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인 희락
갈라디아서 5:22-26
지난 주 복습
우리는 지난 주 성령의 열매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사랑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맺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헤 아가페’ 즉 ‘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을 통해 증거 해 오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사랑입니다. 요한1서 4: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15가지 특성을 가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15가지 사랑의 특성을 하나로 압축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이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이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하게 됩니까?
① 이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② 이렇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일이 바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과 같이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이 사랑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 위에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또 이런 이해 위에서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렇다고 이 말씀은 곧 사랑이 율법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사랑은 = 율법과 + 율법의 정신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사랑은 율법과 율법의 정신보다 더 큰 상위의 계념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그 정신보다 더 상위 계념인 사랑을 소유하고 있으면 하위 계념인 율법을 지켜 행하며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전히 지켜 행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사랑 안에서 율법을 지켜 행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성령의 두 번째 열매인 희락에 대해 살펴봅니다.
성령의 열매인 희락
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사랑이 하나님께서 천국백성들에게 주신 첫 번째 하늘성품이라면, ②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희락은 하나님께서 천국백성들에게 주신 두 번째 하늘성품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살피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행적으로 알고 들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실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열매는 총 아홉 가지입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 열매가 사랑이고, 두 번째 열매가 희락이고, 세 번째 열매가 화평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은 성령이 우리 안에 그 열매를 맺게 해 주실 때 첫 번째 맺게 해 주시는 열매가 사랑이고, 두 번째 맺게 해 주시는 열매가 희락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그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맺혀지는 열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열매 안에는 이 아홉 가지 열매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홉 가지 열매는 동시에 맺혀지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음과 같은 말은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성령의 열매 중에 사랑과 희락 등 다른 것은 다 있지만 충성만은 없다.’ 라는 말은 불가능한 말입니다.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이 아홉 가지 열매는 우리에게 있으면 다 있어야 하고 없으면 다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이 아홉 가지 열매는 각각 분리되어 있는 열매가 아니고 하나의 열매 안에 이 아홉 가지 특성들이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중에 일부 특성들은 가지고 있지만 일부의 특성들은 없다.’라고 하는 사람은 아직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령이 그 마음 안에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사람에게는 이 아홉 가지 특성의 열매가 다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그 믿음의 분량이 다르듯이, 사람마다 그 가진 영성의 깊이가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맺게 해주시는 성령의 열매의 양과 크기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그 받아 가진 사랑의 양이 클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그 받아 가진 사랑의 양이 작을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성령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크기가 기쁨의 크기가 다른 이유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희락 즉 성령이 그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기쁨은, 사랑의 경우와 같이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 또 이 세상에 속한 기쁨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주시는 기쁨입니다.
이 정도로 정리하고 난 후에 다음에는 성령의 열매로 주시는 기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기쁨들이 있습니까?
첫째, 물질이 주는 기쁨, 환경이 주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업이 잘 되어서 집을 사고 고급 자동차를 사게 될 때 느끼는 기쁨이 있습니다.
또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을 하고 시험에 합격 되고 귀한 선물을 받거나 원하는 직장에 취직을 하게 될 때 느끼는 기쁨들도 있습니다. 이런 기쁨은 물질이나 환경이 가져다주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런 기쁨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이런 기쁨들은 기쁨을 가져다주던 물질이 사라지고 환경이 변하게 되면 사라집니다. 저도 자동차 면허 시험을 볼 때 필기시험은 한 번에 아주 쉽게 합격 했지만 실기시험은 여러 번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합격되었는데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너무 기뻐서 음료수를 사가지고 와서 거기 시험조교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 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성도들로 하여금 이런 기쁨을 추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번영신학, 은사주의, 신사도주의가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① 월세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기도하면 전세로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런 간증을 하게 합니다. ② 또 전세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도하여서 내 집 장만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런 간증을 하게 하지요. 그러면 월세로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전세로 살고자, 전세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작지만 내 집을 마련하고자, 철야하고 금식하면서 열정적으로 부르짖어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현장에서 조금 물러서서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왜 그런 사람들은 기도하면 월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내 집 장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합니까? 그리고 왜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자신도 그렇게 되고자 철야하며 금식하며 기도합니까? 그 이유는 한편에서는 신앙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의 정욕과 욕심을 부추기고 불을 지피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앙이란 이름으로 정욕과 욕심을 이루고자 금식하고 철야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믿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때에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시작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자기부인의 과정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미화하면서 한쪽에서는 자기 욕심과 탐욕을 부추기고 다른 한 쪽에서는 자기 욕심과 탐욕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철야하고 금식할 가치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부추기고 또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신앙임을 눈뜨지 않으면 이런 사람들은 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은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사실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며 사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날 돈을 신으로 섬기며 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는 이런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 다 말하게 되면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진 신앙이 그 기초부터 흔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을 다 말하면 우리는 다른 교회들로부터 배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알고는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오게 되었을 때 애굽 사람들로부터 각종 금은보화를 많이 받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에 한 번도 소유해 보지 못한 값진 보석들을 한 아름씩 안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낀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하나님이 개입해서 홍해 바다를 갈라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따라오던 애굽의 바로의 군대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받고 바로의 군대는 홍해 바다에 다 수장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낀 그 기쁨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이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백성들이 노래하고 여인들이 노래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든지 그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 펴져 나가서 40년이 지난 후의 사람이었던 기생 라합까지도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쁨과 감격이 불과 3일 밖에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물이 없는 광야 길을 3일 동안 걸어가면서 그 기쁨과 감격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이것이 물질과 환경이 가져다주는 기쁨의 모습입니다.
