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해야 하는 일
마태복음 28:19-20
이 세상에 세워져 있는 모든 기관마다 각자에 맞는 할 일이 있습니다.
병원에서는 병자를 돌보는 일을 합니다. 약국에서는 약을 파는 일을 합니다. 우리가 많이 이용하는 슈퍼에서는 식용품을 파는 일을 합니다. 가끔 외식할 때 들르는 음식점에서는 음식을 파는 일을 합니다.
우리가 머리를 깎으려고 미용실에 갔는데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지 않고 여자 몇 사람이 모여 앉아서 고스 톱 이나 치고 있다면 그곳은 더 이상 미용실 간판을 달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고스 톱 도박장이라고 간판을 갈아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니는 교회도 교회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8장의 말씀에서는 교회가 할 일에 대해 5 가지 동사를 써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서” “제자를 삼아”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
우리가 한국말로 번역된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다섯 개의 동사로 표현되고 있지만, 성경의 원래 언어인 헬라어를 통해서 보면 본동사는 “제자를 삼으라.”라고 하는 하나이고, 그 외에 있는 것 즉 “가서” “세례를 베풀라” “가르치라” “지키게 하라”라는 말들은 본동사에 붙어 있는 분사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마태복음 28:19-20절 말씀을 이렇게 다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를 삼기 위해서 가라”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베풀라” “제자를 삼아서 가르치라” “제자를 삼아서 지키게 하라”라고 다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제자를 삼기 위해 “가라” 고 합니다.
“제자를 삼기 위해 가라”라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생활하면서 이웃집에도 가고, 상가 집에도 가고, 잔치 집에도 가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갈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갈 때 무슨 목적을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까? 이 때 복음을 전할 목적을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8장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오래간만에 친한 친구를 만나는 이유도, 우리가 이웃집에 가는 이유도, 우리가 상가 집에 가는 이유도, 우리가 친척 집에 가는 이유도, 우리가 잔치 집에 가는 이유도, 다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큰 은혜로 거져 값없이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라면,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주신 다는 것을 아는 우리들이라면, 우리들은 그냥 쓸데없이 시간 보내러 친구만나고, 그냥 놀기 위하여 친구를 만나러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시간 안에 주어진 일을 다 하고 살아야 하는 우리라면, 그냥 시간을 낭비하면서 친구 만나러 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의 말씀에서는 우리가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내가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아야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교회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제자를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누군가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어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신앙을 전해 받아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태어나면서부터 신앙을 가지거나 배운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의 수고와 노력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를 믿고 예수의 제자가 된 우리들도,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여 준 그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내 제자를 삼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가서 사람을 만나고 또 만나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꼭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주시는 평안을 꼭 가지고 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만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그냥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는 욕도 먹고, 나쁜 소리도 듣고, 또 친절도 베풀고, 수고하고 애쓰는 희생과 헌신이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라는 말만 전해주고 돌아오게 되면 별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게 하고 또 이 사람을 제자로 삼아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려고 할 때에는 다릅니다. 남모르는 희생과 수고와 눈물과 헌신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생과 헌신이 없이 제자는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라고 그냥 전하고 오지 못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믿으라고 하며 복음을 전해 준 그 사람이, 우리가 전한 데로 정말 예수를 믿게 잘되면 좋겠지만, 그 중에는 예수를 믿은 후 그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 때 우리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해서 내가 그 말을 믿고 예수를 믿었는데, 왜 나의 삶에는 이렇게 고난이 오느냐고 물을 때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어지게 됩니다.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녀는 누가 책임져 줍니까? 부모가 책임져 줍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 사람은 누가 책임을 져 줍니까?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또 그 사람을 책임져 주실 분은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복 받습니다.’ 라고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중요한 알맹이를 빼어놓고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해 온 것이, 유일한 진리를 가진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같은 수준으로 내려놓았습니다.
어느 종교든지 가 보십시오.
다 그 종교를 믿으면 복을 받게 된다고 전합니다, 소원성취를 하게 된다. 다음 세상에서 좋은 곳에 가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라고 전도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를 믿든지 다른 아무 종교를 믿든지 같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유일한 종교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전도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생명이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3일 만에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그 사람은,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전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야하는 것입니다. 이웃집에도 가야 합니다. 초상집에도 가야합니다. 잔치 집에도 가야 합니다.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자녀들도 만나러 가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제자를 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라고 합니다.
다음은 “가서”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주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마치 결혼식과 같은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 함께 부부가 되어서 살면서도 결혼식을 안 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면서도 세례를 받지 않고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결혼식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결혼식을 하지 않고 살아도 아이 낳고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그 마음속에 뭔가 채워지지 않는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T.V를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들과 딸을 장가보내고, 시집보내 놓고, 80을 훨씬 넘긴 나이에 늦은 결혼식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환경이 어렵고, 여건이 안 되어서 결혼식도 하지 못하고, 둘이 살짝 물 한 그릇 떠놓고 결혼을 서약하신 분들이, 아들 딸 결혼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도 아쉬워서 늦게 결혼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그 순간이, 사실 우리가 영적으로 세례를 받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공식적으로 공포하는 예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여가 그 사랑을 확인하는 결혼식을 하고 부부로 살 수도 있고, 결혼식을 하지 않고 그냥 호적에 부부로 올려놓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식을 하지 않고 그냥 사는 부부와, 결혼식을 하고 사는 부부는 그 마음 자세가 다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냥 신앙생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과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식적으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례를 받지 않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과 세례를 받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신앙 생활하는 그 마음 자세가 다릅니다.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고 난 후, 그 사람에게 이제 예수를 믿은 지도 오래 되었으니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는 아직 세례 받을 준비가 덜 되어서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될 때 완전한 남자이기 때문에, 혹은 완전한 여자이기 때문에 결혼을 합니까? 아닙니다. 만약 완전한 사람들이 결혼하면 결혼한 후에 서로 다투거나 싸울 일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다투기도 하고 싸움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산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10년 20년이 된다고 해도 여전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정도가 되면 세례를 받겠다고 하는 것은 마치 내가 완전한 남자 완전한 여자가 된 후에 결혼을 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결혼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직 불완전한 성도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결혼했다고 공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공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표해 놓으면 나는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책임을 다 해야지 하는 책임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 믿는 성도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지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살아나가면서 하나하나씩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
세례를 뒤로 미루는 사람들은, 이렇게 고쳐 나가는 진보를 늦추는 것과 같습니다.
