변해도 수전노(守錢奴) 같은 삭개오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가 변화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에 들어가셨고 또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자 돈만 알고 살던 이 삭개오가 변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을 무서워하여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던 졸장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기드온이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원수 미디안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해 낼 용사가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 기드온을 찾아가서 큰 용사여! 라고 불러주시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현재 모습만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내다보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베드로를 불러주시고, 막달라 마리아를 불러주시고, 사도바울을 불러주시고, 삭개오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의 모습만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믿음도 없어 보이고, 지혜롭지도 못해 보이고, 처세술도 형편이 없어 보이지만, 이런 우리가 앞으로 성장하고 변하여서, 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이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를 미리 다 내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고,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말씀으로 성령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나가셔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목적하신 일을 이루어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다 내다보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믿는다. 나는 너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 나는 미래에 네가 이루어 갈 일들을 미리 내다보고 너를 불렀다. 그러니 너는 용기를 가지고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라.’ ‘너는 결국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일군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나의 모습만 바라보는 근시안적인 시야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내 인생 전체를 함께 바라볼 수 있는 통전적인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시야를 가지고 나를 보고, 또 다른 사람들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시야를 가지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아이들을 보십시오. 아이들이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모두가 다 똑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대학을 가고, 사회로 나가게 되면, 한 교실에서 똑같이 공부하던 학생들 중에 어떤 아이는, 사회적으로 덕망이 있는 사람들이 되고, 또 어떤 아이는 그런 사람 밑에서 그 일을 보조하는 단순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의 모습은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아 보이지만, 그 아이들의 미래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고 오늘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유능한 교사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잘 전달해 주는 교사입니까? 물론 이런 교사는 실력 있는 교사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유능하고 필요한 교사는 똑같은 아이들에게서, 이 아이와 저 아이가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특성을 발견하고, 격려해 주어서, 자기의 특성을 잘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사일 것입니다.

 

그러면 무능한 교사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가능성은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모습인, 힘이 세고, 집이 부자고, 얼굴이 잘생긴 것 등등만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교사는 아이들에게 미래의 을 심어줄 수가 없습니다. 장래에 이루어 나갈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도록 할 능력이 없는 교사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이런 눈 주시기를 구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처지와 입장만 생각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지 말고, 우리는 내일을 바라보고, 내년을 바라보고,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성도, 그래서 나의 장래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비전과 꿈을 내게 말해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의 미래에 대해 말해주겠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왜 이 말을 했겠습니까? 사람들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무슨 신령한 눈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말을 한 의도는 그 사람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꿈과 비전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목회자인 제가 교회에 처음 나오는 성도들이나,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여러분들을 볼 때, 그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이 되면 되겠습니까? 오늘 그 성도가 처해 있는 형편과 처지는 어떠하든지, 그 성도가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신앙을 보고, 믿음의 헌신을 보고, 그 성도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를 미리 내다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눈이 있어야 성도들을 믿음 안에서 세워주고, 그 앞날을 인도해 주는 선지자적인 역할을 감당해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이런 눈이 있어야 교회 일군들을 세울 때, 그 성도가 가진 믿음이나 비전이나 도덕성 등을 종합적으로 보고 판단하여 일군으로 세우고, 안수집사장로로 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런 눈이 없으면 무엇을 보고 직분 자들을 세우고 일군들을 세우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 성도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이나, 학식이나 영향력만 보고 직분 자를 세우고 일군들을 세우게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실 때 외형적으로 드러나 있는 그 모습만 보시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미래와 삶 전체를 보시고, 그 사람이 살아갈 전 생애를 함께 보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좀 부족해 보여도, 그 사람이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미리 내다보시면서 부르시기도 하셨고, 직분도 맡겨 주시기도 하셨고, 성령을 통해 은혜와 능력도 부어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부르셨겠습니까?

우리의 현재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하시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의 현재 모습은 기드온과 같이 소인배 같아 보일지라도, 뭐 하나 드러내 놓고 자랑할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신앙이 성장하고, 인격이 성숙하여서, 장차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를 미리 내다보시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유익만을 바라보며 사는 좁은 안목을 가진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듯이, 우리들도 신앙 안에서 내일을,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미래가 열리고, 이런 사람들의 미래가 소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미래에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붙어있으면 됩니다. 비록 그 살아가는 삶 속에 시험이 오고, 어려움이 오고, 아픔이 와도, 우리는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믿고 참고 인내해 나가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는 사람들이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멘

 

사도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도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참고 인내하며 우리 믿음을 지켜나가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바울같이, 기드온같이, 하나님이 쓰시기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그 삶 속에서 신앙의 결실을 30, 60, 100배로 맺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기드온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첫째, 기드온이 만난 하나님은 두려우신 하나님이 아니라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둘째, 우리의 장점뿐 아니라 우리의 심각한 약점까지도 사랑으로 용납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셋째, 현재 우리의 입장만 보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들의 전 생애를 한눈에 다 보시면서 우리 미래의 가능성을 믿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믿음으로 참고 인내하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받아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처럼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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