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

충성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4. 5. 19:15



충성

갈라디아서 5:22-23

 

1. 두 부류의 성도들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보면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나를 그 중심에 두고 있는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까지도 나를 위해 계신 분으로 이해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고 있는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서로 다른 관점은 그 가진 신앙을 완전히 달라지게 합니다.

나를 그 중심에 두고 있는 신앙은, 하나님까지도 나를 위해 계신 분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을 가져도 내가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기도를 해도 내가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아 주세요. 하나님 저를 돌보아 주세요. 하나님 제게 이것저것을 주세요.’ 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고 있는 신앙은, 하나님을 위해 자기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져도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어 살게 되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 살아가는 삶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진 이런 신앙들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기에 그 살아가는 외적 모습만 보면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잘 믿고 있고, 다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 있고, 다 예배생활과 기도생활에 힘쓰고 있으며, 경건하고 이웃을 섬기며 사는 삶에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한 사람은 나를 위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차이점은 나를 위해 신앙에 열심인 사람은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멀리 보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적인 근시안적인 관점을 가지고 자기의 바로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신앙에 열심인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멀리 보고 또 넓게 보고 깊이 있게 봅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 뜻 계획 등도 함께 봅니다.

 

2. 오늘날 교회의 현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 두 서로 다른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부터인가는 알 수 없지만 교회 안에서 나를 위한 신앙을 가진 성도가 점점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나를 위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성경에 약속해 오신 메시야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장차 올 메시야 왕국에서 자신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세상 적으로 말하면 성공하고자 출세하고자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이들은 이제 곧 메시야 왕국이 이 땅에 세워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가 오게 되면 누가 더 크냐 하는 것을 놓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에게 이모가 된다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서 메시야 왕국에 세워질 때 자기의 두 아들을 예수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까지 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언제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둔 신앙의 사람으로 변화하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에 주신 성령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된 이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제자들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완전한 신앙에 이른 때가 언제라는 것입니까?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 성령 받고 그 영이 거듭나서 영에 속한 사람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 때 비로써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신앙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으려고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 수도 없습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살아가야 하는 삶은 좁은 길이고 협착한 길이고 힘든 길입니다. 그 길을 인내하고 참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혹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시면 순교까지도 감당해야 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전하면 예수 믿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역사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병든 자는 병 고침을 받게 되고, 마음이 상한 자는 위로를 받게 되고, 가난한 자는 부유한 자가 되고, 하나님이 도우셔서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줄 알고 믿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이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로 나아오게 됩니까?

성도들이 전도할 때 예수 믿고 구원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병 고침을 받아 건강해 지고, 하나님의 지혜주심으로 그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고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그렇게 되는 줄 알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모두가 다 나를 그 중심에 두는 신앙, 내가 하나님께 받을 그 무엇을 기대하고 바라는 신앙을 가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른 신앙인 줄 압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신앙이 성장하면 이 나를 그 중심에 두고 있었던 이런 신앙은 깨어지고 부셔져서 하나님을 중심에 둔 신앙으로 바뀌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회 안에는 어떤 성도들이 많을까요?

나를 중심에 두고 있는 신앙의 사람들이 많을까요?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까요?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고 자신과 그 삶을 바쳐 헌신하는 성도들보다, 나를 중심에 두고 하나님께 내가 받을 그 무엇을 바라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훨씬 많아 보입니다.

 

3. 교회의 부흥과 성장

 

지금 한국에서는 사람들을 교회로 많이 모으기 위해, 어떤 교회들에서는 재미있는 프로그램도 도입하고, 경품을 내 걸고 그것을 탈 수 있는 경품권도 주고, 또 생활에 유용한 물품들을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주는 그런 물건들을 받으려고 사람들이 교회로 많이 모입니다.

의정부의 어떤 교회는 얼마 되지 않는 물건을 주는데도 그것을 받으려고 매주 60명 정도 모인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작은 교회에서만 합니까? 아닙니다. 요즘은 큰 교회들도 경품을 거는데 아주 값이 나가는 비싼 물건을 경품으로 겁니다. 그리고 교회의 든든한 재정으로 선물을 한 아름 안겨 줍니다. 이렇게 총동원 주일이나 전도행사를 한번 하면 곧 바로 교회 출석하는 사람들의 수가 수백 명 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교회성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의 수만 늘었지 교회 성장은 아닙니다.

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교회가 내게 주는 이익을 바라고, 교회가 주는 뭔가를 받기 위해 교회 나온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 마음 중심에 두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성경을 보아도 이런 사람들 중에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그 바라던 대로 병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바른 믿음에 서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을 다 떠나갔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고 그 주시는 음식을 먹고서도 예수님을 다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따른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과 뭔가 달랐습니다.

우리가 그 나무가 어떤 나무 인가 하는 것은 그 나무가 싹을 내는 떡잎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그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그 시초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주는 돈을 받기 위해 오는 사람, 교회에서 주는 경품을 타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녀도 바른 신앙에 이르게 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즘 한국의 선교사님들이 외국에 선교하러 나가서 돈을 주고 선물을 주며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이 모았지만 그 사람들은 예수 믿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가 주는 뭔가를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참 믿음에 서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선교방법에 대한 반성이 오늘날 선교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그 취임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 국민 여러분. 국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바라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세계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바라지 말고 우리 모두 손잡고 세계 인류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간구합시다.’

 

또 예수님께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세상 부귀영화에 목을 매고 있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라고도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을 지닌 케네디 대통령의 가치관보다 더 나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면 하늘의 나라 백성이 될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가지고 교회 성장, 교회 부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늘어난다는 것은 교회가 그만큼 참 교회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성장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이것을 교회 성장으로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참된 성장, 참된 교회의 부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드려 충성하는 성도가 되는 것이 참된 부흥입니다.

