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8. 11. 9. 13:03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요한복음 3:16

 

이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번 일본에서는 지진이 나서 많은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무너진 건물 잔해 밑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 생존해 있는 사람들을 찾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의학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먹고 마시지 않고 살 수 있는 기간은 3일에서 1주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0일이 지난 후에는 생존자 구조를 포기하고 무너진 건물더미를 치우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건물 더미를 치우던 한 인부가 어린아이 울음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정밀한 탐사를 해 본 결과 그 바닥 바로 아래에 어린 아이가 살아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어린 아이를 구출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구조대가 그곳에 이르러 보니 그곳에는 아기와 엄마 두 사람이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죽고 아기만 살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사람들은 아기가 어떻게 그때까지 살아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기의 엄마는 무너진 흙더미에 한쪽 다리가 깔려 꼼짝도 못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엄마는 그런 고통 중에도 자기 아기를 살리기 위해 자기 손가락을 물어뜯어서 아기의 입에 물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는 엄마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먹고 탈수를 면하고 구조될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는 죽더라도 아기만은 살려야겠다는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 자기 희생적인 어머니의 사랑이 그 아기를 살린 것입니다.

 

6.25 전쟁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본대와 떨어져 후퇴하던 한 미군병사가 소변을 보기 위해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리 아래쪽에서 나는 아기울음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 병사는 소리가 나는 다리 아래쪽으로 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팔꿈치를 땅에 대고 마치 기도하는 모습으로 얼어 죽어 있었고 그렇게 얼어 죽은 그 여인의 품 안에서는 이 여인의 옷에 겹겹이 싸여 있는 어린 아기가 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미군 병사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날씨에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얼어 죽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기는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죽어간 그 여인의 놀라운 사랑에 감동되어서 그 아기를 데리고 가서 나중에는 양자로 삼아서 그 어머니의 자기희생적인 사랑 이야기 해 주면서 정성껏 키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르는 손양원 목사님은 어떻습니까?

손양원 목사님에게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손동인, 손동신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순 반란 때 공산당이었던 안재선이라는 청년이 그의 두 아들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는다고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그 청년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손 목사님은 이렇게 극심한 마음의 혼란 속에서 두 아들의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장래 후 설교 준비를 하다가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손 목사님은 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됩니다. 자신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성도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설교를 할 수 있겠느냐? 라는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손 목사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원수를 사랑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을 정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용서하고 법원에 선처해 줄 것을 바라는 탄원서를 올리고 나중에는 그 청년을 양 아들로 삼아서 두 아들의 끝 이름을 따서 손인신이라 이름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친 아들보다 더 극진하게 사랑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사람들의 영웅적인 사랑보다 더 놀라운 사랑이 있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이 죄인 된 인간을 사랑하신 사랑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을 통해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요한복음 3:16절 말씀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첫째, 죄악 된 세상을사랑하신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

 

이 세상이 보여주고 있는 사랑과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그 모든 사람들이 보여준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그 사랑은 자기와 관계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고, 자기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한 어머니가 자기 손 끝을 물어뜯어서 아기가 탈수를 면하고 살 수 있도록 한 자기 희생적인 그 사랑도 그 아기가 자기가 사랑하는 아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랑이었습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날씨 속에서 아기가 얼어 죽지 않도록 자기 옷을 벗어 덮어주고 자기는 벌거벗은 몸으로 얼어 죽어갔던 그 여인의 사랑도 자기의 사랑하는 아기를 살리기 위해 이루어진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아서 사랑한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이 사랑은 손양원 목사님 안에 있었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의 괴수 같았던 자기를 사랑해 주셨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었던 목사님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랑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인간인지라 혹시 그 두 아들을 죽인 양아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까봐 늘 그 아들을 앞에 두고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대상만을 사랑합니다. 이런 세상 사람들의 사랑에 대해 성경은, 너희 중에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너희 중에 자녀가 고기를 달라고 하면 전갈을 줄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비록 악한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주길 원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사람들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사랑받을 만한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는 우리들을 사랑해 주신 이타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달라서 의인과 죄인을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하시지 않으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관계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이 동인이 되어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점입니다.

