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하지 말라
마태복음 7:1-5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마태복음 5장-7장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산상설교를 통해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세 가지 관계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5장에서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부분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삶, 하나님께서 그 자녀 된 우리들에게 살아가기를 기대하시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교정을 하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판’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 ‘크리노’는 사실 ‘비판’ 보다는 ‘판단’이라고 번역되어야 할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법정에서나 혹은 사적인 판단에 쓰였던 말입니다. 그러므로 1절은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판단하지 말라.’로 번역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크리노’라는 단어를 ‘비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비판과 판단의 차이점 때문입니다. 비판은 비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판단은 분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판단하기는 해도 비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비판은 상대방을 비난하는 행위이고 이런 삶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를 만나든지 비판하고 비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누구를 비난한 일이 있습니까? 심지어 자기를 따르던 제자의 손에 의해 팔리실 때에도 그런 배은망덕한 제자를 비난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중 그 어느 누구가 자신들에게 박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저주한 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이 주신 말씀에 따라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그 자신이 죄와 무관한 삶을 살므로 자신들은 죄에서 구원 받은 자임을 세상에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곧 죄로부터 구원받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전에 죄의 종 되었을 때와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새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비판하기를 잘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정치인들입니다. 정치인들에게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은 자기와 견해가 같은 사람이면 감싸주려고 하고 자기와 견해가 다른 사람이면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비판하고 정죄하고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비판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판 잘하는 것을 무슨 특권인양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정치인과 그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사자나 곰 독수리와 같은 짐승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치인들을 어떻게 보시는지 이 세상 권력을 어떻게 보시는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로마서 7: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비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본질적으로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상습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7:1절에 나오는 ‘비판’은 ‘판단’을 오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을 ‘판단’으로 해석하고 본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비판에는 비난의 의미가 있고, 판단에는 분별의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에게 판단하지 말하고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악을 판단하지 말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고,’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판단하고 분별하지도 말라.’라는 말씀입니까?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냉철한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력을 가진 성도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두 가지 오류에 빠집니다.
하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해서 아무 일에도 관심이 없는 무관심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악의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왜 예수를 믿는지 믿음을 가진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믿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형태는 소금인데 먹어보면 아무런 맛이 없는 소금입니다. 이런 소금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해서 진리가 아닌 거짓에 미혹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왜 이단이 극성을 부립니까?
왜 예수를 오래 믿고 있다가 이단에게 미혹을 당합니까? 그것은 그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굳게 서지 못하고 미혹당한 것입니다.
성경은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을 때 그 극적인 회심과정을 세 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이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바울이 예수님께 물었던 질문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주여 뉘십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그 신앙에 대상에 대한 질문입니다. 둘째는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그러면 믿음을 가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가 견고한 신앙 위에 서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확실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만 확실하면 우리는 분별력 있는 성도가 될 수 있고 이단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신앙이 확실한 사람들은,
① 자신도 사람이기 때문에 늙어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내가 보혜사다.’라고 거짓말 하는데 넘어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다. ② 성경에는 한국이라는 지명이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있는데 우리나라 과천이 앞으로 신천신지가 될 것이라고 한다고 믿겠습니까? ③ 또 거짓된 방법으로 상대방을 속여서라도 성도들을 유혹하라고 하는 사람들, 그래서 교회를 통째로 삼켜 버리라고 가르치는 그런 불의한 집단을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먼저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이 세상에서 살 때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0:16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한편으로는 비둘기 같이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뱀 같은 지혜로움을 가지고 있어서 바르게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7:24절 말씀을 보면 너희는 판단을 하되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오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판단하지 말라.’
우리는 이제까지 그리스도인에게는 바른 판단력이 바른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마태복음 7:1절의 말씀을 보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2절입니다.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가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첫째, 이 말씀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교에서 졸업식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줄을 서서 차례로 나와서 졸업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졸업식이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던 한 축하객의 눈에 확 뜨인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학생이 한 손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총장이 주는 졸업장을 한 손으로 받는 것입니다. 졸업장을 받고 난 후에 총장과 악수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축하객은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졸업장을 받으면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받는 학생, 총장과 축하의 악수도 안하는 그 학생을 보면서, ‘이 학교는 4년 동안 도대체 무엇을 가르쳤단 말인가?’ 라고 하며 어처구니 없어했습니다.
