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수아 14:10-15
사건의 배경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셔서, 그 조상들에게 약속해 오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출애굽 사건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이상 되었던 성인들 중에서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 여호수아 갈렙 두 사람과 함께, 애굽에서 나올 당시 20세 이하였던 아이들과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한데, 어떤 사람들은 그 약속을 받아 누리며 살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약속을 받아 누리며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 문제를 여호수아서 14장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아 누리며 살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아 누리며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첫째, 믿음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믿음은 그 하며 사는 언어로, 행동으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마음 안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믿음의 말을 하고, 믿음의 행동을 하고, 믿음으로 그 주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불신의 말을 하고, 불신의 행동을 하고, 불신을 토로하며 살아갑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며 산 말이 무엇입니까?
그 삶에 어려운 문제만 다가오면 곧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 애굽에서 나와서, 혹은 광야에서 태어나서, 40년 동안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아온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는 훈련을 40년 동안 해 온 결과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을 만나게 되더라도 하나님을 믿었고, 또 그 주신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광야에서 받은 훈련이 무엇입니까?
매일 매일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만나라는 양식을 거두어 먹으면서,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훈련을 40년 동안 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믿음이 없어서 내일 혹시 주지 않을지 모르니 많이 거두어서 내일 먹을 양식을 저장해 두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께서 ‘안식일 전날에는 두 배로 거두어라.’라고 하시면서 ‘내일은 안식일이니 만나를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어도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려고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40년 동안 한 번도 약속을 어기시지 않으시고 주시는 그 만나를 거두어 먹으면서, 이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보내 주실 때에는 고기를 거두어 먹으면서 순종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하며 사는 삶을 통해서도 순종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이 되어갔습니다.
이런 훈련을 40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온 그 조상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급류가 되어 흘러내리는 범람하는 요단강이 그 앞을 막고 서 있는데도, 하나님이 그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 하시자, 이들은 단 한 마디의 불평도 원망도 하지 않고 법궤를 매고 앞서 가는 제사장들을 따라 믿음으로 요단강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순종하는 이 모습을 보시고 요단 강물을 위에서부터 끊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물이 끊어진 요단강의 마른 바닥을 밟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또 여리고 성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길갈 평원에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모든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할례를 받아 고통하고 있을 그 때에 가나안 사람들이 쳐 들어오기라고 한다면, 한번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전멸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왜 하필 여기에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까?’ 라고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라고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그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은 ‘이제 애굽의 수치가 물러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땅의 이름을 ‘길갈’‘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리고 성의 점령사건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6일 동안은 여리고 성을 한 바퀴씩 돌고, 제 7일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돈 후에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면 성을 바라보고 ‘여리고 성아 무너져라.’라고 소리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하다고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에서 출발하여 여리고 성을 한 바퀴 돌고 다시 길갈로 돌아오는 데는 약 반나절이 걸렸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6일 동안 이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제7일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돈 후에 제사장들이 부는 양각 나팔 소리를 듣고 모든 백성들이 그 성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견고한 여리고 성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너진 성벽을 밟고 여리고 성으로 들어가서 점령하였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말씀들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상식에도 맞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❶ 모맥 거두는 시기에 범람하고 있는 요단강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이나 ❷ 적들이 다 내려다보고 있는 길갈 평원에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말씀이나, ❸ 여리고 성을 하루 한 바퀴씩 돌고 제 7일에는 입곱 바퀴를 돌면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들은, 사람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기에,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그 순종하는 삶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는 나타났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요단강을 밟았더니 요단강은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길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할례를 행하였더니 애굽의 수치가 물러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여리고 성을 돌았더니 그 견고한 성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과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의 중요한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첫째, 그것은 믿음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은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고,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또 이 두 백성들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둘째, 거룩함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이후 가나안 땅을 점령해 나가는 과정을 보면, 그 삶의 거룩함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점령 한 후에 아이 성이라는 작은 성을 점령하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원인을 찾아가던 중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룩함을 잃어버린 것을 찾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점령하게 됩니다.
