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

자비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3. 11. 05:05



자비

갈라디아서 5:22-23

 

1. 지난 주 복습

 

요즘 사람들은 잘 참지 못해 합니다.

더구나 급한 성품을 가진 우리 민족은 특히 더 잘 참지 못해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빨리 빨리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과 전혀 다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시더라도 천천히 하시며 그 대신 정확하고 완벽하게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오래 참는 인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쓰실 일군들을 부르시면서 가장 먼저 하시는 훈련이 바로 이 오래 참는 훈련입니다. 모세는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을 배우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이 걸렸습니다. 야곱은 20년이 걸렸습니다. 요셉은 13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면 오래 참고 인내하는 신앙이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그 이유는 이 신앙을 배우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앞에 홍해가 막혀 있고 그 뒤에는 바로와 그의 군대가 추격해 오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런 엄중한 상황 속에 개입하셔서 구원을 베풀어주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지 못하고 심히 두려워하고 조급해 하며 여호와를 향해서 부르짖고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미디안 광야에서 오래 참고 인내하는 신앙을 배운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라고 하며 그 상황 속에 하나님이 개입해 주실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진 신앙이 이렇게 차이가 났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기다리는 인내하는 신앙을 배웠느냐? 배우지 못했느냐? 하는 차이 때문입니다. 인내하는 신앙을 배운 모세는 믿음으로 참고 기다릴 수 있었으나 인내하는 신앙을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믿음으로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할 신앙은 바로 성령이 그 열매로 우리 마음 안에서 맺게 해 주시는 오래 참는 신앙입니다. 이 오래 참는 신앙의 유무에 따라서 우리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될 수도 있고, 나머지 10명의 정탐 군 중 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래 참는 신앙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살펴보고, 오늘 우리는 성령의 또 다른 열매인 자비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2.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자비

 

갈라디아서 5:22-23절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첫째,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이 자비는 친절함입니다.

 

갈라디아서 5:2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자비, 고린도전서 13:4절의 온유와 그 어원이 같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온유는 친절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4절을 다시 정리해 보면 그 사랑은 오래 참고 그 사랑은 친절하며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친절함이란 무엇입니까?

친절함이란? 상대방을 대하는 상냥한 마음, 호의적인 태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친절함이란? 다른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을 친절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친절한 마음이 곧 자비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5:2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열매인 자비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둘째,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이 자비의 뿌리는 긍휼입니다.

 

이 친절한 마음, 자비의 마음의 뿌리는 사실 긍휼입니다.

긍휼한 마음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긍휼이란 어떤 마음을 말합니까?

긍휼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자비와 친절과 긍휼을 연결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있을 때,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친절한 마음이 생기고, 자비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을 보면, 세 가지로 관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마틴 부버가 말한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에서는 상대방을 물질적인 관계, 객관적인 관계, 이해타산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는 관계를 말합니다.

두 번째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관계, 사랑하고 존중하는 등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관계를 말합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관계인데 인격과 인격이 만나되 긍휼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보는 관계입니다. 이 때 가지게 되는 긍휼한 마음은 우리 하나님이 가지신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긍휼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사람들이 가지고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라 이런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지고 살기를 원하신 긍휼의 마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자신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 심지어 원수까지 라도 불쌍히 여기게 되는 마음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는 단어가 바로 헷세드입니다.

이 헷세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비를 말합니다. 헷세드는 심지어 자신을 대적하고, 공격하고, 원수가 되어 있는 사람, 또 상대방이 계속해서 범죄하고 죄를 짓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 헷세드에 근거해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3)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성경의 대가들, 성경을 아는 것에는 박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 박사였던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너희는 호세아서 6:6절의 말씀 즉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하신 말씀을 다시 배우고 오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말씀을 바르게 배우게 되면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이 제사의식이 아니고 사랑이고 긍휼이라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헷세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이 헤세드는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서 맺게 해 주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헤세드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갖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이 헷세드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긍휼한 마음에 기초를 두고 있는 친절한 삶, 자비한 삶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자비의 요구입니다. 누가복음 6:36절입니다. 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친절의 요구입니다. 에베소서 4:31-32절입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3. 자비를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들

 

첫째, 다윗의 삶 속에 나타난 자비입니다.

