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
갈라디아서 5:22-23
두 가지 온유
온유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온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타고 난 성품으로서의 온유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온유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가지게 된 성품으로서의 온유와 성령이 그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는 서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나는 성품적인 온유는 수고하고 노력하고 결단하고 도를 닦아서 가꾸어 나갈 수 있는 그런 온유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온유는 다릅니다. 이 온유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품 즉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성령을 통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온유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
성령의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이 온유는 신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주신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이 온유는 사람에게는 없는 온유입니다. 이 온유는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수고하고 노력하고 도를 닦아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너희는 온유한 사람이 되라.’라고 하는 말씀은 온유한 성품을 더 발전시키고 다듬어 나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성도들에게 온유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 열매로 주시는 온유함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성품으로서의 온유
우리가 보통 그 사람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그 사람의 표정이 따뜻하고 그 성품이 부드러운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특별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성도들보다 더 따뜻하고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온유한 마음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있는 성품으로서의 온유는 사실 사람의 타락한 성품에서 나오는 온유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얼마나 타락되었는지를 알려고 하면,‘산상설교’의 말씀을 반대로 읽으면 됩니다. 산상 설교는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 속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복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심령에 자신감이 넘치고 확신과 열정이 넘쳐흐르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는 애통하는 사람을 복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만사가 형통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만족하는 사람들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는 온유한 사람 그래서 나약해 보이는 사람을 복 있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힘 있고 능력 있고 남다른 재능이 있는 사람을 복 있다고 할 것입니다.
또 사람의 본성과 심성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바로 알려고 하면 로마서 1:18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됩니다. 몇 절만 읽어보면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이것이 성경이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일부 악한 사람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평범하고 이성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모든 사람들의 실재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판단은 한 치의 오차도 없으며 정확합니다.
만약 우리를 평가하신 이 하나님의 판단이 틀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틀리시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이 주신 성경 말씀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이렇게 악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첫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누구든지 관계없이 이 하나님의 판단에 동의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사람의 관점으로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자신을 보니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새로운 성품에 대해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성품을 알게 되면, 사람이 가지고 살아가는 성품이 얼마나 타락되어 있는지를 비로써 알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받으라.
사람의 가지고 태어난 성품과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성품은 다릅니다.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성품은 신의 성품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가지고 있다면 사실 그것은 위장된 부드러움이고 위장된 따뜻함입니다. 성령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부드러움과 따듯함은 사람의 타락된 심성에서 나온 부드러움이고 따뜻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요구하시는 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품의 변화가 아닙니다.
사람의 성품을 좀 더 부드럽게 하고 좀 더 따뜻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아주 없는 새로운 성품을 성령을 통해 열매로 맺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성품을 선물로 받으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좀 더 선해지고 좀 더 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타락된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 하나님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성품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온유에 대해
이제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온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온유라는 단어는 ‘프라우테스’입니다. 이 ‘프라우테스’는 믿음을 통해 만들어지는 온유 믿음 안에서 만들어 지는 온유를 말합니다. 이 온유에 대해 사전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온유는 나약함이 아닙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통제 하에서 하나님의 힘을 활용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온유라는 단어를 당시 희랍 사람들은 이렇게 사용하였습니다.
① 사람이 감기에 걸려 열이 날 때 해열제를 먹고 열이 내려가게 되는 것을 ‘온유 즉 프라우테스’라고 했습니다.
② 또 나무꾼이 여름에 산에서 나무를 하느라고 땀이 나고 더위를 느낄 때, 갑자기 산의 계곡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더위가 다 가시게 되는 것을 ‘프라우테스’라고 했습니다.
③ 또 조련사가 야생마를 훈련하고 길들여서 잘 길들여진 말이 되었을 때 ‘프라우테스’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온유는 ‘통제 되고,’ ‘길들여지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온유는 하나님의 통제 아래서 하나님에 의해 길들여진 성품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온유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온유는 자기 자신 속에는 이 온유함이 없음을 발견하고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제를 받아들인 사람에게 생겨나는 성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의가 허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이 온유입니다.
로마서 7장을 보면 바울도 자아 즉 옛 사람의 죄악 된 속성을 부인하였습니다.
그 때 비로써 온유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자기 발견과 자기 부인이 없는 사람은 아직 온유의 출발 선상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의를 주장하고 자기의 도덕성을 신뢰하는 사람은 아직 온유로 나아가는 길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기고, 그 가면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가면 속에 감추어져 있는 나의 비참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내 영혼의 곡간이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① 먼저 심령의 가난을 발견한 이후에 애통이 오고, ② 애통하는 마음이 온 이후에 온유가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난함이란 거지와 같은 심령상태를 말합니다. 파탄이 난 심령상태를 말합니다. 애통은 자기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발견하고 내 속에 사악함뿐임을 발견하고 그 비참한 상태를 통곡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이 두 가지 마음 상태 즉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의 상태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온유한 마음은 이제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게 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아담의 범죄 안에서 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온유는 자기의 악함을 발견하고 그 마음이 깨어지고 부서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마음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지상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기가 승했다고 합니다. 민수기 12장을 보면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죽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모세는 구스 여자를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구스 여자는 아프리카 출신의 여자로서 흑인을 말합니다.
이 때 모세의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은 이런 모세의 행위가 옳지 않다고 비방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이를 빌미로 삼아서 하나님이 세운 종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였습니다. 이 때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그런 아론과 미리암을 제제할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아무런 제제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처분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이런 모세에 대해 3절 말씀에서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라고 합니다.
