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3. 4. 13:48



오래 참음

갈라디아서 5:22-23

 

지난 주 복습

 

우리는 지난주에 성령의 열매인 화평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인간이 참 평화와 자유 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속박과 굴레 안에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요한복음 8:32절에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참 자유 함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진리의 속박 안에 서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누리며 살게 되는 자유와 평안에 대해 시편 131:2절에서는 엄마의 품 안에 있는 아기들이 누리는 평안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하와는 하나님의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으려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와는 그 원하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하와가 얻는 것은 자유가 아니고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자 했지만 그가 얻은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의 노예 상태의 속박이었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그 열매로 맺게 하는 자유와 평화는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집니까?

이 평화는 예수님과 함께 그 죄악 된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부활하심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날 때 주어집니다. 이렇게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9절 말씀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한 것입니다.

 

화평에 대한 복습은 이 정도로 하고, 오늘은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오래 참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살펴볼 것은, 잘 참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잘 참지 못합니다.

우리 민족은 특히 일을 해도 빨리 빨리 하려고 하고, 공부를 해도 벼락치기로 하고, 사업을 해도 빨리 그 결과를 얻고자 합니다. 이런 성향이 긍정적으로 작용해서 이룬 것이 바로 한강의 기적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민족은 조그마한 일도 잘 참지 못해 하며, 아주 사소한 일을 가지고 갈등하고 다투고 싸우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가진 부정적인 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과 전혀 다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더라도 천천히 하시며 그 대신 정확하고 완벽하게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한 치의 오차도 실수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이런 기본적인 성향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성향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게 해 왔습니다.

 

모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1. 40세의 모세

 

모세는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나일 강에 버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모세를 애굽 왕실의 하셉투스 공주에게 발견되고 자식이 없었던 공주는 모세를 양아들로 삼게 됩니다.

 

모세는 그 후 어린 시절을 모세의 유모가 되기를 자청한 그 어머니와 가족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나게 됩니다. 모세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는 바로의 궁중에 들어가서 애굽의 왕자들이나 받을 수 있는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게 됩니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던 모세가 어느 날 자신은 애굽 사람이 아니라는 것, 자신은 노예 신분으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후 모세는 자신의 출신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 고민하다가 40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애굽에서 고통당하며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고자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모세는 40세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이 받은 사명을 알리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당시 모세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의 그런 행동을 보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알아주고 따라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정 반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뜻과 계획을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모세를 거부하고 대적하며 나섰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 너를 너와 우리의 재판장을 삼았느냐?’라고 하면서 모세를 거부하였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들은 애굽왕 바로에게 나아가서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였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이 일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비전을 한 번 펼쳐 보지도 못하고 미디안 광야 즉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북쪽 땅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2. 80세 모세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와 함께 해 주시지 않으셨느냐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인 것 같아 보입니까?

모세는 사명을 받자마자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써서 그 받은 사명을 수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그 받은 사명을 행하기 이전에 먼저 모세를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받은 사명에 집중하였고 하나님은 그 사명을 이루어갈 모세에게 집중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생각과 우리 하나님의 생각의 다른 점입니다.

이것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문제를 살펴볼까요?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죄가 있는 가인과 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지만, 성결한 삶을 살았던 아벨과 그의 제사는 받으셨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는 사명을 받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큰일을 맡아서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먼저 그 자신을 돌아보고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답게 준비시켜 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명을 받은 사람답게 자기 자신을 준비시켜 나가지는 않고,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받은 사명을 알리는 일에만 매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준비가 되지 않은 모세와 함께 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준비가 되지 않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셔서 그 스스로 자신을 준비시켜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모세의 40년 도피생활은 어떤 생활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르치시고 모세로 하나님의 일군으로 준비시켜 나갔던 기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이 준비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이 준비하는 기간이 다 다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준비하였지만, 야곱은 20년 처가살이를 통해 준비시키셨습니다. 요셉은 13년 동안 애굽의 군대장관 보디발의 집에 하인으로 있으면서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는 무슨 일을 해도 신속하게 속전속결로 마쳐야 직성이 풀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광야 40년은 이런 모세를 천천히 순리를 따라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일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은 행하실 때 언제나 천천히 참고 인내하는 가운데 순리를 따라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행하신 10가지 재앙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천천히 일하시지만 완전하게 조금의 실수나 오차가 없이 완벽하게 일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신앙의 차이