 

다윗은 그 장인이 되는 사울 왕과 그 군사들을 피해 약 10년 동안 도망 다니며 살게 됩니다.

이런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유다 왕이 된 나이는 30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은 20대의 젊은 날 대부분을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보내게 됩니다. 인생의 황금기인 이 10년 동안 도망자의 신세로 각종 사건들을 경험하며 보냅니다.

 

이런 사람이 성경에 또 한명 나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17세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서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될 때까지 보디발의 집종으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미래에 대한 아무런 소망을 갖지 못한 채 인생의 황금기를 다 보내게 됩니다.

 

다윗과 요셉은 젊은 날에 당했던 고난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긴장하고 경계하고 피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이 그 장인이었던 사울을 어떻게 대합니까?

사울과 그 군대를 피해 도망자로 살아가던 다윗에게 어느 날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다윗이 숨어 있는 동굴은신처 안에 사울이 용변을 보려고 호위병도 없이 혼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뛰어난 병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 사울만 죽이면 다윗의 모든 고난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울 대신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사울 왕을 죽이지 않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왕을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왕을 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다윗이 가진 신앙이, 사울 왕을 자기 손으로 제거할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사울을 죽이기를 원치 않은 것입니다.

둘째는 사울 왕을 향한 긍휼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의 인정해 주심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그 불순종하는 삶으로 인해 버림을 받은 사울 왕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그 왕좌를 지켜보려고 하는 왕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사울의 집안에 남아 있는 사람을 찾아서 후대합니다. 이런 다윗의 호의를 받게 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다윗 왕이 자기에게 베풀어주고 있는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왜 죽은 개와 같은 자를 돌보십니까?’ 라고 묻기도 하였습니다.

 

므비보셋은 왜 이 말을 했습니까?

당시에는 왕조가 바뀌면 전임 왕조의 사람들은 다 죽였습니다. 그래야 후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정 반대로 행동합니다. 전임 왕조의 남은 자손을 자기 곁에 두고, 자기상에서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긍휼과 자비를 이해하지 못해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둘째, 요셉의 삶에 나타난 자비


요셉에게 그 형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요셉을 미워하여 죽이려고 했던 형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차마 죽이지 못하고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래서 13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하며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형들이 기근 때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당시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로서 그 형들의 잘못을 질책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그냥 그 형들에게 양식을 주어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애굽으로 초청하여 고센 땅에서 염려 없이 기근의 때를 살게 해 줍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 형들의 잘못을 덮어주었지만, 그 형들은 요셉이 아버지를 보고 자신들의 잘못을 덮어주고 있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앙갚음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요셉에게 나아가서 아버지가 형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요셉은 이런 형들을 안심시키면서 형들이 한 그 일은 사실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살리라고 나를 먼저 보내신 일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형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아 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우리는 이런 다윗의 모습 속에서, 요셉의 모습 속에서, 성령이 그 열매로 맺게 하는 긍휼의 마음, 자비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요셉과 다윗이 가진 긍휼한 마음 자비의 마음은 어디서 왔습니까?

 

빚진 자의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급할 때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서 썼다면 나중에 꼭 갚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갚지 못하게 되었을 때 돈을 빌려 쓴 사람이 가지게 되는 것은 바로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빚 진자의 마음을 가진 다윗

다윗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사랑의 빚을 많이 졌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베풀어준 그 사랑을 빚으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요나단에게 진 빚을 갚아줄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요나단은 죽고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에게는 그 진 빚을 직접 갚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집의 남은 자손에게 그 빚을 갚고자 하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긍휼과 자비로 대한 것입니다.

 

빚 진자의 마음을 가진 바울

로마서 1:14절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면 바울이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빚을 진 것입니까?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빚진 자의 마음은 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느끼고 있었던 마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에게 이 하나님의 사랑은 갚을래야 갚을 수 없는 빚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빚을 갚으려고 자신의 생애를 다 바쳐 그 주신 사명에 헌신하게 됩니다.

