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교제의 회복
요한계시록 3:20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
오늘은 그림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제가 가끔씩 기독교 서점에 나가보면 눈에 띄는 성화가 있습니다. 그 성화는 어떤 집 대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여러분도 이 그림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1851년 영국사람 ‘윌리엄 홀만 헌트’가 그린 것입니다.
헌트는 이 그림을 그려서 옥스퍼드 대학과 성 바울 대성당에 기증했습니다. 이 그림은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요한계시록 3:20절의 말씀을 그림으로 그려 낸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이 그림을 자세히 본 일이 있습니까?
요즘 서점에서 팔고 있는 그림을 보면, 그 배경이 아주 밝고, 예수님의 모습도 아주 인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냥 봐도 참 아름다운 그림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헌트가 그린 그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곤히 자고 있는 아주 깊은 밤 시간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즘에야 전깃불이 도시의 밤을 밝혀 주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등불을 들고, 어느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 모습이 아주 어둡게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가시관을 쓰고 계셨습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그 이마에는 피가 흘러내린 모습을 그렸을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그림과 헌트의 그림은 아주 다릅니다.
헌트가 그린 원본 그림은 심각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라면, 요즘 서점에서 팔고 있는 그림에서는 따사로운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만약 헌트가 그린 원본 그림을 서점에서 팔았으면 잘 팔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다르게 그려서 팔게 되었을 것입니다.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말하지만, 화가는 그림으로서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서로 다른 두 그림을 통해서, 170년 전에 살았던 성도들의 신앙과,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170년 전 성도들의 예수님 이해와 오늘날 성도들의 예수님 이해의 차이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170년 전 성도들과 오늘날 성도들이 일치하게 보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교회의 상태를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 같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치합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를 찾아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서로 달랐습니다.
어떻게 달랐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은 예수님을 볼 때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 인자와 자비가 풍성하신 예수님 등등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어떻든지 관계없이, 예수를 믿고 있는 나를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으로, 나의 부족을 용서하고 용납해 주셔서 결국에는 천국에 가게 해 주시는 예수님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70년 전 성도들은 달랐습니다.
그 시대 성도들은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시고, 저주를 받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예수님, 즉 자신들 대신 고난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렸다는 것입니다. 또 성도들은 자신들이 바른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가시관을 쓰시고 찾아오시는 분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불과 170년의 세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신앙은 이렇게 달라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볼 때 오늘 이 시대가 어떻게 보입니까? 오늘날은 사람들이 아주 외곡된 신앙을 가진 시대입니다. 그 결과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시대가 되어 있습니다. 이단들이 오히려 교회를 구원하겠다고 난리를 치고 다니는 시대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영향력이 얼마나 약화 되었는지, 세상은 이제 교회의 중요한 절기인 성탄절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홀만 헌트’의 그림은 이런 우리 시대의 문제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림을 마음에 새겨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시대조류에 떠밀려서 살아가지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서, 시대를 극복하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아멘.
여러분은 ‘레드 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레드 퀸은 ‘이상한 나라 앨리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레드 퀸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왕인데, 체스판의 말들 중 하나로서 달리기의 명수입니다. 이 여왕은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엘리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제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 뛰어야 한다.’ ‘만약 다른 곳으로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라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레드 퀸 효과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레드 퀸 효과를 쉽게 설명해 보면, 에스컬레이터는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려오고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위로 올라가려면, 그 내려오는 속도보다 더 빨리 걸어야 합니다. 그 내려오는 속도 정도로 걸어서는 위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다 나름대로 그 목적지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도 똑같이 걸어가고 있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왜요.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자신은 그 자리에 서서 게임을 하고, 오락을하며, 빈둥빈둥 시간을 낭비하며 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 자리에 잠시 머물러 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머물러 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놀면서 보낸 시간만큼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놀았던 시간만큼 뒤처져 있고 퇴보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나가려면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걸어가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 달려가거나 뛰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나는 앞서 나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앞서가는 학생들은 다 이런 학생들입니다. 지금 사회에서 앞서가는 사람들은 다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냥 놀면서 그런 위치에 서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가진 신앙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10년 전에 가지고 있던 내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10년만큼 신앙이 퇴보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머물러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그만큼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지난 10년 동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신앙의 진보를 이루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오해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 시간에 놀았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만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10년 전에 가진 그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진정 앞서 나가는 신앙인이 되려고 하면, 남다르게 애쓰고 수고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앞서 나가는 신앙인이 될 수 있고,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선구자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지나온 제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내가 가진 신앙을 지켜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퇴보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요. 내가 머물러 있었던 그 시간 동안 세속주의가 치고 나오고, 이단 들이치고 올라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세속주의와 이단들이 활개 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저는 영적 지도자로서 시대가 이렇게 변하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단들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것을 마음 아프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정년을 앞둔 시기에 와 있습니다.