그 때 그 옆에 앉아 있던 한 재학생이 이런 말을 말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저 분은 사고로 한 팔을 잃고 대신 의족을 하고, 4년 동안 훌륭하게 학교를 다닌 학생입니다.’ ‘그래서 늘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고, 악수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축하객은 그냥 보이는 대로 판단했던 일을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면서 그 나타난 행위만 보고 판단을 하면 그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도리어 우리가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상대방을 잘 압니까? 우리는 상대방을 잘 모릅니다. 심지어 한 집에 사는 남편에 대해 아내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한 집에 사는 자녀들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이 시대가 비판적인 시대이고 이 시대 지성인들의 상징이 비판능력에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판단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떠나야 합니다. 상대방을 모르면서 하는 우리의 판단은 그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판단은 대부분이 잘못 판단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판단해서는 안 됩니까?
마태복음 7:3절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둘째, 이 말씀은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가진 대부분의 생각은 나는 상대방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 나는 의로운데 너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정의감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합니다.
- 나는 선한데 너는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 독선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합니다.
- 나는 너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이 우월감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합니다.
사무엘하 12장 말씀을 보면 어느 날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죄인인 한 사람을 고발하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발을 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한 성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은 사람이었고 가난한 사람은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가 그 재산의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 암양 새끼를 마치 가족처럼 딸처럼 생각하며 의지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의 집에 손님이 찾아와서 대접을 해야겠는데 자기 집에 있는 소와 양을 아껴서 잡지 아니하고 그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빼앗아다가 자기 집에 온 손님 대접을 했다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 왕에게 ‘왕의 나라에 이런 사람이 있는데 어떤 하실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다윗 왕은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의분을 느끼면서 ‘내가 통치하는 나라 안에 어떻게 그런 나쁜 사람이 있는가? 자기가 부자라고 가난한 사람을 그렇게 멸시할 수 있는가?’라고 하며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며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라고 사형 판결과 또 ‘그 사람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대로 그 가난한 사람에게 네 배의 배상을 해 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배상판결을 내려 주면서 나단 선지자에게 ‘그 사람이 누군지 내게 알려 주시오. 내가 군대를 보내 그 사람을 당장 잡아 오도록 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을 바라보며 ‘왕이여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라고 하면서 왕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죄에 대해 소상하게 말해주었습니다.
다윗 왕이 왜 분노하며 ‘내가 통치하는 나라에 그런 나쁜 사람이 있다니,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판단했습니까? 자기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나단선지자가 지목하는 그 죄인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복음 전도자 무디가 어느 지역에서 전도 집회를 앞두고 있었을 때 그 지역에 있는 어떤 신문에 무디를 악평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신문에서는 무디는 자신을 복음 전도자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 보았더니 무디가 거기 있더라. 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부족하였든지 각종 거짓말로 무디가 나쁜 사람이라는 혹평을 담은 기사를 썼던 것입니다.
곧 전도 집회를 해야 하는데 지역 신문에서 이런 기사가 나갔으니 어떻게 집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무디의 수행비서가 길길이 뛰면서 무디에게 그 거짓된 기사를 쓴 그 기자를 고소하자고 했습니다. 그 때 무디는 ‘쉬,’ ‘조용히 하세요.’ 그러면서 그 수행비서의 귀에다 대고 ‘사실 나는 이 신문에 난 기사보다 훨씬 더 악한 자입니다.’ ‘그러니 조용하세요.’ ‘그리고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집회 준비나 하세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7:3절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왜 사람들이 상대방을 판단한다는 것입니까? 내 자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상대방의 작은 실수 작은 죄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상대방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눈 속에 들보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상관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자기 자신의 큰 죄악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날마다 회개의 눈물로 침상을 띄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때 쓴 것이 바로 시편 51편입니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쫒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다윗이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한 후에 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왕성을 버리고 야밤도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사울왕의 친족 시므리라는 사람이 반란을 피해 도망가는 다윗 왕을 따라오면서 ‘피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이제 네게 갚으시기 위하여 이제 나라를 압살롬에게 넘기신 것’이라고 저주를 하며 왕을 수행하여 가고 있는 신하들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이 때 다윗 왕의 신하가 저 저주하는 개의 머리를 베어버리게 허락하기를 청합니다.