그 과정 속에 아간이라는 사람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져서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시날 산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이나 되는 큰 금덩이를 장막 밑의 땅을 파고 감추어 두게 됩니다.
이 아간의 범죄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는 그 거룩 성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 성을 상실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해 주실 수가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 성을 상실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먼저 싸우시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두 가지가 꼭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들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해 줍니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도 교회의 사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가 세상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고, 우리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백성다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려고 하면 첫째는,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둘째는, 어떤 유혹들도 다 이겨내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행하며 살 때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거룩한 삶으로 세상을 변혁시켜 나가는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멘.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에서도 같았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두 가지를 굳게 지켜 행함으로, 가나안의 31 왕들을 다 물리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서 1-12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해서 가나안의 왕들은 다 물리쳤지만 그 왕이 지배하고 있는 백성들은 아직 그 땅에 남아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서 13-21장까지는 이렇게 가나안 백성들이 남아 있는 그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해 주면서, 너희가 남아 있는 가나안 백성들을 쳐서 물리치고 기업으로 받은 그 땅들을 정복하여 차지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왜 가나안의 왕들만 물리치고, 그 백성들이 남아 있는 상태로 기업을 분배해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가나안 백성들을 다 죽인 후에 그 땅을 분배해 주었더라면 더 이상 가나안 사람들과 싸우지 않아도 될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백성들을 남겨 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일군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우리 구원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절에서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을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 주셔서, 사단의 머리를 깨부수심으로 승리를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사단의 졸개들뿐입니다. 그리고 그 남아 있는 사단의 조무래기들을 처리하는 일을 제자들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단의 조무래기들을 다 없애버릴 능력이 없으셔서 그렇게 두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사단의 조무래기들을 처리해 나가는 일을 행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동역하는 동력 자가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목양의 일, 전도하는 일, 선교하는 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일 등등은,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일군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신 하나님의 배려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너희가 가나안 땅에 남아 있는 그 백성들을 쳐부수고 그 땅을 점령하여 취하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존귀한 하나님 나라 일군으로 세워주시려는 계획에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가나안 백성들을 남겨 두신 이유는
둘째,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가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천국으로 데려 가시는 것이 목적이시라면 우리가 예수 믿을 때 바로 데리고 가시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군더더기가 없이 아주 깔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들을 이 세상에 더 놓아 두셨습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첫째, 예수 믿고 구원 받아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일군으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둘째,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갈등하며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 가시기 위해서이십니다.
이런 삶의 과정을 우리는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가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성도들이라면 반드시 성화를 이루어가는 삶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점점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성화가 없는 사람들은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공짜로 줍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지금 너를 위해서 이 정도 돈을 쓰고 있으니, 너는 나중에 커서 받은 이 모든 것들을 갚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녀에게 기대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가진 부모라면 자녀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 자녀로 자라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또 부모된 자신이 나중에 늙어 힘이 없게 되었을 때에는 자녀가 도움을 주길 바랄 것입니다.
자녀들이 철이 든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부모가 자기에게 가진 기대와 희망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자녀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든 자녀의 모습입니다.
예를 들면 모든 부모는 자녀가 학생 때 공부를 열심히 하는 성실한 아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 나중에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자녀가 철이 들지 않았다는 것은 이런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리 공부하라고 하여도 잔소리로만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자녀가 철이 들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모가 자기에게 가지고 있는 기대를 이해하고 그 기대에 부응하며 살려고 하는 것이 철이 든 모습이지요. 이런 자녀들이 많지 않은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혹 철이 일찍 든 이런 자녀가 있다면 부모는 기대를 걸어 볼만 하겠지요.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경우에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공짜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시면서 우리들에게서 기대하시는 것이 있으실까요? 없으실까요?
기대가 있으시다면 무슨 기대가 있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일을 우리들에게 맡겨 주시면서, 그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일을 잘 감당해 주기를 기대하시겠지요. 이런 예수님의 기대가 유언으로 주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6:15-16절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누가복음 24:48-49절입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1:15절 이하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사도행전 1: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날은 이 명령에 순종하여 세상에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은 아주 힘이 드는 일입니다.
