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소명
골로새서 3:22-25
1. 직업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은 자기 직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직업은 사람들의 삶의 필수 요소입니다. 직업은 사회가 고도화되면 될수록 다양해지고 그 종류도 많아집니다. 2020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약 12,000개의 직업이 있다고 합니다. 이 직업을 세분화하여 나누면 직업은 수만 가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직업은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좁은 의미로 보면, 사람들은 일과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나가는 재원 즉 돈을 벌게 됩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보면, 사람들은 일과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등등의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직업은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 주는 역할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보수나 명예가 주어지는 직종을 선호하고, 그런 자리를 차지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상고를 나와서 첫 직장으로 은행에 취직하게 됩니다.
기대에 부풀어 출근한 첫날 저녁에 은행에서는 수입과 지출을 계산하게 되는데, 자신이 창구에서 받아 놓은 돈과 실제 가지고 있는 돈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차이 나는 금액을 갚아나가기 위해, 매달 월급 절반을 공제하고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에다가 세금과 각종 공과금을 떼고 나면 실제 수령 하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직장 생활이 재미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직장 생활에 대한 흥미를 잃고, 일찍 군입 대를 지원하였고, 군복무를 마친 후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고시 공부를 시작하여 나중에는 검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첫 출근 한날 한 실수 때문에, 직업을 바꾸어서 신분의 변화를 꾀한 대표적인 케이스가 되었습니다.
2.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노동이 의미
성경은 일과 노동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신약성경에서 일과 노동을 지칭하는 단어는 에르곤(ergon)입니다.
고린도전서 15: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구약성경에서 일과 노동을 지칭하는 단어는 ‘멜라카’(mlkh)입니다.
창세기 2:2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인류에게 ‘땀을 흘려 일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창세기 3:17-19절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에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이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언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후에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과 노동을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주어진 저주의 결과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도 일과 노동은 있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2절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세기 1:28 절에서는 그 창조하신 사람들에게 주신 문화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9 절에서는 아담이 만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 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정리하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이전에도 일과 노동은 있었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이후에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더하여 복음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먼저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일을 할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내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행하며 사는 일과 노동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생활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며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하며 살아가는 그 일과 노동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일을 해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일과 육체의 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일합니까?
일과 노동을 통해 물질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일합니다. 조금 깨어 있는 사람들은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서 일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영이 죽어 있기 때문에 영적인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육체에 속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하며 사는 모든 일들은 육체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직업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며 살지라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비록 축구선수가 되어서 축구 경기를 하여도, 그 경기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축구 경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이 그 사제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 하는 그 일은, 사람을 위해서 하는 육체적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구분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자주 오해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전도, 선교, 예배 같은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내가 직업으로 하는 일은 세상일이라고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주일 예배에만 임재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하며 살아가는 직업과 노동의 모든 영역에서 함께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하며 사는 일 중에서 육체의 일과 영적인 일의 구분은, 그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누구이며, 그 사람이 어떤 믿음으로 그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일한 일을 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일이 육체적인 일이 되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인의 직업관
성경 적인 직업관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골로새서 3:22-24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으로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말씀의 종들은 노예들을 말합니다.
당시 노예들은 어떤 일을 했습니까?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그 허드렛일은 이 세상 관점으로 보아도 무가치하고 천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천하고 무가치한 일일지라도 믿음으로 행하면, 주의 일을 한 것으로 인정을 받으며, 주께 그 유업의 상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직업관으로 우리 삶을 살펴보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예배드리고, 전도하는 일들도 하나님의 일이지만, 믿음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직업에, 주어진 학업에, 주어진 군대 생활에 충실하면 그것도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기독교의 영성에는 기도 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향유 하는 개인 차원의 영성이 있는가 하면, 부패하고 죄악이 만연해 있는 세상 속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실천적인 영성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바른 영성은 이 두 가지기 조화를 이루고 있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세상을 보는 성도들의 관점
우리가 신앙적인 영성과 실천적인 영성을 가지고 살아야 할 세상은 어떤 곳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두 가지 서로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시각입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요한 1서 2:15-17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또 하나는 긍정적인 시각입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요한복음 3:16-17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상반되어 보이는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있습니까?