- 교역자들이나 전도한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라고 권고할 때 순종하여 세례를 받으면 그 사람의 믿음이 성장해 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히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 신앙은 부쩍 부쩍 자라는 것입니다.
-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를 초청하여 아무도 모르게 자기 혼자 살짝 세례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는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공식적인 예배 현장에서 온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식적으로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공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결단을 통해 신앙이 커 가는 것입니다.
- 우리가 새로운 곳에 갈 때 내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라고 공포해 놓고 생활하는 것과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고 생활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공표해 놓고 친구를 사귀게 되면 나는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내 신앙도 생활하면서 부쩍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을 숨기고 생활하다가 보면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해 나의 믿음을 성도들 앞에서 공포했듯이,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늘 공포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의 유익을 주고 또 전도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셋째, “제자를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까?
먼저는 예배를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정한 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행위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생활 전부에 실패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에서 은혜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일 예배에 성공해야 한 주간동안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마음을 가다듬고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 예배 시간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나 예배 시간에 늦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 늦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그 사람 속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될 때도 시간을 어깁니까? 우리가 사업의 명암이 걸려 있는 중요한 거래처 사람을 만날 때도 시간을 어깁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교통이 막힐까봐. 돌발사태가 발생해서 시간에 늦을까봐서 먼저 나가서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더 신경을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정한 시간에 이렇게 늘 늦는 다는 것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배에 지각하는 것은 습관입니다. 습관 중에도 아주 나쁜 습관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일찍 하나님을 만나러 나오고 또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주시길 기뻐하십니다. 적어도 우리들은 예배 10분 전에는 예배드릴 준비를 다 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전해질 말씀도 찾아놓고, 찬양도 찾아놓고, 주보의 소식도 읽으면서 예배드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배를 방해하는 요소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은 와 있으나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은 이 문제에 관심을 써야 합니다.
예배 중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시간이 있습니다.
이때는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찬양으로 영광 돌리는 시간입니다. 찬양시간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찬양을 하면서 집에 gas 불은 끄고 왔는지, 문은 잘 잠그고 왔는지를 걱정하면 바른 찬송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입술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찬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찬양이 나의 신앙고백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찬양하면 찬양하면서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대표기도시간에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오늘 기도는 이렇게 길지, 왜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하지’,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다른 생각을 하기 보다는 대표기도 하는 것에 마음을 함께 하여 아멘으로 기도에 동참해야 합니다. ‘아멘은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대표기도가 이루어질 때는 믿음으로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설교 시간에 조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설교시간에 졸지 않도록 단단히 준비해야 합니다. 설교시간에 졸지 않기 위해서는 토요일에 일찍 자야합니다.
헌금시간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으로부터 받고만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공기를 주시고, 물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친구를 주시고, 자녀를 주시고, 가족을 주시는 등등 하나님께 받지 않고 우리가 창조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받아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시는 시간은 오직 헌금시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신실한 사람들은 내 모든 것 드려도 주 은혜 값을 수 없다고 하면서 생명까지 드리며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헌금시간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님이 사 주시는 선물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선물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성적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결혼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거기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세상을 떠날 때를 생각하고 준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날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마음이 가 있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 표현됩니까? 바로 헌금으로 표현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헌금은 아까워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에는 돈을 쓰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생색이 나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생색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헌금하는 행동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가 끝날 때 언제나 목회자는 오늘 말씀대로 성도들이 순종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삶을 살기를 소원하며 축복기도를 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큰 교회를 가보면 어떤 사람들은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축복을 하기 전에 먼저 교회를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태도 속에서 우리들은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예배에 실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또 교육과 훈련이 있습니다.
아직 우리교회에서는 주일학교 장년부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오후 시간에 신앙의 가장 기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교육과 장년 교육 그리고 수련회를 영성집회를 통한 성도들의 신앙훈련도 해야 합니다. 새 가족반, 장년 부 성경학교, 제자훈련, 교리공부, 주일학교 교사 양성 반 등등 수많은 교육과 훈련 프로그램을 시행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교육과 훈련을 통해 성도들의 신앙이 성숙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 배운 바를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가 해야 될 일들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배우고 신앙을 배우는 제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또 세상 사람들을 나의 제자로 삼아 나가는 전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라고 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를 위해 일하고자 할 때 주를 위해 살 수 있도록 능력도 주시고 또 우리의 삶의 필요들까지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서 제자 삼는 삶을 결단하므로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이 한 해의 살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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