힘들어도 이 일을 하면서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이런 삶을 누구보다 충성스럽게 살았던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6절에서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고,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는 삶을 살고, 그 받은 복음을 세상에 전해 주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재림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게 되고, 또 그 수고하고 헌신한 일에 합당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왕들은 다 멸하고, 그 백성들을 남겨 두신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아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정복해 나가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갈렙의 요구
이런 하나님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던 유다 지파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헤브론 산지를 자신에게 기업으로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자신이 그 땅과 백성들을 정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겠다는 것입니다.
갈렙이 헤브론 산지가 있는 땅을 요구한데는 이런 근거가 있습니다.
전에 가데스바네아에서 모세가 12명의 정탐 군을 보냈을 때 10명의 정탐 군들이 부정적이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40일 동안 보고 경험한 일들을 종합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백성들과 싸워서 이기고 정복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보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신앙으로 이끌었고, 낙담하고 좌절한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를 원망하고 대적하고 범죄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달랐습니다. 갈렙은 그 보고 듣고 경험한 현실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들은 장대한 족속이었고, 성벽들은 견고하고 높았으며, 철병거로 무장을 하고 있는 강대한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과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대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니, 가나안 사람들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보고 했었습니다.
이제 약 45년이 지난 지금 갈렙은 그때 일을 회상하며 헤브론 산지를 자신에게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1:3절입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갈렙은 내가 전에 가나안 땅을 정탐하려 다닐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너희가 발로 밟는 모든 땅을 주실 것이라고 하신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는 이 헤브론 산지를 정탐할 때 믿음으로 밟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산지를 내게 기업으로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헤브론 산지를 기업으로 받은 갈렙은 이 견고한 성을 쳐서 점령하는 사람에게는 첫째, 내 딸 악사를 신부로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 사위를 삼겠다는 말입니다. 둘째, 산지에서는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샘물입니다. 갈렙은 그런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보물 제 1호와 2 호인 윗 샘과 아랫 샘도 함께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갈렙은 45년부터 자기가 꿈꾸고 있던 헤브론을 점령하는데 자기의 가장 귀한 딸과 우물을 보상으로 내 걸었습니다. 갈렙이 이렇게 한 이유는 헤브론을 점령하는 것이 갈렙의 중요한 신앙의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겠습니까?
갈렙은 그 나이 85세 때 헤브론이라는 강한 나라, 견고한 성을 쳐서 부수고, 그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믿음 안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습니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목표가 있습니까? 그것을 이룰 때까지 간직하고 살아가는 목표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기업인으로 성공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학자로서 성공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로서 성공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룬 우리의 성공이 이 세상 속에서 이룬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성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정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는 것이 성공한 삶이 아니겠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자신이 살아온 성공한 삶에 대해 이렇게 증거 하지 않았습니까? 디모데 후서 4:6절 이하입니다. ‘전재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내가 살아 있는 동한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 끝까지 살아가는 것이 성공한 삶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그날까지 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해 나가야 하는 우리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까? 누가복음 12:35-38절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는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이런 태도와 자세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와서 이렇게 행하며 사는 성도들을 볼 때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런 성도들의 수종을 친히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진정한 영광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성공은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수고하고 애쓰며 힘써 행해온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서 받게 되는 영광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받게 되는 영광은 그 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게 될 영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너무 적은 영광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업이 잘 되어서 세계적인 기업을 이루므로 되는 그 영광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게 받게 되는 그 영광과 비교해보면 부스러기 영광에 불가합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종들 충성된 종들이 받게 될 참 영광을 그 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날 받게 될 영광을 바라보고 오늘 수고하고 헌신하는 삶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더욱 힘들고 어려운 시대가 올 것입니다. 왜 이런 부정적인 예측을 합니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면 연령층이 낮아질수록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하면 예수 믿는 학생들의 숫자가 미전도 종족 사람들이 예수 믿고 있는 숫자와 비슷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나라 현실은 선교사가 되어서 외국에 나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과 함께, 한국의 후세대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학생들 중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수의 믿는 자녀들도 성장하여 상급학교로 진학을 가면서 하나 둘 교회를 떠나가게 됩니다. 이대로 가면 한국교회는 결국 유럽의 교회와 미국의 교회와 같이 쇠퇴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이런 우리 시대에 우리들이 갈렙과 같이 믿음으로 밟아야 할 헤브론 산지는 무엇입니까?
