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기쁨의 원천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5. 6. 22. 13:49

기쁨의 원천

데살로니가 전서 5:16-18

 

요즘 여러분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쁨도 감격도 없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보면 기쁜 날도 있지만, 문제를 만나 고민하고, 갈등하고, 걱정하며 보내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말씀을 보면,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오늘은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첫째, 이 세상 속에서 기쁨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도 있습니다.

제가 한 삼 사십몇 년 전에 운전면허 시험을 보았습니다. 이론 시험은 한 번에 합격했지만, 실기 시험에서 3번이나 떨어졌습니다. 4번째 주행시험을 보러 갔는데 그날도 만족스럽게 운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또 떨어졌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실망하여 차에서 내리고 있는데, 몇 번 차 합격이라는 방송 소리와 함께, 제가 운전했던 차 위에서 파란 불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운전면허증을 땄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아주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

그날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한 것이 얼마나 기쁘던지, 곧바로 음료수 파는 가게로 달려가서 캔 음료를 여러 개 사 와서, 함께 차를 탔던 시험관과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합격의 기쁨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에게는 무엇이 기쁨이겠습니까? 자기 자녀가 잘되고, 손자 손녀들이 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녀를 칭찬할 때 부모들은 자식 키운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들은 언제 기쁨을 느낍니까?

자기 부모가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대접을 받을 때가 아닙니까? 그때 자녀들은 우리 부모님은 정말 멋있는 분이셔’. ‘우리 부모님은 정말 존경이 가는 분이셔라고 하면서, 좋은 부모를 둔 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친절을 베풀어주고, 어려움을 함께해 주는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을 기뻐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며 사는 기쁨은 아주 다양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들은 어떤 기쁨입니까? 그 기쁨은 유한한 기쁨입니다. 잠시 잠깐의 기쁨입니다. 오늘은 기뻐하고 있지만 내일은 어떤 슬픔이 다가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들은 잠시 잠깐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내일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서, 한순간에 그 기쁨을 빼앗아 가 버릴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바울은 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해 보게 됩니까? 바울 자신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서, 우리에게만 너희는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라.’라고 권하고 있든지? 아니면 바울은 자신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도 자신과 같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라.’고 권하고 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맞는 말인 것 같습니까?

저는 바울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면서 이 권면의 말씀을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이 세상에서 기쁨을 찾으며 사는 우리와는 달리 이 세상 속에서 기쁨을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이 기쁨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서신은 빌립보서입니다. 빌립보서는 네 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 짧은 서신 안에 기쁨이라는 단어가 16회 정도 나오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어느 서신보다 더 기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바울은 AD 61-63년경에 빌립보서를 썼습니다.

빌립보서를 쓸 때 바울은 어떤 환경 속에 있었습니까? 당시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생활이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충만한 삶에 대한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여러분,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세요라는 교훈을 할 때, 바울은 기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힘든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늘 기뻐하는 삶을 살았고, 성도들에게도 너희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지 나와 같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라.’고 교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기쁨을 세상 속에서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 속에서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 앞에 당면한 현실 속에서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가장 큰 이유는 바울은 이 세상 속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순간적인 것만 있을 뿐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기쁨, 영원한 기쁨은 없습니다. 순간적인 기쁨, 상대적인 기쁨만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기쁘면 다른 사람이 슬펒;고, 다른 사람이 기쁘면 내가 슬퍼집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살 때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들의 필요를 모두 다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다 같이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에덴동산을 우리는 기쁨의 동산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저주를 받은 곳입니다.

그래서 땅은 그냥 놓아두면 가시엉겅퀴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땅을 갈고,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렇게 땀을 흘리고 수고하여야,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땀 흘리는 수고와 노력을 통해 거둔 수확에 만족하고 살았으면 좋겠지만, 인간의 욕심과 탐욕은 끝이 없어서 도무지 만족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도 탐욕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지위를 넘보다가 죄를 지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도 자신이 노력해서 얻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탐욕에 눈이 멀어서 다른 사람이 얻은 것을 넘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얻은 것을 빼앗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이 개인적으로 일어날 때는, 개인 간에 갈등과 분쟁을 불러왔습니다.

