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인 화평
갈라디아서 5:22-23
지난 주 복습
우리는 지난주에 성령의 열매인 희락 즉 기쁨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기쁨은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육신의 기쁨입니다. 둘째는 정신의 기쁨입니다. 셋째는 영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들이 사람들의 삶 속에 가져다주는 순기능은 참으로 많습니다.
기쁨은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하고, 삶에 활력과 의욕을 더해 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육신과 정신의 건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웃음이 가져다주는 치료효과에 대해 많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기쁨이 우리의 정신 건강에 주는 긍정적인 영향들은 대단합니다.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늘 기쁘게 사는 사람들과 늘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 살아가는 삶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기쁨에 대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육신적인 기쁨도 필요하고, 정신적인 기쁨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이런 기쁨들이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기쁨들은 성령이 그 열매로서 맺게 해 주시는 기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기쁨들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기쁨들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뿐 아니라,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도 느끼며 사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들은 이 세상이 사람들에게 주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쁨들은 세상 조건이 변하고, 상황과 상태가 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성령이 그 열매로서 맺게 해 주시는 기쁨은, 이 세상 조건과 상황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 아니고 성령이 우리 안에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을 다른 말로는 영적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적인 기쁨은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쁨이며, 사람들의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서 그 영혼이 거듭나게 될 때 경험하게 되는 기쁨이며, 또 거듭난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기쁨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기쁨은 육신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기쁨도 아닙니다. 성령이 그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기쁨 즉 영적인 기쁨입니다. 이런 영적인 기쁨은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이 영적인 기쁨은 우리의 상황이 변하고 그 상태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너희는 기뻐하되 항상 기뻐하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상태, 어떤 조건 속에서도 ‘기뻐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보면, 성경이 말씀해 주고 있는 기쁨을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화평 즉 평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살펴볼 것은 평화가 없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평화를 원하지만 이 세상 안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는 복음 송이 있습니다. 찬미예수 1818번으로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이라는 복음 송입니다. 그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는 어떤 고통과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살인, 방화, 납치, 폭력, 데모, 테러, 전쟁, 내전과 같은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 세상 속에서는 이런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런 사건들이 세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배경에 대해 야고보서 4: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은 사람 안에는 본래부터 싸우는 정욕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싸우면서 기쁨을 느끼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를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운동경기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운동이 몸에 좋다고 해서 그냥 하는 운동보다, 운동을 하지만 승부를 걸고 운동하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를 경제생활 속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함께 잘 살아보자는 공산주의 사회를 이긴 이유는 사람에게는 싸우면서 기쁨을 느끼고, 싸우게 될 때 이겨야겠다는 의욕이 일어나게 하는 싸우는 정욕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본성으로 볼 때 화평과 평화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본성에서 볼 때 어떤 사람들이 화평을 말하고 평화를 말하는 것은, 사실 위선이고 위장이며 아주 일시적인 형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화평을 말하는 사람들도 입장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고 환경이 달라지면 한 순간에 싸우는 정욕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평화를 바란다는 것은, 물이 없는 우물에서 물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본성인 화평의 열매는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서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화평은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화평이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열매라는 뜻은, 화평은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가진 내가 죽고,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성품을 받은 사람들이 맺으며 살아가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통제 받기 싫어하는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통제 받기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통제 받는 것이 사실 복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들을 다 창조하시고, 동방에 에덴을 창조하신 후에, 거기에서 살아갈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하신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창세기 2:16-1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에덴을 조성하신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요.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조성하신 동산이고, 이 동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통제를 받기 싫어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하나님의 통제 받는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가 자신을 통제하며 사는 자유를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는 좋은 것이지만 통제 받지 않는 자유는 곧 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죄였습니다.