❶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의 믿음을 계승해 나가도록 각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❷ 교회적으로는 바른 믿음에 성도들을 세워 나가려는 특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❸ 세상 속에서는 절대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에게, 유일하신 하나님 이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전해주고 심어 주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떠난 이후에도 이 땅에 믿음의 사람들이 남아서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섬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꿈을 꿀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자신이 가지고 살아야 할 믿음과 비전을 확고하게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하여 이 일을 해 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아침에 식사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김밥이나 토스트를 구워주는 일을 생각한 일이 있습니다. 저녁에 퇴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가족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군고구마를 굽는 일도 생각한 일이 있습니다. 또 여름에는 시원한 음료수 나눠주기, 쌀쌀한 날씨가 되면 상가에 커피 나눠주기 등등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경비도 많이 들뿐 아니라, 또 헌신하는 사람의 수고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 본 것이 겨우 토요일에 아이들에게 떡 복기 요리해 주기, 놀이터에서 풍성 만들어 나눠주기 등을 해 보았을 뿐입니다. 또 사회단체인 나눔과 기쁨에 소속되어 나눔을 실천해 보기도 했습니다.
또 지금 많은 교회에서는 노인 사역을 통해 그 생애를 얼마 남기지 않고 있는 노인 분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먹을 것을 나눠 주면서 전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수고와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우리는 85세가 된 갈렙이 젊은 날의 꿈과 비전을 잊어버리지 않고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산지를 요구하였듯이, 우리들이 가진 생각과 계획과 꿈과 비전을 다시 새롭게 재정립하여 하나님께 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실천해 나가려는 결단이 필요해 보입니다.
어린이 추천 도서 중에 100원의 행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100원의 행복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공짜로 주면 부담스러워합니다. 저도 목이 마를 때 전도하시는 분들이 커피나 음료수를 나눠 줄 때, 공짜로 먹는 것이 미안하여서 먹고 싶지만 먹지 않고 지나간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100원을 내고 무엇을 먹고, 100원을 내고 무엇을 가지고 가게 하니까, 아이들이 자기 돈을 내고 먹고 받아가니까 부담도 없어하고 인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100원 받고 부침도 부쳐 주고, 100원을 받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떡 복기도 나눠주고, 어떤 사람들은 100을 받고 택시까지도 태워주며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전도가 훨씬 쉽더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향해, 주께서 맡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일 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 속에서 이 일을 해 나가는 교회가 된다면, 우리 교회는 있으나 마나 한 교회가 아니라 이 시대가 꼭 필요로 하는 교회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어 가는데 힘과 역량을 집중해 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즐기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살펴보면 이 땅에는 우리가 즐길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명예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입니까? 부도 명예도 성공도 이루어 놓고 보면 별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노벨상을 받았다고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님을 잘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샴페인을 터뜨릴 생각은 하지 말고, 이 땅에서의 성공에 너무 집착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보면 이 땅에서의 성공을 위해 일하시지 않으셨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을 위하여 성육신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생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일에 다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인자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대속 제물로 주려고 오셨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무엇을 목표로 삼고 살아야겠습니까?
갈렙은 헤브론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비전과 믿음을 가지고 그 땅을 밟았고, 40년이 지난 후에는 그 헤브론 산지를 유업으로 줄 것을 구하였으며, 그 땅을 정복하는 사람에게 자기의 딸을 주며, 자기의 보물 1, 2호였던 윗샘과 아랫 샘도 주며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할 산지는 무엇입니까?
사람들마다 그 구하는 산지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들도 갈렙처럼 하나님께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기도하며,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일에 희생하고 헌신하고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는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상계동 지역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일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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