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9:57-62절, 제목: 우선순위의 삶
본문 말씀의 내용은 주님을 따르려는 제자들의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일은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될 일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이것을 잘 선별하고 실행하는 일이야 말로 성공과 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한때 미국의 부시대통령 시절에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로 일했던 재미동포인 강 영우 박사의 저서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경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루빈 씨가 회장으로 있는 세계적인 금융회사 시티그룹 세미나에서 있었던 일인데, 강사가 강의 중에 항아리 하나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간단한 실험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때에 강사는 먼저 항아리에 큰 돌로 채우고 청중들에게 이 항아리가 채워졌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강사는 책상 밑에서 자갈 자루를 꺼내서 항아리에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강사는 다시 물었습니다. 항아리가 채워졌나요? 사람들은 이번에는 글쎄요 라고 대답했더니 강사는 다시 모래주머니를 꺼내 항아리에 부었고 마지막으로 항아리에 물을 부었습니다.
여기서 이 간단한 실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돌, 자갈, 모래, 물 가운데 한 가지 또는 두 가지만으로 항아리를 채웁니다. 또는 자갈이나 모래로 먼저 항아리를 채워 큰 돌은 넣어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큰 돌을 항아리에 제일 먼저 넣지 않으면 아무리 애써도 다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선순위를 정해서 큰 돌, 자갈과 모래와 물의 순서대로 넣으면 이 네 자기를 조화롭게 항아리를 꽉 채울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첫째로, 즉시 따르려는 사람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9:57절 말씀에 보면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 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배척을 받아 정처 없이 다니실 때에 어떤 사람이 말하면서 어디로 가시든지 주님을 좇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씀이 가리키는 “어떤 사람”은 평행구절인 마8:19절 말씀에 보면 이 사람은 서기관을 가이키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학식과 재력, 권력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상위계층에 있는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이 예수님의 어떤 점을 좋게 보고 따라 가려고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권능에 매력을 느끼면서 제자들의 믿음직한 모습에 부러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진실로 따르는 사람에게 있어서 영광만이 아니라 고난도 있다는 것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 제자 되기를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마태복음 16:24절 말씀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편 23:6절 말씀에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일이나 공휴일에 지하철을 타보면 많은 사람들이 패션이 좋은 등산복을 차려입고 배낭을 메고, 부부간에 또는 친구들끼리 등산을 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오늘날과 같이 바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쉬는 날을 이용해서 운동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고 하루를 경쾌하게 보내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날은 몰라도 주일날은 등산이 가고 싶어도 산으로 가지 말고, 교회로 와서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마쳐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런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원합니다.
둘째로, 망설이는 사람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9:59절 말씀에 보면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사람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장례식은 가정을 비롯한 종교적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일을 하기에 앞서 돌아가신 고인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 가장 먼저 우선권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죽은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하는 제사장들도 친척이 죽은 경우에는 시체를 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장례를 치르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고자 없이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일은 이생과 내생에서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된 사람의 행위로 여겼던 것입니다. 반면에 그 당시의 사회 풍조가 이런 만큼 부친의 장례를 치르는 일을 소홀히 여긴다는 것은 더구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명분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합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죽은 사람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야 말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이요, 무엇보다 최우선 순위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3:6절 말씀에 보면 “내 주여 들어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저는 정말 안타까운 글을 읽었습니다. 내용 요점은 어느 큰 저택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 집 여주인은 겁에 질려 홀로 뛰쳐나왔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갑자기 다시 불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귀중품이 들어있는 보석 상자를 안고 나오면서 “아, 이제 살았다. 내 귀고리, 내목걸이, 내 팔찌, 모든 보석을 다 찾았다, 참으로 다행이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사람들이 “저기 보세요. 아이들이 불이 난 집의 창가에 있어요.”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아이들이 아직도 불 속에 있음을 알고는 발을 동동 구르며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었지만, 이미 불은 아이들의 생명을 삼켜버렸습니다. 그 여인은 물질에 눈이 어두 어서 보석 상자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다보니, 자녀들의 귀중한 생명을 건지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 여인의 우선순위는 자식들의 안전보다 보물 상자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세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9:61절 말씀에 보면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 사람은 자신이 주님을 좇겠다는 것을 전제하고 조건을 말했는데,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부탁은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멀리 타향으로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떠나기에 앞서 가족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게 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요 인지상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장면은 열왕기상 19:20절에 나오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기 전에 먼저 가족과 마지막 입맞춤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과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62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볼 때에 이 사람의 마음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염려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가족을 만나서 작별인사를 하는 중에라도 가족들이 만류가 있을 경우에는 그만 인정에 끌려서 발목이 잡힐 가능성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복잡한 사회생활 속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우선순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주님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제자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이러한 상태를 미리 아시고 결단을 요구하신 것은 매우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62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는 농부들이 논이나 밭을 가는데 사용하는 농기구입니다. 여기서 손에 쟁기를 잡았다는 것은 곧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사람의 유일한 목표는 밭고랑을 곧게 가는 일인데, 만일 밭을 갈다가 뒤를 돌아보다거나 다른 것에 치우친다면 밭고랑을 곧게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쟁기를 잡은 사람들은 다른 것에 미련을 두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함으로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쟁기질하는 것은 굳어진 땅을 파해 치고 그 속에 있는 단단한 흙을 부수고 또 땅속에 깊이 있는 흙과 겉의 흙을 골고루 썩어서 씨앗을 심기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미래를 개간하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분명히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일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시고 사시는지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시는지요?
이제부터 중요한 일을 우선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선할 때 은혜가 충만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실패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가진 문제 중에 하나는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신학자 존 네이스빗은 “우선순위를 잘못 정하면 삶의 목표에서 멀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제목인 “우선순위의 삶”에서 첫째로, 즉시 따르려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망설이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세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온 성도들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공생애를 사시면서 바쁘신 가운데서도 우선순위를 정하여 구속사역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로서 복잡하고 바쁜 이 세상 삶에서 우선순위를 잘 지키고 살아가심으로서 항상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9년 11월 24일 (참빛교회)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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