그러면 모세는 어떻게 이렇게 온유한 마음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까?
모세는 전에 애굽 사람을 죽인 일 때문에 바로의 추적을 피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한 일이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으로 40년을 살면서 그 혈기가 깨어지고, 그 조급함이 부셔지고 그 모난 성품 즉 아담의 죄악 된 본성들이 다듬어지고 깎여져서 하나님이 주신 온유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이 온유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은 다 모세와 같이 깨어지고 부셔지는 기간을 거쳐 온유한 하나님의 종으로 거듭난 후에 쓰임을 받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부셔지는 기간이 없이 쓰여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사람마다 다 달랐습니다.
모세의 시종이며 눈의 아들이었던 여호수아도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기 전에 40년이란 연단의 기간을 거쳤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그 꿈이 이루어지기 전에 13년이라는 연단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다윗도 사울 왕의 추적을 피해 다니는 13년의 긴 연단을 받으면서 온유한 지도자로 거듭났습니다.
성경을 보면 요나는 3일 물고기 뱃속의 연단을 겪었고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제물이 되는 연단을 겪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에게 선교사로 파송함을 받기 까지 약 15년 정도의 연단과 훈련의 기간을 거치게 됩니다.
바울이 겪은 연단의 과정이 로마서 7장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이후에 깨닫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자기 안에서 꿈틀대고 고개를 치켜들고 일어나는 죄악된 성품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악된 성품을 이겨보려고 하지만 이길 수 없는 절망감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19절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이 죄악 된 본성과의 투쟁과 싸움은 사도바울로 하여금 깊은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절한 고백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의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바울이 아담 안에서 물려받은 죄악 되고 타락한 본성과의 이 처절한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경험하고 난 후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성령 받게 된 후에 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8: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할렐루야!
바울이 이 승리를 경험하고 난 후에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으며, 온유한 전도자로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아 아시아와 유럽에 수많은 교회를 세우게 되는 전도자로 살게 됩니다. 이후 바울은 성령이 그 열매로 주시는 온유를 소유한 행복한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괴로움이 오는 이유
사람들에게 괴로움이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나를 주관하고 내가 나의 삶을 주관하며 살려고 할 때 괴로움이 오게 됩니다. 바울이 자기의 삶을 자기가 주관하려고 할 때 그는 많은 괴로움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을 의뢰하게 되면서 비로써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피곤해 지는 것은 자기 욕망의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유지하고 살려고 하면 먼저 자기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또 사람들은 자기의 악한 감정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감정을 다 내려놓아야 평안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쉼과 평안을 누리는 방법은 그 삶의 고달픔 들을 벗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참된 쉼은 예수님의 멍에를 함께 지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데서 온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1:28-30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성경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는 것이 바로 참 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을 누리게 될 때, 그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 마음 안에는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해 주시는 온유한 마음이 없으면서도,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참고 또 참으면 이것이 마음의 스트레스 요인이 되어서 결국 그 마음이 상처를 입고 병들게 됩니다. 사람들이 불면증에 걸리고,우울증에 걸리고 신경쇠약과 정신병에 걸리는 것은 온유한 마음이 없으면서 온유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참고 참다가 일어나는 병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게임이 바로 두더지 게임입니다.
두더지가 고개를 내 밀 때마다 그 두더지를 미운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막 때리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골방에 들어가서 벽을 향해 막 욕을 하여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목사님은 샤워하러 욕탕에 들어가서 샤워하면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고 합니다.
또 온유한 마음이 없으면서도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참고 또 참으면 정신 뿐 아니라 육체도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부신과 갑상선이 정상 이상으로 다량의 호르몬을 분비시키게 되어 육체의 건강에 커다란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됩니다.
스트레스가 정신과 육체에 큰 타격을 주고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이제는 상식입니다.
스트레스를 참고 참다가 보면 그것이 결국 심장병으로 나타나고, 암으로 나타나고 이유도 없이 몸을 쇠약하게 하고 병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의사들이 하늘 말 중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신경성이라는 말입니다.
요즘에는 의학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온유한 마음이 없으면서 무조건 참다가 생기게 된 병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사람에게 없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실 때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온유한 마음은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하나님을 향한 온유함으로 나타납니다.
둘째, 자기 자신을 향한 온유함으로 나타납니다. 셋째, 사람을 향한 온유함으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5:5절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기업으로 땅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느 날 노아에게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너는 산 위에다 배를 만들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주신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짓고 또 방주 안에 들어갔던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홍수 후 온 땅을 그 기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보면 포악하고 강퍅한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 반대입니다. 포악하고 강퍅하여 온 땅을 차지한 것 같았던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은 결국 무너져 없어졌으나,전쟁에 지고 포로가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땅을 그 기업으로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뿐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들이 우리 앞에 도래하고 있는 천년 왕국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온유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온유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땅을 기업으로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들에게 그 예비하신 천국을 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 온유한 마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기 위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은혜로 선물로 맺게 해주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로 주신 이 온유한 마음을 받은 사람들은 그 주신 온유한 마음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이 온유한 마음이 하나님이 주신 성령이 열매로 맺어 주신 이 온유한 마음이 우리의 삶 속에 풍성한 열매를 맺어 나갈 수 있도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더욱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 한 주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