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갈라디아서 5:16-26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갈라디아서의 말씀에서는 성령이 우리들에게서 맺어 가시는 열매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서는 성령이 맺어가는 열매에 대해 잘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잘 정의된 개념은 우리의 언어생활과 의사소통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성령이 우리들에게서 맺어 가시는 열매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나 이렇게 잘 정의된 개념일지라도 그 정의된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보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등등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개념의 정리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선행적인 이해를 가지고 성령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1.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생사를 가르는 기로에 섰을 그때에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면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는 사람에게 여전히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요? 재물일까요? 아니지요. 해박한 학식일까요? 아니지요, 천재적인 재능일까요? 아니지요. 사람이 죽음의 문턱 앞에 다다르게 되면 이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그 순간에도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의 참 가치는 서로 사랑하는 삶에 있으며,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로 존재하며 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서로 사랑하는 삶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31절 말씀에서는, ‘인생살이에서 가장 좋은 길’ ‘인생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며 사는 삶’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사랑 장인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이 사랑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은 ‘헤 아가페’ 즉 ‘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내용은 보면 13:1-3절에서는 우리의 말보다, 은사보다, 능력보다, 믿음보다, 선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이며, 더 나아가서는 이 모든 것들 보다 우선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말을 해도, 능력을 행하여도, 믿음으로 살아가고, 선행을 행하며 살더라도 먼저 이 사랑이 있어서 사랑으로 해야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① 사람들이 성경에 계시된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 이해한 복음의 진리를 유창한 말로 설교하고 가르친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이 그 일을 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② 심지어 내게 있는 모든 재물을 다 내어주는 헌신적인 구제를 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순교자가 될지라도 사랑이 없이 그 일을 하면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 없이 행하는 그 모든 행위나 삶은 하나님이 보실 때 별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4-7절 말씀에서는 이 사랑을 15가지 특성으로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기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러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이 사랑을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내어주셨던 ‘그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로마서 5: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이 되어 있을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런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신 ‘그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그 사랑’은 바로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을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갈라디아서 5:22절 말씀에서는 성령의 열매로 맺혀지는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렇게 볼 때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이 사랑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인데, 이 사랑은 15가지 특성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연해서 설명해 보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15가지 사랑의 특성들을 하나로 묶어 놓으면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바로 그 사랑이 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세분하여 쪼개어 보면 15가지 특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첫 열매인 사랑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정리하고 이제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사랑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랑은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사랑이라는 말은 이 사랑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랑,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사랑, 사람들이 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은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내 가족은 사랑하지만 네 원수는 미워하게 됩니다. 나와 뜻이 같은 사람은 사랑하지만 나와 뜻이 다른 사람은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하며 사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사람들에게 맺게 해 주시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이 사랑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사람이며 사람들과 전혀 무관한 사랑입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 안에 맺게 해 주시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소유하게 되는 방법
그러면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이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성령의 그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이 사랑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나의 죄악 된 자아가 죽게 되면 그렇게 죽은 나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맺게 해주시는 사랑이 바로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1. 이렇게 볼 때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이 사랑은 자아가 죽은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이 사랑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죽지 않은 사람이 열매로 맺으며 살아가는 것은 오직 육체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19절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맺으며 살아가는 육체의 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가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자아가 죽고 성령으로 그 영이 거듭났다고 해서 이 사랑의 열매가 저절로 맺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7절 말씀을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살기 위해서는 부단히 자신의 죄악 된 옛 자아를 죽여 나가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이 한편으로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했습니다. 또 나는 날마다 예수님을 죽인 그 십자가를 내 몸으로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5:24절 말씀에서는 그 육체뿐 아니라 정욕과 탐심까지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예수님을 본받는 삶,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을 산다.’고도 하였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열매가 바로 사랑입니다.
2. 이렇게 볼 때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있고 또 하나님이 해 주셔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내 속에 있는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이것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그 사랑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일입니다. 우리 소관 밖의 일입니다. 이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맺게 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이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까?
성령이 그 마음에 이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실 수 있도록 마음이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는 물론 그 정욕과 탐심까지 십자가에 못 밖아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자신을 준비해 나가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첫 열매인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3. 이렇게 보면 성도들은 두 가지 본성을 함께 가진 사람들입니다.