이런 일이 국가적으로 나타날 때는, 국가 간의 전쟁을 불러왔습니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분쟁들은 대다수가 다 인간의 욕심과 탐욕에서 비롯된 분쟁입니다.

 

이렇게 욕심과 탐욕의 지배를 받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참 기쁨이 있겠습니까? 이런 세상에 영원한 기쁨이 있겠습니까?

 

세상의 기쁨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기쁨은 다른 사람의 슬픔 위에서 느끼는 기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어떤 일이 잘 되어서 내가 기쁨을 느낄 때는, 반드시 나 때문에 그 하는 일에 실패하고 슬퍼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장학금을 타게 되면, 반드시 거기에는 나보다 공부를 못해서 좌절하고 슬퍼하는 다른 학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사업이 잘 되어서 내가 부자가 되면, 반드시 거기에는 나와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잠시 잠깐씩 누리게 되는 기쁨들은,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을 밟고 누리는 기쁨인지도 모릅니다. 나의 성공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실패 위에서 얻게 된 성공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세상 속에는 기쁜 일이 더 많습니까? 슬픈 일이 더 많습니까?

슬픈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슬픔이 많은 세상을 살아온 우리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동하고, 또 슬픈 영화나 슬픈 드라마에 정이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히 성공한 사람'이란 없습니다.

오늘의 성공자도 내일의 실패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행복한 사람도 내일은 불행해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기쁨을 누리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무소유, 무 욕심 등등 탐욕을 버림으로 기쁨을 느끼려고 합니다. 이렇게 살면 최소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는 주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 자신의 욕심과 탐욕은 비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운 공허한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텅 빈 마음에 공허와 허무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상황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지므로 기쁨을 느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탐욕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로운 삶을 살므로 기쁨을 느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에게,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에게 의로움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이 의롭게 살아보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것은 종교개혁 자 루터의 경험이었고, 사도바울의 경험이었고, 우리들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타협점을 찾아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나는 누구보다는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누구보다는 의로운 사람이야. 라고 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일을 통해서 기쁨을 느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치 일에 미친 사람처럼 그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 하고 있는 일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고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 기쁨을 느끼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결국 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절망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생이 짧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철이 들어서 무엇인가를 좀 해 보려고 하면, 벌써 나이 들고, 늙고, 병들어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인생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세월은 날아간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궁수가 화살을 당겼다가 놓으면 그 화살이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듯이, 그렇게 한번 날아가고 끝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습니다. 두 번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호롱불을 켜고 살았습니다.

호롱불은 언제까지 빛을 내고 주변을 밝혀 줍니까? 그 호롱 안에 들어있는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입니다. 기름이 떨어지면 호롱의 불은 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개개인에게 주신 생명의 기운이 다하게 되면 우리는 죽게 됩니다. 때로는 기름이 남아 있어도 호롱불이 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사람이 입김으로 훅 불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 입의 기운으로 훅하고 부시면, 우리에게 생명의 기운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우리는 죽게 됩니다.

 

사람은 인생의 끝에 너나 할 것 없이 그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시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우리는 이런 때가 우리에게 찾아 오면 반드시 그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종착지에 이르게 되면 아쉬움과 후회만 남습니다.