이 때 다윗 왕은 자기의 죄를 알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로 나를 저주하게 한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지은 죄를 아파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합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데 내게 행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그 작은 죄를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눈 속에 들보가 있는 것을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모르는 사람들만 다른 사람들의 작은 죄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판단해서는 안 됩니까?
셋째, 바른 믿음에 서 있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중적인 존귀함이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세계에 속한 존귀함이 있습니다. 둘째는 복음을 통한 구속 안에서의 존귀함이 있습니다. 창조세계에 속한 존귀함은 오직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실에서 기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 하나님의 존귀하신 형상을 함께 소유한 존재로 창조된 것에 근거합니다. 복음 안에서의 존귀함은 사람이 비록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는데서 기원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 기업의 상속자가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믿음 안에 서 있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이런 은혜를 자신이 입고 살고 있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이중적인 존귀함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세상적인 작은 차이와 작은 실수들을 가지고 그 존귀한 사람을 쉽게 판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2장을 보면 어느 날 두 사람이 교회에 동시에 새로 나왔습니다.
한 사람은 높은 지위에 있는 부자였으며 다른 한 사람은 막노동을 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교회 성도들이 그 부유한 사람에게 가장 종은 자리를 권하여 앉게 하였고 가난하여 목욕도 하지 못해 냄새가 나는 그 사람에게는 저 신발장 앞에 가서 앉으라고 했습니다. 교인들이 이렇게 판단을 한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권세와 부가 기준이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이 교회 성도들은 이런 행위를 통해 성도들의 우열이 세상 권세와 그 가진 물질로 구분된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까? 저 같은 목회자로 말하면 그 섬기는 교회가 얼마나 큰가? 얼마나 성도들이 많은가? 로 목회자의 우열을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증거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믿고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그 권세 영화가 다 그 사람의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신 이 복과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가지고 사는 지위와 재물 중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실 하늘의 복과 이 세상 속에서 누리며 사는 복은 비교 대상도 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는 하늘의 복에 비하면 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 모든 복들은 들에 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풀은 곧 마르고 꽃은 곳 시들어 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가 말씀하고 있는 이 교회 공동체 성도들은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그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까?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사람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믿음 안에서 그 눈이 열려서, 첫째,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사람들의 존귀함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둘째,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존귀함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하찮은 세상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하늘의 기업을 유산으로 받게 될 존귀한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화 장발장을 보면 장발장은 빵 한 조각 훔쳤다는 이유로 19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출소한 후 친절한 미리엘 신부의 도움으로 성당에서 하루 밤을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살아갈 길이 막막했던 장발장은 성당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다가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경관이 : 주교님은 잃어버린 식기를 찾았습니다. 이 자가 가지고 있더군요. 주교님이 주셨다던 데요.
미리엘 주교 : (내용물을 확인한 뒤) 그의 말이 맞네. 그런데 서둘러 떠나느라 정신이 없었나봐 은촛대를 잊었더군. 이것이 가장 값이 나가는 것인데.
미리엘 신부는 은촛대를 장발장에게 줍니다. 이것을 보고 있는 수녀들은 할 말을 잊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미리엘 신부 : 경관 이 사람을 풀어주게. 이자는 진실을 말했어. 기억하게 형제여 높디높은 분의 뜻을 따라 이 귀한 은 식기로서 새 사람이 되게나.
미리엘 신부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한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미리엘 신부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장발장을 단순한 죄인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기물을 도둑질해가지고 간 좀도둑 장발장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의 귀한 기물들을 준 것입니다.
미리엘 신부가 가진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은 모든 일의 판단과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내가 할 일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랑해 주고 도와주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로마서 12:19-20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미리엘 신부는 죄인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월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의무는 하나님을 권한을 월권하여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의 말씀처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좀도둑 장발장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가 그 불쌍한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선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미리엘 신부의 관점이 장발장을 완전히 새 사람으로 바꿉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관점이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이런 관점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이 보신 것도 이 여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셨고 결국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과 관점을 아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기준으로 이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죄인을 판단하고 죄인을 심판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판단하는 사람을 성경은 외식하는 자라고 합니다.