먼저는 모든 성도들은 아담에게 속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주어진 거룩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성도들의 마음 안에서는 이 서로 다른 두 본성의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갈등은 갈라디아서의 표현대로 하면 육체의 소욕과 성령 사이의 갈등입니다.
이 두 본성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주도적인 본성이 되고자 갈등합니다.
그리고 이런 갈등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은 하나하나 제거되어 나가고, 성령이 주신 의의 본성 거룩한 본성이 우리의 주된 본성이 되어 갑니다. 이렇게 이 두 본성의 싸움은 우리의 존재의 변화와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그 변화는 크고 빠릅니다. 이런 내적 싸움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숙해 갑니다.
4. 이렇게 볼 때 성도들은 그 마음 안에서 치열한 영적 전쟁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이 모여서 이룬 단체를 우리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는 완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아직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때로 갈등도 일어나고 다툼도 일어나고 분쟁도 일어납니다. 성도들은 아직 완성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를 볼 때 서로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알아주고 참아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못난 모습이 아니라 미래에 완성될 모습을 내다보면서 용납해 주고 품어 주는 노력을 해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를 믿음으로 부르실 때의 모습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 완성되어 갈 그 모습으로 함께 내다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보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이런 관점으로 보셨습니다. 베드로는 본래 시몬이었습니다. 시몬은 갈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결국에는 반석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다른 성도들을 볼 때 이런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부족하지만 그 부족한 점을 서로 용납해 주고 서로의 짐을 져주면서 참아 주고 기다려 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5. 그래서 요한 칼빈은 이런 역할을 담당해야 할 교회를 어머니로서 교회라고 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못난 자녀들을 사랑으로 양육하고 보호해 주듯이 교회가 그런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너무 똑똑한 교회가 되어서 똑똑하다는 어머니들이 자녀를 훈육할 대 사랑을 버리고 자녀에게 완전함을 요구하듯이 그렇게 완전한 성도가 될 것을 요구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4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어머니의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 그 첫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교회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칼빈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마치 어머니가 아직 어리고 미숙한 자녀들을 사랑으로 품어주면서 성장하고 성숙하여 장성한 자녀로 커 나갈 수 있도록 돌보고 보살펴 주듯이, 교회는 어리고 미숙한 성도들을 장성한 성도로 성장시키고 성숙한 성도가 되어 가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이런 성장과 성숙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 안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가 작동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정리하면)) 이제까지 우리는 성령의 첫 열매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랑은 내가 따뜻한 감정을 가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냥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위로해 주고 도움을 준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행하며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아난 경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만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의 은혜 안에서 성령을 통해 맺게 해주시는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삶 속에 성령의 첫 열매인 사랑이 열매를 맺어 주십니다.
옛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들도 사랑을 하며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열매로서의 사랑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하게 되는 사랑은 그냥 사랑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그 옛 자아가 죽은 사람들에게 오직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랑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악 된 내가 단독자로 서서 나의 옛 자아가 완전히 죽게 되는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소유하길 원하는 사랑 또 그 안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사랑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3. 율법의 완성인 사랑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13:10절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제 마지막으로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사랑이 어떻게 율법을 완성하게 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이 말씀은 사랑을 통해 율법이 완성 된다는 뜻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율법은 지켜 행하며 살려고 힘쓰고 애써서 되는 것이 아니며, 사랑이 율법을 지켜 행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6-40절 말씀을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옛 계명인 율법이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율법사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참 의미를 깨달은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도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입니다. 요한복음 13: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율법이고 성경이고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율법은 지식이나 행위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켜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율법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은 율법과 그 율법의 정신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율법보다 더 넓은 개념입니다.
이 사랑의 법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멋대로 해라.’라고 까지 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이 말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제 제 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을 지켜 행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 사람에게 역사하여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며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사랑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랑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열매를 맺고 살려면 먼저는 그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밖아 나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해주시는 일이 바로 성령의 열매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열매를 맺고자 힘쓰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에게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맺게 해 주는 열매라고 해서 이 사랑을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그 첫 열매인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으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