어떤 후회를 하게 됩니까?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성공을 위해 살아온 삶을 후회하게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한 줌도 되지 않는 명예를 위해 살아온 삶을 후회하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과 같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재물만을 위해 살아온 삶을 후회하게 됩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 서게 되면 밀려오는 것은 허무함뿐입니다.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 모든 것이 실상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 안에 참 기쁨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참 기쁨은 없습니다. 영원한 기쁨은 없습니다. 순간순간 느낄 수 있는 순간적인 기쁨, 일시적인 기쁨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들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쁨의 서신이라고 부르는 빌립보서를 보면, 그 앞부분에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구원의 은혜를 기록하고 난 후에, 그 뒷부분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누리며 살게되는 기쁨 삶에 대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3:1입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4:4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이 세상 속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주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기쁨을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바울이었기에 그는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도 나와 같이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어떤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여기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다면, 지난 20년 동안 한결같이 이 일을 해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간 우리를 낙심시키고 우리를 좌절시키려는 일들도 여러 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시고, 다 아시고 계시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지내왔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베풀어주셨던 다양한 은혜들이 우리로 하여금 여기까지 믿음으로 걸어오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씩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하나님 저 좀 봐주세요. 하나님 저의 처지와 형편, 제 마음과 제 뜻을 아시지요.’라고 기도하게 될 때, 우리는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다 보고 있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우리를 무엇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어떤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까?

둘째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제가 과거 어떤 교회에서 청년들을 가르칠 때, 저녁 예배를 드리고 교회 부설 장애인 재활 작업장에 가 있다가 늦은 시간에 집으로 가기 위해 작업장을 나섰습니다. 제가 걸어가고 있는 그 길가 앞에 세워진 그랜저 승용차에, 어떤 술 취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타고 있었습니다. 그 술 취한 사람은 뭐가 그렇게 기쁘고 즐거운지 호기를 부리며, 거드름을 피우며, 그 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랜저가 고급 승용차였습니다.

그런 차를 운전사까지 두고 타려면 아마 그 사람은 부자였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기뻐하였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 하던 사업이 잘되어서 그렇게 술을 먹으며 기분을 내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고 있는 제 마음속에 영적인 안타까움과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속에 저 사람 불쌍하다.’ ‘저 사람 지옥 가는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승용차를 타고 사라진 그 사람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너무 커서, 저는 승용차가 사라진 어두컴컴한 도로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하나님 저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던 일이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그 사람이 저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날도 삶이 너무 기뻐서 혼자 걷지 못할 정도로 술을 먹고 취해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 비하면 저는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속에는 그 사람과는 다른 기쁨, 즉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있다는 믿음이 가져다 준 구원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을 때도 예수 믿고 구원받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지금 누리며 사는 이 기쁨은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누리게 될 기쁨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 기쁨을 이 감사함을 충만히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어떤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까?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기쁨도 있습니다.

 

제가 처음 교회 나간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더니, 6개월 되었을 때 교회에서 청년 구역장을 맡기더라고요. 그래서 청년 구역장으로 여러 해 섬긴 일이 있습니다.

 

당시는 마포구서대문구, 은평구가 한 교구였습니다.

보통 때는 각각 구역별로 예배도 드렸는데, 일 년에 한두 번씩 함께 모여 연합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마포 어느 미용실에 연합구역예배를 드리려고 간 일이 있습니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자매는 구역예배를 위해, 일찍 미용실 문을 닫고, 깨끗하게 청소해 놓은 후에, 식빵으로 토스트를 구우면서 우리를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토스트로 간단한 요기를 하고 연합 예배를 드리고 헤어졌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어떤 형제가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예배를 드리려고, 이 바쁜 연말에 마포까지 와서, 저녁도 먹지 못하고 가야 하느냐?’라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형제가 그래도 그 정성이 얼마나 대단하냐? 예배를 위해 일찍 미용실 문을 닫고, 청소까지 해 놓고, 토스트를 구우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느냐?’라고 하면서 다툼이 생겼습니다.

 

제가 볼 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그렇게 다투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차를 타러 걸어가면서 그 두 사람을 따로 만나 화해시켜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광화문 버스 정류장 앞에서 각자 집으로 가기 위해서 헤어질 때는 그 두 사람이 화해의 악수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화해하고 돌아가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해서, 두 사람이 화해할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제 오른쪽 위에서, 마치 파워포인트에서 글자가 날아오듯이 그렇게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제 가슴 속으로 날아들었습니다. 그러자 제 마음속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나는 기쁘다.’라고 막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전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그날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면 받게 되는 이 기쁨을 전해주고 마음이 불같이 솟아 올라왔습니다.