때로 이 기쁨은 종교적인 모습을 뛸 때도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경험하는 기적과 병 고침의 기쁨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구하고 병 고침을 구하는 것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우선되지 아니하면 사실 물질과 환경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둘째, 정신적인 기쁨도 있습니다.
정신적인 기쁨은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기쁨 또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오는 기쁨 이념이 가져다주는 삶의 보람들이 가져다주는 기쁨이 등등이 있습니다.
이런 기쁨에는 작품을 창작하는 예술가 들이 느끼는 기쁨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삶이 가져다주는 기쁨도 있습니다. 무슨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고 그래서 결국 성취하게 되었을 때 그 성취가 가져다주는 정신적인 기쁨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앙 안에서는 구원의 도리를 깨닫게 될 때 오는 기쁨도 있습니다. 또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닫게 됨으로 가지게 되는 종교적인 기쁨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다 정신적인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그 때 받은 그 기쁨이 영원히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기쁨들은 물질적인 기쁨보다는 더 크고 깊이가 있는 기쁨을 주지만 이런 기쁨들 역시도 곧 사라져 버리는 기쁨입니다.
또 어떤 기쁨이 있습니까?
셋째, 성령이 주시는 기쁨도 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에 대해 요한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어떤 기쁨을 말합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에는 첫째, 그 존재가 변하게 된 기쁨이 있습니다. 존재가 변하는 기쁨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그 영혼이 중생하고 거듭나게 됨으로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이것을 중생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게 될 때 가지게 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에는 둘째,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 변화된 존재가 성장하고 성숙하게 됨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기쁨입니다. 사람들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사람으로 그 영이 죽고 육체가 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성령을 통해서 거룩한 영을 우리 안에 다시 심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영과 죄악 된 육체의 본성을 함께 소유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마음은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본성의 싸움터가 되었습니다.
이 영적 싸움을 통해 사람들은 죄악 된 성품들을 버리고 거룩한 성향으로 성화를 이루어 나갑니다. 그래서 이 영적 싸움을 성화를 이루어 가는 싸움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화를 이루어나가고 신의 성품을 소유한 상태로 나아가는 변화가 가져다주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영성과 인격이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면서 가지게 되는 기쁨입니다.
이 두 가지 기쁨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기쁨입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 존재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때 가졌던 기쁨이고, 그 영성과 인격이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면서 가지게 되는 기쁨입니다. 존재의 변화를 통해 오는 기쁨을 중생의 기쁨이라고 하고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 속에 경험하는 기쁨을 성화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어 나가는 기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① 존재의 변화가 가져다주는 기쁨
하나님이 주시는 존재의 변화가 가져다주는 기쁨은, 이 세상의 상황과 조건과 가치를 뛰어 넘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은 이 세상의 상황과 환경과 조건의 변화가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초월해 있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가지셨던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 구속사역을 통해 구원 받게 될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면서 이 기쁨을 가지시고, 누가복음 23:34절 말씀을 보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가지고 그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시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공생애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이 기쁨은 스데반이 가지고 있었던 기쁨입니다.
스데반도 예수님이 가지셨던 이 기쁨을 가지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하며 그 영혼을 의탁하였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바뀌면 그 바뀐 존재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이렇게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이 존재의 변화가 가져다주는 기쁨의 근원입니다.
➁ 성품이 변하고 인격이 성숙되는 기쁨
또 믿음 안에서 그 성품이 변화되고 인격이 성숙되어 나가게 되면 그 변화 되어가는 성품과 인격이 성숙해 가는 열매로 주어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성령의 열매로 주어지는 기쁨이며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시는 희락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령의 열매로 주어지는 희락으로서의 기쁨은
첫째, 존재론적 변화에 기초를 두고 오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믿음 안에서 그 성품이 바뀌게 되는 변화가 가져다주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이 세상이 주는 유한한 기쁨과 달리 항상 기뻐하는 기쁨, 즉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왜 항상 기뻐하게 됩니까?
그것은 존재의 변화가 가져다주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품의 변화가 가져다주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이 희락이라는 기쁨은 상황이나 환경이나 삶의 조건을 뛰어 넘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상황과 환경 너머에 계신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그 삶이 기쁘든지 슬프든지 관계없이 항상 기뻐하게 하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 5:16절 말씀에서는 ‘항상 기뻐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이 기쁨은 물질이나 환경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기쁨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기쁨은 성령이 그 열매로서 맺게 해 주시는 기쁨이며 그 존재가 변하고 인격이 성숙해 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기쁨의 크기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 존재가 바뀐 정도가 다르고 영적 인격적 성숙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의 양은 서로 다를 지라도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희락으로서의 기쁨을 가지고 항상 기뻐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기쁨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엔 크리오’ 라고 하고 있는 이 기쁨은 주 안에서의 기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6, 18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빌립보서 4:4절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10절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로마서 5:3절에서는 ‘환난 중에도 기뻐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사도행전 5:41절에서는 ‘능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한다.’고 합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행전 16:25절에서는 감옥에서도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하박국 선지자가 가졌던 기쁨이 바로 이 기쁨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두 번째 열매인 희락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이 기쁨은 물질이 가져다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정신이 가져다주는 기쁨도 아닙니다. 이 기쁨은 내 존재가 변하게 되는 중생을 통해서 오는 기쁨, 중생한 내 성품이 변화되어 가는 성화를 통해서 오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성령이 그 열매로 맺게 하는 희락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게 됨으로 오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은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 삼아 주신 우리에게 이 기쁨을 주시고,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선물로 주시는 이 기쁨을 충만히 누리며 살 뿐 아니라, 이 기쁨으로 세상을 이겨나갔던 믿음의 선배들과 같이 우리들도 이 기쁨으로 세상을 이겨 나가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