이 세상은 타락하고 범죄 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난 세상임과 동시에, 그런 세상일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비록 죄악과 범죄가 만연해 있는 타락한 세상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해 나가시는 구원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한편으로는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범죄와 타락과 심판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과 새로운 창조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봅니다.
우리가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기가 심히 어려워집니다. 그러면 우리 직장 생활에 대해서도, 학교에서 하는 공부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만 먹고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호구지책으로 직업을 가지고 노동 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요즘 인기 있는 프로그램 중에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부정적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차라리 자연인들처럼 이 세상을 등지고, 세상 직업을 갖지 않고, 세상과는 연을 끊고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 될 것입니다. 과거 중세의 수도원 제도가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전에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던 기도원 운동이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의 배후에는 염세주의가 있습니다. 탈 세상 적인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되면,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 창조하신 세상을 보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평가하셨던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비록 이 세상은 범죄 함으로 타락한 세상이 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 주셨을 정도로, 이 세상은 아직도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해 가든지,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속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와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저 하늘을 보십시오.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달과 별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풍성한 6월의 이 자연도 그 무엇으로도 억제할 수 없는 생명의 찬가를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은행나무가 많이 심겨 있습니다.
약 36년 전에 아파트를 건축할 때 조경목으로 은행나무를 촘촘하게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 심은 나무들이 자라고 덩치가 커가면서, 너무 촘촘하게 심은 나무들이 서로의 성장을 방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은행나무들 사이사이에는 밑동부터 베어낸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일 전에 산책하다가, 아주 오래전에 베어낸 그 나무들에서, 새로운 가지들이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죽었던 나무가 새로운 가지를 내고있는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끈질긴 생명력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명력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어떻게 변화되든지,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한순간도 그 눈을 떼지 않으시고 이 세상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것은 세상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역사의 진행 속에 함께 하시면서, 섭리로 세상 역사를 다스리고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를 보면서 걱정이 많으시지요.
우리가 왜 걱정을 합니까? 가치 판단의 기준을 상실한 정치인들이 많고, 국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때문에 너무 걱정하거나 근심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근심할 시간이 있으면, 역사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 우리와 우리 가정과 우리나라의 죄악을 고하며 회개하고,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염려 걱정 근심하며 사는 것보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다 맡기고 사는 것이 더 지혜로운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6. 성도들의 올바른 삶의 태도
예수 믿는 우리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는 이 세상을 무시하거나 도피하거나 염세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의 주인은 여전히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섭리로 다스리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기독교인들은 염세주의자들처럼 세상을 떠나거나 도피하며 살 수가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이 세상의 부와 성공, 성취와 명예에 빠져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 요한복음 17:16 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 세상에서 구별되어 나온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그 존재가치를 증명하며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7:18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명 자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까?
세상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전해 주는 일군으로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하심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전해 주는 일군으로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공의가 이 세상 속에서 실현되도록 해 나가는 일군으로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세상의 참 빛이 되시는 하나님을 전해 주는 삶을 살라고 우리는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만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참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만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참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비록 세속적인 직업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 속에서 함께 일하며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사명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여 살지 않기 위하여,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살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이 바로 우리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야 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밖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등 경 아래 두지 않고, 등 경위의 등불이 되도록 하신 이유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듯이, 세상도 그렇게 믿음으로 변화시키라고 우리를 세상 안에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변화 시켜나가야 하는 이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덧입혀 주실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령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 덧입기를 사모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일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해낼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하며 살아야 할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도록 문화명령을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통해 나의 재능을 발휘하고 나의 자아를 개발하는 등 자기실현을 해 나가야 합니다. 셋째는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삶 속에서 이 세 가지를 해 나가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2025년도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한해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들을 성실히 감당해 나가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서 성실하고 충성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을 우리 모두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고, 또 복음 전도를 통해서 불신앙의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해 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쁨의 원천 (3) | 2025.06.22 |
---|---|
약속의 자녀, 약속의 말씀 (2) | 2025.06.08 |
부활 신앙 (1) | 2025.04.20 |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삶 (1) | 2025.02.16 |
하나님 사랑, 교회사랑 (8) | 2024.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