세상은 상대방이 사랑받을 조건을 갖추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를 보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조건은 하나도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본능 안에 있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햇빛을 주시는 사랑으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려 주시는 사랑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완전하신 사랑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점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종종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가진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이런 부모의 사랑은 조건에 매이지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의 사랑을 통해 설명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안에 사랑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사랑의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조건이나 형편을 따지지 않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사랑의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꾸 사랑할 외적인 조건이나 형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성도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5:2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죄와 완전히 떠나 계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살았던 에녹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도 역시 아담 안에서 죄 아래 팔려 죄의 종으로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에녹이 가지고 있었던 조건을 따지시는 분이셨더라면 에녹을 사랑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님께서 죄 아래 팔려 살아가는 에녹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에녹을 사랑하시고 300년 동안 에녹과 동행해 주셨습니까? 그 이유는 에녹의 조건을 보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본성이 사랑이신 하나님 자신의 사랑으로 에녹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일생을 함께 살 배우자를 구할 때 어떻게 구합니까?

그 사람이 살인하고 강도짓을 하고 각종 죄와 악을 행하며 사는 사람이라도 관계없다고 하며 구합니까? 아닙니다. 자기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모든 일에 자기와 함께 해 줄 수 있는 믿음이 가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친구를 사귀게 될 때 어떤 사람을 친구로 사귑니까?

늘 나에게 사기치고 나를 이용해 먹고 내 이름을 팔아서 내게 막대한 금전적인 손해를 끼칠 그런 사람을 친구로 사귑니까? 아닙니다. 서로 서로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나의 약점까지도 용납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친구로 사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300년 동안 동행해 주신 에녹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아담의 죄 아래 팔려서 죄의 종으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에녹을 사랑하시고 300년이란 긴 세월동안 사랑하며 동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의 기준을 버리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에녹과 같이 자기 자신을 낮추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시고 에녹을 사랑하시고 또 300년 동안 동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놀라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24절 말씀을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에녹을 사랑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300년 동안 동행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에녹을 죽지 않은 그 상태로 하늘로 데려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은 이 세상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간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에녹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죽지 않고 하늘로 휴거하게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한 실 예로 삼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에녹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에녹을 이 땅에 그냥두지 않으시고 하늘로 데리고 올라 가셨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까? 에녹을 이 땅에 그냥 두시지 못하셨던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우리는 이 큰 사랑을 예수님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15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에녹을 세상에 두지 않으시고 하늘로 데려가실 수밖에 없으셨던 그 사랑을 잘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이 사랑을 전재로 하고 나도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그 본심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에녹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신 것처럼 자기 제자들을 모두 하늘로 데려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제자들을 이 세상에 남겨 두고 가셔야 하는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은 이 세상에 남아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는 이런 나의 마음을 아시고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주시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예수님의 큰 사랑 안에서 보호받으며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시험에 들지 않고 믿음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예수님의 기도 덕에 우리는 모든 시험들을 이기고 믿음에 굳게 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이런 기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가롯 유다가 시험에 들어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넘겼듯이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시험에 들어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했듯이 우리들도 벌써 시험에 들어서 자빠지고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 중 누가 내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나약한 우리가 신앙 안에서 확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한번 택하시고 부르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책임지고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오늘도 이렇게 믿음에서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는 사랑을 성경은 우리가 우리 눈동자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에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2: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치 자기 눈동자 같이 지켜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7:8절입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마치 사람이 눈동자를 지키듯이 그렇게 지켜주셨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2:8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니라.” 스가랴 선지자는 이방에 포로가 되어 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범하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고도 살아남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이것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또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둘째, ‘이처럼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되 이처럼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이처럼이런 방식으로’ ‘이렇게’ ‘이만큼 이라고 번역 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너 엄마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니 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대부분 손을 휘두르면서 이 이만큼 혹은 하늘만큼 땅만큼 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이 때 아이가 이만큼 혹은 하늘만큼 땅만큼 이라고 대답하는 말이 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이가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의 이처럼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아이들이 그 부모를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으로 사랑하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 3: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랑의 주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사랑은 사람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차원의 이루어지는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차원에서 하실 수 있으신 최고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존재방식도 다르고 차원도 다릅니다.

우리는 피조물로 존재하고 하나님은 창조주로 존재하십니다. 또 우리는 3차원의 물질세계에 속하여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4차원의 영적 세계에 속하여 살아가십니다. 그러므로 3차원에 속한 우리들은 우리보다 한 차원 높은 4차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4차원의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를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3차원의 물질세계에 속하여 살았던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계신 4차원의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고백이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12:4절입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뜻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3차원의 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인간의 언어로는 4차원의 영적세계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 존재방식이 다르고 그 존재하는 차원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복음 3:16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이 사랑은 인간 차원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 차원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만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 하나님 차원의 사랑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랑을 조금 맛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경험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우리들인 것입니다.