 

모세는 이렇게 40년 동안 천천히 일하시고, 순리를 따라 일하시는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배운 모세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 가진 신앙이 마치 하늘과 땅의 차이와 같이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행하신 10가지 재앙을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해 싸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재앙들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려고 베푸시는 재앙임도 알았습니다. 이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고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도 없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10번째 재앙으로 유월절 어린 양을 잡은 것을 보면 이들은 구원신앙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진 믿음을 보면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가는 앞이 홍해로 막혀 있는 곳에 이르렀고, 그 뒤에서는 바로와 그 군대가 추격해 오고 있는 위기의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이 때 천천히 일하시지만 완벽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백성들은 두려워하며 여호와를 향해서 부르짖고,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기를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4:11-12)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일하시지만, 완전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알고 있는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4:13)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왜 이렇게 그 가진 신앙은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배운 사람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의 차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천천히 일하시지만 완전하게 일하신다.’는 것을 배운 모세는 그 하나님을 믿고 참고 인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천천히 완벽하게 일하신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해도 조급해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느긋하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천천히 그러나 완벽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조급해 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조급해 합니까?

사람들은 7-80년의 짧은 생애를 살기 때문에 조급해 합니다. 그러나 영원에 계신 우리 하나님은 조급해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과 그 원리를 보십시오. 이 세상과 그 원리를 보면 조급함이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한 어린 아기가 태어나려면 반드시 10개월의 임신 기간을 거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태어난 어린 아기가 어른이 되려면 또 수십 년의 세월을 양육 받아야 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십시오.

나무도 쓸만한 재목으로 자라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고 구원 받아서 예수님을 닮은 성숙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이런 성장은 평생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오랜 과정을 겪어야 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해도 빠르게 승부를 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천천히 느리게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천천히 느리게 일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오래 참고 인내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앞서 행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템포에 자신의 믿음을 맞추고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성령의 열매로서의 오래 참음입니다.

 

갈라디아서 5:22절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첫째, 갈라디아 5:22절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2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오래 참고 라는 헬라어 단어 마크로듀메오입니다.

이 단어는 마크로스듀메오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마크로스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듀메오상처’ ‘고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크로듀메오큰 상처를 견디어 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래 참는다.’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나 악행이나 손해를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자포자기(自暴自棄)한 사람이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듯이 그렇게 포기하고 참아내는 그런 참음을 말합니다.

 

둘째, 이 오래 참는 사랑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성품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치게 될 때 오래 참을 수 있는 성품, 참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이런 성품은 사람에게 있는 성품이 아닙니다. 믿음 안에서 자신이 변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성품으로 하나님께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성품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죄인들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향해 얼마나 오래 참아주십니까? 그 사람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즉 그 사람에게 주어진 평생 동안 참아주시는 사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회개하고 구원 받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죄악된 이 세상을 향해 참으시는 참음 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죄악된 세상을 참으시되 얼마나 오래 참아주십니까? 사람들이 죄악된 세상을 보면서 이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시냐고 불평할 정도로 죄악된 세상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사건을 언제까지 참아주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이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날 까지 아담과 하와로 인해 형성된 범죄한 세상을 참아주시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6장을 보면 그 가진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그 억울한 피 값을 신원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인류 역사의 마지막 환난 기간 중에 아직 순교할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다 순교할 때까지 너희는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하나님은 인류 역사가 마치게 될 그 날까지 오래 참아 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오래 참는 사랑은 성령이 사람들에게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성품입니다.