 

4. 바른 믿음 잘못된 믿음의 구분법입니다.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인지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인지를 어떻게 구분합니까?

예수님은 이것을 마태복음 18장의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이 비유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 줄까요? 하루에 일곱 번까지 용서해 줄까요?’ 라고 묻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신 후에 들려 주신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천국 비유입니다.

천국은 그 종과 결산하려는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시면서 주신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한 임금이 그 종들과 결산하려고 할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나아왔습니다. 여기 1만 달란트는 우리 돈 약 60조에 해당하는 많은 돈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갚은 수 없는 우리 죄를 뜻하기도 합니다. 종을 그 갚을 수 없는 빚을 갚겠다고 하면서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이 큰 긍휼과 자비를 입은 이 종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인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그 큰 긍휼에 대해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자신도 다른 사람 즉 자기에게 빚진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강퍅한 종이라 임금의 자비에 대해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즉 1,000만원을 빚진 종을 무자비하게 다루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이 없는 종의 행위를 전해들은 임금이 어떻게 합니까?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이 주신 결론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임금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던 종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임금에게 지고 있었던 막대한 채무를 탕감 받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임금에게 긍휼과 자비하심 안에서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이 종의 문제는 큰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빚진 자의 심정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자비롭게 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입고 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구제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빚진 자의 마음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자신도 자비를 베풀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은 자비를 전혀 베풀며 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긍휼한 마음, 자비한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 안에 빚진 자의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바로, 평생을 갚아도 아니 영원히 갚아도 그 빚을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 그 종,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를 빚 졌던 그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이 죄의 빚을 다 탕감해 주셔서, 죄에서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 자유케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이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삶이 바로 이런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말씀들입니다.

마태복음 9:13절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누가복음 6:36절입니다. 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마태복음 18:35절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긍휼을 베풀며 살아야 할 구체적인 삶에 대한 구약성경의 말씀입니다.

신명기 15:12-15절입니다. 이 말씀은 그 동족이 삶이 어려워서 팔려오게 되었을 때,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그 이유에 대해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그 조상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셨듯이, 너희도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24:10-20절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1. 전당 물을 잡았을 때입니다. 해 질 때에 그 전당 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2.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에 대해서입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의 형제이든지 이방의 객이든지 학대하지 말며, 그 일한 품삯은 당일에 주라.’고 합니다.

3. 죄에 대해서는, 각 사람은 자기 죄에 대한 책임만 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4. 그리고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5. 밭의 곡식을 벨 때에는 가난한 이웃을 생각해서 다 베지 말고 이삭을 남겨 두라.’고 합니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 베풀면, 하나님은 그것 빚진 것으로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잠언 19:17절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자비를 실천하며 산 삶

 

1. 아브라함이 자비를 실천하며 산 삶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자비의 열매가 나타났던 이런 아브라함의 삶은 아브라함이 성령으로 거듭났던 사람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2. 긍휼과 자비를 실천하며 산 예루살렘 교회의 삶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예루살렘 교회의 삶은 예루살렘 교회가 오순절에 성령으로 충만하였던 교회와 연관성이 있습니다. 성령이 그 열매인 자비의 마음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3. 또 안디옥 교회가 긍휼한 마음으로 자비를 실천한 삶을 또 알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자기 교회에서 일할 사역자들도 부족하여서, 다소에서 전도하고 있던 바울까지 데리고 왔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다른 지방에 있는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따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다른 지방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 교회의 중요한 일군들을 보내주는 긍휼의 마음, 자비의 마음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이런 헌신을 통해 아시아와 유럽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됩니다. 아멘.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보시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송을 받아 가는, 선교사님들을 귀하게 보시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또 작은 교회에는 일군이 늘 부족한 곳입니다. 이런 교회에서 중요한 일군이 신학을 하게 되면 그 교회로서는 손실이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며 보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긍휼의 마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신 자비의 마음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열매인 자비의 마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자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서 열매로 맺게 해 주신 성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자비가 있는 삶을 살기를 명령하고 계십니다. 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우리가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빚진 자의 심정으로, 그 진 큰 빚을 갚아나가려고 하는 심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하루, 한주, 한 달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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