이렇게 범죄 한 하와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창세기 3:16절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하나님의 통제를 거부하고 범죄 한 하와에게 이제부터는 그 남편 아담의 통제를 받으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대통령에게도, 철학자에게도, 교육자에게도, 심지어 목회자에게도 가장 어려운 사람은 아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다스리는 질서’를 주셨지만, 아내들에게는 창세기 3:16절의 말씀과 같이 ‘남편을 원하는 기질’ 즉 남편을 주무르고, 남편의 머리가 되고자 하는 기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속에는 드물지만 자기남편으로 만족하고, 사랑하고, 함께 하고, 협력하고자하는 성향을 가진 여성들이 있습니다. 이런 여성이 있는 가정은 정말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대적하고, 대립하고, 비방하고, 시시때때로 자기주장을 하는 여성이 있는 가정에서는 화목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기 사용된 ‘다스린다.’는 말은 ‘마샬’인데, 사실 이 단어는 ‘다스린다.’라는 말보다 더 강한 ‘지배 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지배한다.’는 말은 ① 마치 주인이 그 종을 지배하고 다스리듯이, ② 마치 전쟁에서 이긴 지배국이 전쟁에서 진 피 지배국의 백성들을 지배하고 통치하듯이 그렇게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사람이라는 면에서는 동등하지만, 하와의 범죄 이후 남자는 하나님에 의해 지배하는 위치에 있게 되고, 여자는 그 범죄한 일 때문에 지배받는 위치에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 후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간 사회는 여성이 억압을 받는 구조를 가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 시대에는 여성들도 사회적 억압을 수긍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긍하는 여성들은 별로 없습니다. 심지어 여성이 교회의 주류가 되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서는 여성 성도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변개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논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남성들은 흙으로 창조하셨지만 여성들은 남성의 갈빗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흙과 뼈는 그 원 재료가 다른데 이것을 보면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우월한 재료로 창조되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꽃이다.’ 뭐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여자 성도들의 마음을 사고, 여자 성도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하는 속이는 말입니다. 듣기 좋은 말이라고 다 옳은 말은 아닙니다. 이런 주장은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 하는 말입니다.
이 창세기 3:16절의 말씀은 여성들에게는 저주의 말 같이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막을 알게 되면 이 말씀은 저주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하고 범죄 한 하와에게 여성들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아주 복된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민수기 30장에는 서원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① 사람이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으면 반드시 지키라고 합니다. 만약 그 서원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② 그러나 처녀가 서원을 하게 되었을 때는 다릅니다. 그 부모가 그 딸이 한 서원을 허락해야 비로써 서원의 효력이 발생하게 된다고 합니다. 아내가 서원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남편 되는 사람이 허락해야 비로써 그 서원의 효력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처녀인 여성을 부모의 권위 아래 두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아내를 남편의 권위 아래 두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처녀인 여성을 부모의 권위 아래 둔 것이나, 한 가정의 아내를 그 남편의 권위 아래 둔 것이, 그 당사자에게는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복되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처녀와 아내를 그 부모와 남편의 권위 아래 두심으로 얻게 되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성들이 감정에 치우쳐 경솔하게 한 서원 때문에 정죄 받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하나의 안전장치를 더 마련해 두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도 같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던 파일을 지우려고 할 때 곧 바로 지워버리지 않고 휴지통에 일단 넣습니다. 휴지통이라는 한 단계의 안전장치를 거치게 함으로 필요한 파일들을 실수로 지우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목적에서 하나님은 범죄 한 하와를 아담의 권위 아래 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것이 여성에게 안전장치가 됩니까? 남성들은 대부분 보수적이어서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성들은 될 수 있으면 지금 상태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다릅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진취적이며 창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진취적인 성향은 여성의 큰 장점입니다.
진취적인 여성이 남성을 보면 고리타분하게 보입니다. 꽉 막힌 사람, 융통성도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가정에서 대부분의 남편들이 아내로부터 존경 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꽉 막힌 사람처럼 보이고, 융통성도 없어 보이는 남성의 권위 아래 여성을 두셨습니까? 그 이유는 여성이 가진 이 진취적인 성향, 창의적인 성향의 약점 때문입니다. 진취적인 성향의 큰 약점은 유혹에 쉽게 빠져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것도 더 나은 삶을 추구하려는 이 진취적인 성향 때문입니다. 만약 마귀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아담을 유혹했더라면 그 유혹은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범죄는 진취적인 성량을 가진 하와의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만약 이런 성향을 가진 여성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이 타락은 가속도가 붙어서 인류 사회는 곧 바로 죄악이 관영한 사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타락의 속도를 늦추고자 안전장치로 마련해 주신 것이 바로,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성향을 가진 여성을, 보수적이고 때로는 곽 막힌 것과 같이 답답해 보이는 남성의 통치를 받게 한 것입니다.