이런 제가 이런 시대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이런 저에게, 이런 우리 교회에, 이런 우리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요한계시록 3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의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이면서, 또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믿음의 증거와 믿음의 역사들이, 우리들의 신앙과 삶 속에 서도 일어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2. 라오디게아 교회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이 시대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아주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떤 교회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3:15-18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니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어떤 교회라고 생각했다고 합니까?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기들의 교회가 ‘아주 부요한 교회’ ‘부요하여서 부족한 것이 없는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어떻게 보셨다고 합니까?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교회’로 보셨다고 합니다. 또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았던 미지근한 교회’로 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토하여 내쳐버리고 싶은 그런 교회였다.’고 합니다.
왜 똑같은 교회를 보는 평가가 이렇게 다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육적인 눈으로 자기 교회를 보았고, 예수님은 영적인 눈으로 교회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르니, 교회를 보는 평가 또한 달라졌던 것입니다.
물질이 중심이 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을 살려면, 물질세계를 통찰해서 보는 뛰어난 육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 육적인 관점에 더하여 뛰어난 영적인 관점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고, 나의 삶을 보고, 그 깨닫게 된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돌이키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 잘못을 고쳐 나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곧 정체되고 곧 퇴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5-17절에서는 영적인 눈을 떠서 교회가 처해 있는 모습을 직시하라고 합니다. 18-19절에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징계하고 책망하실 때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합니다. 그런 후에 주신 말씀이 바로 20절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께서는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여기 사용된 “서서”는 현재 완료형 동사이고, “두드리노니” 현재형 동사입니다.
이 두 동사를 통해 우리는
첫째,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됩니다.
서서 계신 예수님
예수님이 문밖에 ‘서서’ 계신다고 할 때 사용된 동사는 현재 완료형입니다. 헬라어의 현재 완료형은 ‘알지 못하는 과거 어느 시점에 그 행동이 시작되어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들이 다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세워두신 구원계획을 오늘날까지 계속 시행해 오고 계십니다. 예레미야를 어머니의 태에서 부르셔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해 가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창세 전에 이방인의 사도로 택하시고 평생동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그 주시는 은혜를 받아서 누리며 살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완료형의 의미입니다. 현재 완료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역사는, 우리가 천국 가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멘.
두드리고 계신 예수님
또 우리는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두드리노니’라는 단어에는 현재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나 보시려고 한 번 두 번 두드려 보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두드리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두드리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형 동사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언제나 이 현재형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제한 속에 살기 때문에, 과거도 있고 현재도 있고 미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 속에서 살아가시는 하나님에게는 과거도 현재이고, 현재도 현재이고, 미래도 다 현재입니다. 이것이 영원 속에서 사시는 하나님과 시간의 제한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차이점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성경의 사건들이나 예언들을 과거의 사건과 예언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도 과거의 일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도 과거의 일로 생각하고,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임하심도 과거의 일로 봅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 것도 과거의 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뿐 아니라 그 하시는 일도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있었던 일들이 오늘날도 그대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바른 믿음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과거의 일로 보면, 그 말씀은 우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옛날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성경을 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아멘.