 

사람들은 그 자녀들이 잘못할 때 곧 형벌을 주고 제재하여 바로 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이 범죄할 때에도 오래 참고 기다려 주십니다. 이렇게 볼 때 오래 참는 이 성품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있는 성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성품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무엇을 보고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 오래 참고 기다려 주느냐? 아니면 참지 못하고 쉽게 화를 내고 분노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오래 참음은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열매로 맺게 해 주신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성품을 받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래 참음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은 가치가 혼돈된 시대이기 때문에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평생 성공적인 목회를 해 오다가 그 말년에 교회 재정 수백억 원으로 아들이 운영하는 회사를 지원했다가 재판을 받고 실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또 어떤 목사님은 성공적인 목회를 해 오다가 성적인 문제가 불거져서 지금도 계속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이분들이 아직 살아 있고 현직에 있기 때문에 직접 논하는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비슷한 사건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이 범죄 하게 됩니다. 간음죄를 짓고 나중에는 간접 살인죄까지 지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지은 그 죄가 완전범죄가 되길 바랐지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 죄를 만천하에 들어 내셨습니다.

 

이 때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왕의 채면과 권위와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선지자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냥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행한 일보다 더한 심한 일을 그 삶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다윗이 철저히 죄를 인식하고 버리기를 원하셨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다윗에게는 책사 아히도벨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판단에 방불케 하는 묘책을 다윗의 1급 참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히도벨이 전승에 의하며 밧세바와 친척 관계에 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나중에 밧세바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된 후 다윗에게 충성하던 그 마음이 다윗을 대적하는 마음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압살롬을 이용하여 다윗을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정작 죄를 범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그 죄를 회개하고 다시 믿음에 서게 되었는데, 다윗의 범죄 때문에 마음이 상한 아히도벨은 다윗 때문에 시험에 들어 다윗을 대적하다가 자살하여 죽게 됩니다.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래 참음은 우리 삶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이 죄인들에 대해 오래 참으시듯이 우리들도 죄인들에 대해 오래 참는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도 아히도벨과 같이 멸망당할 수가 있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들을 볼 때 우리 마음 안에는 그 죄는 미워하되 죄인들을 향해서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을 잃으면 위험합니다.

 

교회 장로들이 교회를 바로 세워 보겠다고 기자회견을 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몹쓸 일을 한 목회자의 죄를 심판하여 보겠다고 법정에 세우려고 하는 이런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죄인들을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죄인들을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해야 합니다.

 

둘째, 반대로 나는 범죄한 일이 없는데, 혹은 내가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이 내 죄를 사해 주셨는데,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혹은 내가 하나님 앞에 사함 받은 나의 과거의 잘못을 가지고 계속 괴롭게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열매로 맺게 해 주신 오래 참는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경험을 통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설교를 너무 잘해서 황금의 입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렸던 크리소스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성령의 열매인 이 오래 참음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릇된 대우를 받고, 부당한 취급을 받아 그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을 때, 내게는 그 사람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그 사람들의 주장이 잘못 되었다고 반론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참고 견디어 내는 능력이 바로 오래 참음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오류와 잘못된 주장에 대해 맞서는 최선의 길은 오래 참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래 참음 안에서 그 모든 삶의 결과들은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죄악된 세상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리시듯이 그렇게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예수님은 마태복음 5:10-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들도 이 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말씀을 맺습니다.

 

이 오래 참는 마음은 하나님이 가지신 성품입니다.

이 오래 참는 마음은 우리 주 예수님이 가지셨던 마음입니다. 이 오래 참는 마음은 성령이 그 열매로 성도들의 마음에 맺게 해 주신 성품입니다. 우리가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신 이 성품으로, 오래 참아주는 삶을 살게 되면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네가 가지고 사는 그 마음은, 전에 내가 세상 속에서 살 때 가지고 산 마음이다.’라고 하시면서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이 이런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시고 은혜로 충만케 하시면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참으셨듯이 예수님이 죄악된 세상을 참아 주셨듯이 그런 사랑의 감격 안에서 죄인들을 참아주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이런 충만함 안에서 죄인들을 향해 오래 참으셨으며, 모세도 이 충만함 안에서 거역하는 백성들을 향해 오래 참았으며, 오늘 우리들도 이 충만함 안에서 오래 참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시는 이런 충만한 은혜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늘 있게 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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