세 번째 살펴볼 것은, 인류 역사는 통제에서 벗어나는 자유와 해방을 추구해온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16절 이후 여성들은 사회적 속박과 굴래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역사 속에서 여성들이 당한 이런 속박과 굴래가 다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역사상 여성들에게 굴래 씌워져 왔던 그 모든 방법들이 다 옳은 방법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잘못된 굴래와 잘못된 속박을 많이 씌워 왔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너무나도 큰 고통 받고 너무나도 큰 희생을 당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고 싶은 것은, 이런 속박과 굴래가 인류 타락의 속도를 늦추는 데는 기여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오늘날까지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런 상태는 서구의 역사를 보면 중세말기까지 계속 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로 보면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사회는 급속한 변화가 있어 왔습니다.
① 신 중심의 사회가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 사회로, ② 남성 중심의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개인주의 사회로 변천되어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사회현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신 중심의 사회가 사람 중심의 사회로 변화되었습니다.
② 군주 중심의 사회가 백성 중심의 사회로 변화되었습니다.
③ 남성 중심의 사회가 남녀가 평등한 사회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날에는, 여성 해방을 넘어서 여성이 주도권을 가진 여성 상위 사회로 변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창세기 3:16절에서 하나님이 마련해 두신 안전장치가 완전히 풀려 버렸습니다.
이제 여성들은 남성들의 통제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여성이 남성을 통제하려고 하는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남성들이 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게 힘이 없어서가 아니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져 준다고 합니다.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가정이 평화롭기 위해서 따라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가 여성이 주도적인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남성들이 주도권을 양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을 용인하지 않으면 가정의 평화가 상실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노년의 삶을 보장받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여성이 결혼을 하면 출가외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은 시댁 중심의 사회에서 친정 중심의 사회로 전환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이런 가정들이 그 이웃에 많이 있다고 하면서 남성들에게 자신의 가정도 그런 가정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창세기 3:16절에서 마련해 주신 안전장치를 완전히 떠난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을 현대의 여성들이 역전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여성이 주도적인 사회가 된 이후에 나타난 사회적인 현상들이 무엇입니까?
여성이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여성은 그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가정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요. 여성이 자기실현을 위해서 가정을 버리고 자기 일을 찾아 나갔습니다. 더 극단적인 여성은 자기실현을 위해서 가정을 버리고 이혼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파탄 나게 되고, 가정이 파탄이 나자 그 결과 가정교육이 붕괴되었습니다. 가정교육이 붕괴되자 가정의 자녀들이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여성이 자기주장을 하면서 온 현상입니다.
전에는 이런 가정들이 있으면 문제 가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가정들이 주류이고, 이보다 더한 별별 가정들이 다 있기 때문에, 오늘날은 문제가 있는 이런 가정들까지도 정상적인 가정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의 붕괴는 결혼 개념의 붕괴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계약 결혼은 물론 동성 결혼과 같은 이상한 결혼까지 법으로 보호받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가정이 붕괴는 인성이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인성의 파괴는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범죄가 만연한 사회가 되게 했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가 이렇게 타락한 사회가 된 배경에는 하나님이 여성을 위해 주신 안전장치를 제거한 것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창세기 3:16절의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여성에게 감옥살이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성들에게 주신 안전장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해서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은, ‘인간의 참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굴래와 속박 속에서 살게 될 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1. 굴래와 속박 속에서 누리며 살게 되는 참 자유에 대해 요한복음 8:32절 말씀에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에게 참 자유가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 진리의 영이 되시는 성령님, 진리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을 때 참 자유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2. 시편 131편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자유와 평화를, 어미 품 안의 아기의 평안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사람들이 누리며 살게 되는 자유와 평화는 하나님의 굴래와 속박 속에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굴래와 속박 안에서 마치 하나님의 노예와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사람들에게 참 자유와 평화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속박과 굴래 에서 벗어나면 참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속박과 굴래 에서 벗어나는 것은 참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곧 바로 죄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하와의 범죄 사건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얻고자 했지만, 하와가 얻은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의 노예가 된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유를 얻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죄와 악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인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이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주된 자유에 대한 논쟁은 바로 동성 결혼의 합법화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들을 편견의 눈으로 보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들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결혼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유에 대한 주된 논의는 동성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차별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자유를 주고 그 인권을 보장해 주자는 것입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이를 지지하고,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동성애자가 최초로 수상이 되지 않았습니까? 애플의 CEO 팀 쿡도 '나는 동성애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작금의 이런 현상들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속박과 굴래 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타락한 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 살펴볼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입니다.