5절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외식이란 단어는 아테네의 축제였던 디오니시우스 축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말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봄 축제 때 가면을 쓰고 축제에 참여했습니다. 가면을 쓰고 마치 그 가면을 쓴 사람인 것처럼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런 행동에서 위선자 두 입술을 가진 자 외식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외식은 무엇입니까?
본마음에는 없는 것을 있는 척 하는 것도 외식이며, 본마음에는 있는 것을 없는 척 하는 것도 외식입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외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눈 속에는 들보 같은 것이 들어 있는데도 그것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들어있는 티를 가지고 문제 삼는 행위를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 외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죄인 중에서도 외식하는‘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례적으로 화를 선포하십니다. 마태복음 24:51절을 보면 외식하는 자가 받을 벌은 지옥 형벌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외식하는 자가 받을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먼저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자가되어야 합니다.
5절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성경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판단했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고 자신의 죄인 됨을 판단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디모데전서 1:15절에서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베드로는 누가복음 5:8절에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사야는 이사야 6:5절에서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판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를 판단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판단하심을 그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를 판단하지 않을 때에는 우리가 판단하지 않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이런 내용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면 스스로 자기 죄를 판단하였던 세리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고 내려갔고 스스로의 그 죄를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던 행위들을 가지고 기도했던 바리새인은 하나님에 의해 그 외식을 위선을 판단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자기를 돌아보고 늘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그 현장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장차 올 심판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죄는 장차 심판의 날에 심판되기 위해 유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스스로를 먼저 판단한 사람이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 주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5절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바울은 어떻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주는 자가 되었습니까?
디모데전서 1:16절입니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자신이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면서 또 구원 받은 성도들이 살아야 할 삶의 모델이 되어 주고 본이 되어 주고 거울이 되어 보여 주는 삶을 통해서 다른 성도들이 그 스스로의 티를 빼게 해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도 자기 죄를 깨닫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통해 죄 사함을 경험하고 또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빌라도의 뜰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죄를 용서받고 난 후에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고 실족한 성도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등 티를 빼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도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은 그 죄를 용서 받은 후 기록한 시편 51:13절의 말씀 즉 ‘내가 범죄자들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라는 이 고백도 티를 빼주는 삶에 관한 고백입니다.
이사야도 스랍이 그 입에 가져다 대어 준 숯불을 통해 그 죄를 사함 받고 난 후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항 갈꼬’ 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면서 자원한 사명도 바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티를 빼주는 사명이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자기 자신을 바르게 판단하는 자가 되면 장발장에 나오는 미리엘 신부 같이 예수님과 같이 제자들과 같이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들도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먼저 자기를 판단한 사람은 올바른 판단으로 절제된 성도의 삶들 살 수 있게 됩니다.
6절에서는 올바른 판단으로 사는 절제된 삶은 어떤 삶이라고 합니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는 삶,’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 주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절제된 삶은 어떤 삶입니까?
먹은 것을 토해 내고 그것을 다시 먹는 개에게는 거룩한 것이 어울리지 않고 또 돼지같이 지저분한 동물에게는 진주가 어울리지 않듯이 매일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나 매일 매일 같은 죄를 반복적으로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죄인들에게는 구원의 확신이나 천국의 소망이나 성령의 은사와 열매 같은 것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잘못하면 거룩한 것의 가치를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진주의 가치를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그것을 발로 밟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자신들에게 전해 준 제자들까지 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얼마나 절제된 삶이 필요한지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첫째,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그 사람을 판단해서난 안된다고 합니다.
둘째, 나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모르면서 상대방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셋째, 바른 믿음에 서 있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하는 사람을 성경은 외식하는 자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먼저 자신을 판단하는 자가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둘째, 먼저 자기를 판단한 사람이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셋째, 먼저 자기를 판단한 사람이 올바른 판단으로 절제된 삶들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이런 성숙된 성도의 삶에까지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므로 먼저는 거룩한 판단과 절제된 삶 위에 우리 자신의 신앙과 삶을 세워 나갈 뿐 아니라 또 거룩한 판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견고히 세워나가는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수준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세상 앞에서는 수준 있는 자녀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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