 

4. 누구를 위한 충성인가

 

교회마다 충성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충성이 누구를 위한 충성이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복을 받기 위해 충성합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충성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충성을 말할 때에도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교회에 충성하느냐 충성하지 않느냐 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누구에게 충성하느냐? 무엇을 위한 충성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갈라디아서 522절 말씀을 보면 충성은 성령이 주시는 열매라고 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 충성과성령이 그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충성은 자기를 중심에 두고,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충성입니다. 성령의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이 충성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이 충성하는 마음을 주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따라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내려 주시는 선물이 충성입니다. 그리고 이 충성은 신실하고 변함없는 충성을 말합니다. 이 신실하고 변함없는 충성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있는 성품입니다.

 

이 충성은 한 순간의 감동으로 된 헌신, 그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열정에서 나온 그런 충성이 아닙니다. 이 충성은 사람의 강한 의지와 굽힐 줄 모르는 불굴의 용기나 모험심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가진 이런 열정들은 순간적이고, 충동적이고,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람에게서 난 충성의 특징은 오래 가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람에게서 나온 충성이 가끔씩 오래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놀라운 헌신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목숨까지 바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노동운동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조직사회 속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1:16절입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이 말에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의 본부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이 올라가신다고 하시면서 앞서 가실 때, 제자들이 생명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면서도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따라 갔음을 보게 됩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며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6:31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때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6:33절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하자 모든 제자들도 다 같 말했다고 합니다. 35절입니다.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이 고백은 당시 제자들은 진실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당시 제자들의 실제 모습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4:50절에서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이런 제자들이 보여주었던 충성심은 성령이 주시는 열매로서의 충성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으셨고, 제자들은 성령이 그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충성심을 갖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그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이 충성심은 언제 주어졌습니까?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에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 그 맡겨주신 복음을 위해 순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 충성심은 언제 주어지는 것입니까?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성령을 받게 될 때 주어집니다. 이렇게 오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 줍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의 죄의 잔을 대신 마시시고 죄인이 되시어서, 또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어 주신 충성스러우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 줍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의 충성스러우심과 같이 자기도 그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험한 그대로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됩니다.

사랑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요한 14:10. 17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일이 있는 사람들만, 자신들이 경험한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잘 아는 그 제자들에게,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도 나를 통해 경험하고 알게 된 이 사랑을 세상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또 예수님께서는 겸손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일을 하신 후에 내가 이 일은 한 것은, 너희들도 이런 삶을 살게 하려고 본을 보여주셨다.’고 하시면서 겸손을 실천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예수님의 겸손한 삶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결코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도 겸손한 삶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들만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참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비유인용서 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보면, 임금에게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종이 왜 자신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임금이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준 것에 대한 감격이나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긍휼한 삶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충성에도 같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 충성스러우신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충성스러운 사람 신실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경험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신실하심, 그 충성스러움을 경험한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라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1:15-16절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그 놀라운 삶을 살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셨을 뿐 아니라, 복음의 원수로 살고 있었던 자신을 찾아와서 만나 주시고 구원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입고 빚진 자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랑해 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누구보다 더 열심히 주를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께 진 빚이 얼마나 큰 빚인가를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누구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애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어떻게 결론내릴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만큼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의 충성하심을 경험한 만큼 충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5. 경험한 만큼 충성한다.

 

사람들은 그 부모의 삶을 통해 경험한 만큼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삶을 통해 경험한 만큼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도 충성도 인내도 온유도 경험한 만큼 행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자주 흔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배우고 알게 되면 그 신앙이 견고해 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교훈하기를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를 경험하길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랑 뿐이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에 나타난 예수님의 충성과 헌신을 경험하고 알게 될 때 우리도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보통 때는 충성심이 들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에 직면하게 되면 곧 그 사람이 충성된 사람인가 아닌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고린도 후서 4:8-11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어려운 일을 만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그 일 때문에 우겨 쌈을 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요. 바울은 그런 환경적인 조건들을 넘어서는 하나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환경이 변하면 신앙이 흔들리고 또 신앙의 바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과 10명의 정탐 군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차이가 그 삶과 믿음을 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두 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같이 애굽을 탈출했고, 홍해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3일 길의 목마름을 믿음으로 참고, 인내해 내지 못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이 불평이 신앙의 근원적인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삶의 불평일 뿐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들도 이런 불평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삶 속에서도 이런 불평은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금송아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은 폐하시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만드셔서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의 구원을 담보로 한 기도로 하나님을 설득 하게 됩니다.

 

6. 그 가진 신앙이나 충성은 증명되어야 한다.

 

충성스러운 신앙은 금 같은 신앙입니다.

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충성된 신앙을 다른 말로 하면, 한결 같은 신앙, 흔들리지 않는 신앙,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을 말한다.

 

6.25 때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당으로 인해 성도들은 숨어서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는데 그 예배 처소에 공산당이 들이 닥쳤습니다. 그 공산당들은 모든 문을 잠그고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려주고 계속 믿는 사람들은 죽일 것이라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벽에 걸려 있는 예수님의 얼굴 그림을 땅에 내려놓고는 그것에 침을 뱉고 욕하고 발로 발고 지나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더 이상 지나가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 대장이 되는 사람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따로 끌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산 밑에 이르러서는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들 여기서는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남조선으로 내려가라고 하며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도망가고 있는데 자신들이 모여 예배드리던 그 건물 쪽에서 총소리가 계속 났다고 합니다. 신앙을 부인한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다 죽은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참됨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합니다.

우리 충성의 참됨도 증명되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을 통해 우리가 가진 신앙과 충성을 증명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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