 

그때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차 안에서 전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전도하다가 순교까지 하는지.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계속 기도하며 갔습니다.

하나님 이 차를 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주시고,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하늘 기쁨을 알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가져다준 그 기쁨은 그날 집에 가서도 계속되었습니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 기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동안 이 충만한 기쁨 속에서 살았습니다.

 

말씀이 주는 기쁨을 이야기하려면 너무나도 많습니다.

저는 설교자가 되려고 해서 그랬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게 되는 기쁨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시는 기쁨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어떤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까?

넷째는 천국과 영생에 대한 소망이 주는 기쁨도 있습니다.

 

빌립보서가 기쁨의 서신이라면 베드로 전후서는 소망의 서신입니다.

이 소망에 대해 베드로전서 1:3-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해 하늘에 예비해 놓으신 산 소망이 성도들의 기쁨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천국 소망이 있는 성도들은 그 삶에 어느 정도의 어려움이 닥쳐와도 쉽게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장차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생각하며 그 당하는 고난과 아픔을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주신 이 산 소망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참 기쁨을 느끼며, 영원한 기쁨을 느끼며,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기쁨이 얼마나 큰지 하박국 선지자는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을 다 잃고서도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찬양하고 기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어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기쁨이 얼마나 큰지 저희 곡식과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나는 더 기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10절 말씀을 보면 천사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해 주려 왔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기쁨은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압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마음으로 으로 느낄 뿐 아니라, 때로는 육체로 느낄 수 있도록 임하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머리 위에서 물을 쏟아붓듯이 그렇게 임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 차오르듯 차 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파도처럼 밀려와서 우리 마음과 영혼을 기쁨으로 뛰놀게 하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젊어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빛을 받으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젊어 보이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 기쁨을 소유하고, 어떤 처지 어떤 환경 속에 살고 있든지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

 

하나님은 왜 이런 기쁨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살 때, 세상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도전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로마 군인들과 함께 착고를 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어쩔 수 없이 바울의 모든 삶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로마 군인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그중에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요?

바울이 말하는 달변에 설득되었을까요? 바울이 행한 기적을 보아서일까요? 아니면 바울이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해서일까요?

 

그 이유는 바울이 감옥이라는 극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소유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감옥생활을 했고, 기쁨으로 자기를 지키는 군인들을 대하였으며, 기쁨으로 불편한 감옥생활도 감사하며 살도록 했습니다. 바울이 믿음 안에서 누리며 살았던 이 기쁨은, 바울로 하여금 절제된 삶을 살게 했고, 규모 있는 삶을 살게 해 주었으며, 말 한마디를 해도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하며 살게 했습니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이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기뻐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에서도 늘 기뻐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바울의 모습은 다른 죄수들과 극명하게 비교되었습니다.

 

이렇게 산 바울의 삶이 그를 지키는 로마 군인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복음에 관심을 갖게 해 주고, 결국에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구원의 역사는 바울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삶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들도 바울과 같이 이 세상에서 기쁨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를 위해, 복음을 위해, 남은 생애를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의 기쁨을 주신 이유이고,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관계없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기쁨을 찾으며 살아오셨습니까?

세상에서 기쁨을 찾아오셨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아오셨습니까? 이 세상에는 참 기쁨이 없습니다. 참 기쁨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안에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천국의 소망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고 살아가면, 그런 우리의 삶을 보고 우리 가족, 우리 친척, 우리를 만나는 이웃 사람들, 도전을 받고, 경계를 받아, 그들도 결국에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 기쁨을 주심으로 이루어 가시는 은혜의 역사, 구원의 역사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은혜로, 능력으로 나타나게 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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