 

- 아벨을 보십시오.

창세기 3:15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알았기 때문에 이 사랑을 몰랐던 가인보다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사를 열납 하신 것입니다.

노아는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달리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노아가 경험했던 여호와의 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노아는 복음의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노아는 자신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과 눈 속에서 사랑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가 하나님께 받았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께서 그 어떤 말씀을 하셔도 그것은 사랑에서 하시는 말씀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바다에서나 유용한 배를 산위에서 만들라고 해도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공의의 눈으로 우리들을 보았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가치 있는 존재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범죄한 우리를 향해 진노를 쏟아 붓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하였어야 할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보실 때 공의의 눈으로 보시지 않고 사랑의 눈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만 이 사랑을 알고 누리며 삽니까?

아닙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범죄 하는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의 눈으로 그 백성들을 보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그 죄와 허물을 계속해서 용서해 주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놀라우신 사랑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시자 그 하나님의 눈에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아벨이 보였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노아가 보였고 또 오늘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예배드리는 우리들이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들도 구약의 성도들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 관심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사랑이나,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놀라운 사랑은 정말 이해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수 있으신 최고의 사랑으로, 하나님 차원의 사랑으로 사랑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셋째, ‘독생자를 주시면서사랑하신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 다고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말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 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볼펜 한 자루를 사고 과자 한 봉지를 사도 다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귀한 구원이라면 어떻게 공짜로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만약 구원이 장사꾼들이 경품을 나누어주듯이 그렇게 공짜로 막 나누어주는 것이라면 그 구원은 아마 가치가 없는 것일 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구원이 가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공짜로 나누어 줄 바보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정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공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공기를 돈 주고 사서 숨 쉬는 사람이 있습니까?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한 물은 어떻습니까? 누가 물을 주신 하나님께 돈을 주고 그 물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 저 하늘에게 지구를 비쳐주고 있는 태양은 어떻습니까? 단 하루라도 태양이 없으면 지구상에 동식물들은 다 죽습니다. 태양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 태양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살지만 그 어느 누구하나 태양에너지를 사용하는 값은 내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인류 생존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탕을 만드는 것이 더 어렵겠습니까? 인류생존에 꼭 필요한 저 태양을 만들어 하늘 위에 걸어 두는 것이 더 어렵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볼 때에는 사탕 한 개는 그냥 얻어먹어도 태양을 사용하는 값은 내고 살아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별 가치 없는 사탕 한 개는 돈을 주고 사면서 과자 한 봉지는 돈을 주고 사면서 참 가치 있는 물과 공기와 태양은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 이런 것들의 가치를 따져서 그 대가를 다 지불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는 아주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값진 것일수록 우리로 그 대가를 내지 않고 공짜로 사용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짜로 주시는 공기, , 태양이 가치 없는 것이라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구원이 비록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수고도 하지 않았는데 공짜로 주어지는 것 아무런 할 일이 없는데 거주 주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치루신 값은 엄청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기 위해서 창조주이신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시는 대가를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하신 그 대가는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에서 우리의 죄의 값이 100데나리온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치러 주신 그 값은 일만 달란트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하나라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하나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죄의 수천 배 혹은 수만 배나 되는 대가를 치루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진다고 해서 그 구원을 싸구려 구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구원의 은혜를 알고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간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은혜로 그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두 부류로 갈리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고 병 고침을 받았던 그 때는 열광하며 따르다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고난이 닥쳐 올 조짐이 보이는 공생애 말기에는 다 예수님을 모르는 척 다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이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를 입고 난 후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 예수님을 평생 믿고 따르고 섬기며 살았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믿고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살면서도 그 은혜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은 그 고쳐주신 10명의 문둥병자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10명의 문둥병자가 다 고침을 받았지만 사례하려고 돌아온 사람은 사마리아인 한 사람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저는 우리 모두가 늘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리고 사는 이 은혜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라는 것을 알고 믿고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로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게 베풀어주신 것임을 아는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더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우리가 요한복음 3:16절 말씀을 통해 살펴본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할 가치가 없는 죄악 된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이며,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사랑으로 사랑하신 사랑이며 독생자를 내어주시면서 까지 사랑하신 크고 놀라운 사랑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렇게 사랑하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에 대해 요한복음 3:16절 하반절의 말씀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그렇게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바로 예수를 믿고 오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나를 향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함으로 우리 삶에 그 어떤 어려움과 고통과 고난이 다가올지라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그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맞서 나가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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