이런 세상과 달리 성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속박시키고 굴래 씌운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단어가 약 163회 정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갇혀 있을 때 참 자유, 참 평화, 참된 화평을 누리며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참 자유를 얻고 참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그리스도 안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1:28-30절 말씀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그 안에 들어갈 때 모든 짐을 벗게 되고 참 쉼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빌립보서 4:7절 말씀을 보면 이 평강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모든 생각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정리하면, 참 자유와 참된 평화는 어떻게 주어진다는 것입니까?
성경은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모든 굴래 에서 벗어나게 될 때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자신을 속박하고, 진리로 자신을 굴래 씌우게 될 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진리에 사로 잡혀서, 진리의 멍에를 매고, 진리의 노예가 될 때, 비로써 찾아오는 것이 자유이고, 평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은 메이길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메이길 싫어하는 사람들의 삶이 오늘날과 같은 극도로 타락한 사회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화평이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화평’이라는 단어의 뜻은 ‘평화,’ ‘고요함’, ‘쉼’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의미는 바로 ‘고요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평’ (즉 에이레네)은 ‘고요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요함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이 고요함(에이레네)은 모든 가능성의 문이 닫히게 되었을 때도 고요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런 고요함을 가질 수 있습니까? 내면의 자아가 죽지 못한 사람들은 항변하고 대적하는 사람이 됩니다. 내면의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고요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둘째, 이 고요함(에이레네)은 자아가 죽은 사람, 그 죽은 자아 안에 성령이 열매를 맺게 한 그 사람, 즉 영적으로 거듭난 영에 속한 사람의 심령 상태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셋째, 이런 심령의 고요함(에이레네)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 믿고 구원 받고 거듭나 하늘을 향해 그 길을 가고 있는 순례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세상적인 것에 육신적인 것에 미련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결코 이런 고요함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고요함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상황이 험악해지고 조건이 바뀌고 입장이 달라져도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전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현상이 바로 고요함입니다.
그러면 이런 고유함이 누구에게 있었습니까?
첫째, 이 고요함은 예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마태복음 8:23-26절입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실 때 갑자기 폭풍과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뒤집힐 것 같이 요동쳤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었는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배가 뒤집히는 상황 속에서도 고요할 수 있으셨습니다.
둘째, 이 고요함은 하나님이 그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이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6: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셋째, 이 고요함은 예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19-20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두 번 거듭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하시면서 평강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넷째, 이 고요함은 전도자 바울과 실라가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귀신들린 한 여자를 고쳐준 것 때문에 모함을 받아서 심하게 매를 맞고 차꼬가 채워져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 차꼬는 발에 채우는 수갑과 같은 것인데 날카로운 쇠가 달려 있어서 전혀 움직일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 차꼬는 아주 흉악한 범죄자에게 채웠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하도 많이 두드려 맞아서 온 몸이 성치 않았고, 또 차꼬까지 채워져 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이 밤에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고요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성령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22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즉 ‘에이레네와’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이 같은 것을’ 즉 성령의 열매를 ‘금지할 법’ 즉 금지할 율법이 없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령이 그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이 평화는 홍해 바다 앞에서 모세가 가졌던 평화입니다.
굶주린 사자가 득실대는 사자굴 안에서 다니엘이 가졌던 평화입니다.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 불안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가졌던 평화입니다. 전도자 바울과 실라가 지하 감옥에서 가졌던 평화입니다. 초대교회 집사 스데반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가졌던 평화입니다.
성령이 그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화평은 이런 평화이고 고요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평화를 우리들에게도 선물로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이 우리 안에 이 평화를 열매로 맺어 주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이 평화가 있습니까?
정말 예수 믿는 우리들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부부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에서,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서, 성도와 성도 사이에서 이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이 평화가 우리 안에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그 주신 평화 고요함 안에서 세상 풍파가 밀려 올 때에도 화평을 잃지 않고, 평화를 잃지 않고, 고요함을 잃지 않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