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하는 기도(눅18:1-8절)
들어가는 말
지난 시대에 유명했던 권투선수인 조 프레이저는 1964년 동경 세계 올림픽에서 가장 값진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런데 그때 열심히 경기하던 중에 준결승에서 오른손 손가락이 하나 부러졌습니다. 그는 호텔에 돌아와서 부러진 손가락을 붙잡고 밤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아픈 손에 글러브를 끼고 열심히 싸워 상대방을 이기고 KO 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승리 후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금메달을 딴 것은 내 목표를 세워 놓고 끈질기게 기도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는 은퇴하고 훌륭한 전도자가 되어서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때로는 어렵고 힘든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가장 확실한 문제 해결의 방법은 끈질긴 기도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인내하는 기도” 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본문 말씀에도 인내하는 기도에 대한 비유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인내하며 구하라고 하는 기도의 원리를 제시함으로서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기도 자세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핵심인 7-8절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가운데서 고통 받으며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의 억울함을 반드시 풀어 주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비유의 중요한 목적은 주님의 제자들이 인자가 재림할 때 까지 낙망치 말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끈기 있는 기도의 자세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1절에 보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여기서 항상 기도하라는 것은 오직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매 순간 마다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영혼의 호흡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숨 쉬지 않는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기도를 드리지 않는 성도는 이미 영적인 상태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함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롬12:12절 말씀에도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늘나라의 소망을 바라면서 즐거워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도 참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힘써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입장에도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소망이 있고 미래가 있는 사람들 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살전5:17절 말씀에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계획을 알지 못하고 기도하다가도 낙심하거나 싶게 포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되 적절한 때에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따라서 어떤 기도를 언제 어떻게 들어 주시는지는 아무도 속단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날 때 나이가 75세였는데, 이때 하나님께로부터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받고 25년이 지난 100세가 되었을 때에 아들이삭을 낳는 응답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긴 세월 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진 일을 사람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편 본문 2-5절 말씀에 보면 비유에 나오는 재판관과 한 과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2절 말씀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을 6절 말씀에는 불의한 재판관 이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재판관은 법학을 공부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법관이 된 사람입니다. 반면에 한 과부는 남편과 결혼하여 살다가 어떤 사건으로 홀로된 사람입니다.
성경은 재판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았습니다. 둘째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실하고 정직하지 못한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고아나 과부같이 약자들을 멸시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는 약한 자들을 압제하지 말고 보호하라는 명령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는 그렇지 않은 일들이 많은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반면에 오늘날 사회에서도 약한 자들을 돕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존경을 받고 있는데, 이는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과부는 어떤 입장입니까? 힘이 없고 가진 것 없는 여인으로서 결과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주 가서 참고 인내하면서 간청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 이었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매일같이 간곡히 소원하였지만 불의한 재판관이 쉽게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이 여인이야 말로 속상하고 실망이 되었을 것입니다.(찬송 337장:1,4절)
그러나 재판관은 한동안 한 과부 여인의 간청을 무시했고 공정한 법을 집행하기 보다는 사리사욕에만 눈이 멀었기 때문에 억울한 사연을 하소연 하는 여인에게는 무관심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말 속담에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고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접근을 하면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4절 말씀에 보면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고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여기서 재판관은 반성하는 자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완악한 재판관의 마음이 움직여지고 변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내하면서 간청하는 연약한 여인의 간절한 소원이 이제 조금씩 먹혀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 말씀에는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디어 기다리고 간절히 바라던 한 과부 여인은 억울함을 해결 받는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참으로 놀라운 승리라 할 수 있습니다. 고생하면서 얻은 결과이기에 더욱 값진 것입니다.
여기서 재판관이 계속해서 한 과부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업무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하여금 과부 여인은 끈기 있는 인내로서 마침내 억울함을 풀게 되었으며 완악하고 교만한 재판관은 마침내 여인의 간절한 간청으로 마음의 변화가 오게 되었고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본문 7-8절 말씀에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을 말씀하십니다. 7절에 말씀에 보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택하신 자들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공로로 영원히 천국에 들어갈 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과부나 고아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8절 말씀에 보면“내가 너희에게 으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재림의 때를 가리키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기도하는 실천적인 믿음, 재림에 대한 믿음으로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믿음의 길을 포기하게 되리라는 성경의 교훈이 담겨져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성도들이 오직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다른 것에 의지하는 성도들이 많은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불의한 재판관처럼 지체하거나 계속적으로 외면치 않으시고 필요한 때에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때와 시간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시는 것입니다. 빌4:6-7절 말씀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시련(試鍊)
참아내기 어려운 고비, 혹은 힘든 순간을 ‘시련’이라고 합니다. 흔히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시련이라는 말 속에는 ‘단련하다’ 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철을 두드려서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제련의 과정을 통해 볼품없던 광물은 단단하고 매끈한 금속으로 변모합니다. 시련이 그렇습니다. 견디기 힘든 순간을 만나면 더는 일어서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내 안의 불순물은 제거되고 이전보다 더 단단하고 멋진 모습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시련은 성장의 밑거름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는 시간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시련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시련은 더 단단해지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이 말씀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한 여인이 힘이 없고 연약한 여자 이었으나 그러나 불의한 재판관에게 인내하면서 끈기 있게 간청함으로서 끝내는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께서도 어떤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쉬지 않고 기도할 때에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고 승리하는 믿음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2021년 5월 23일 (참빛교회)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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