20절에서는 예수님이 어느 집 대문 밖에 서서 그 문을 두드리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 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소리를 듣고 믿음의 반응을 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20절에는 라오디게아 성도들이 보인 반응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듣고’에는 부정과거형 동사가, ‘열면’에는 가정 형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두 동사를 통해 우리는
둘째, 성도들의 반응을 보게 됩니다.
부정 과거는 과거의 단회적 사건, 일회적 사건을 지칭할 때 쓰는 시제입니다.
성경에는 부정과거 시제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에도 이 시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로서 단번에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에도 이 시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구원도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면 그 구원은 폐하여지지 않고 영원히 그 효력을 발휘합니다.
이것은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가정법은 단번에 결정적으로 하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이 자신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믿음으로 그 마음의 문을 열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신앙의 결단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신앙의 결단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으로 십계명 돌 판을 받으러 올라가서 더디 내려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세 대신 그들을 인도할 금송아지의 신을 만들어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시내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 황당한 광경을 보고 ‘너희 중 누구든지 우상숭배에 동참하지 않고, 여호와의 편에 서 있는 지파가 있으면 나아 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레위 지파가 나왔습니다. 이 레위 지파는 결단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 레위 지파가 동족의 죄를 징벌하자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됩니다.
레위는 전에 그 여동생 디나의 사건 때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일이 있습니다.
그 죄로 레위 지파는 땅을 기업을 받지 못하고 흩어지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결단으로 레위 지파의 흩어짐은 제사장 지파가 되어 흩어지는 축복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호수아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가나안의 토착 종교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그 백성들을 향해 ‘너희가 오늘날 섬길 자를 선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노라.’ 했던 것도 바로 이 믿음의 결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엘리야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바알을 섬기는 신앙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겠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좇으라.”고 하며 신앙의 결단을 요청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 믿음의 결단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결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저와 거룩한 사랑의 교제를 이루시기 위하여, 과거부터 이제까지 제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셨음을 오늘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처럼 믿음으로 결단하고 예수님을 제 구주로 제 마음에 모셔 들입니다. 저의 마음속에 오셔서 이제 영원히 떠나지 마시고, 단번에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를 따라 저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마음의 문을 열면, 그 열린 마음의 문은 곧 하늘 문이 됩니다.
마치 야곱이 꿈에서 하늘을 향해 놓아져 있는 사닥다리를 보았듯이, 우리들도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그 마음의 문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가 됩니다. 아멘.
이어지는 20절 말씀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가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하고 마음 문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먹고, 예수님과 함께 마시며 살아가는 거룩한 교제가 회복된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셋째, 거룩한 교제의 회복입니다.
우리 삶의 가장 친근한 교제는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자녀들은 그들이 필요를 부모로부터 공급받습니다. 그렇다고 부모는 그저 주기만 하고, 자녀들은 그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들도 자녀에게서 받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는 어린 자녀가 보여주는 어리광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릅니다. 어린 자녀가 웃어주는 그 웃음은 부모로 하여금 세상 염려 근심 걱정을 다 잊어버리게 하는 명약입니다. 자녀가 말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엄마 아빠 하는 말을 들을 때 부모는 삶의 모든 시름을 잊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녀들은 어릴 때 부모에게 해야 할 효도를 다 했다. 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의 친밀한 교제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거룩한 교제가 회복된 모습을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것은 마치 목자가 그 잃은 양을 찾고 찾다가 찾게 되었을 때, 그 잃었던 양을 다시 찾은 기쁨에 잔치를 여는 목자의 모습을 연상시켜 줍니다. 이것은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잃었던 둘째 아들을 다시 찾게 된 아버지가 그 잃었던 둘째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으로 큰 잔치를 열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켜 줍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친밀한 교제를 보여주는 단어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는 이 말씀이나 “네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리라.”라고 하신 이 말씀들도,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로 연합된 임마누엘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언어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중심적인 내용은 바로 이 임마누엘 사상입니다.
구약을 시작하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날이 서늘할 때 동산을 거니시면서 아담과 하와의 삶에 함께해’주시는 모습을 통해 임마누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신약을 시작할 때도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 되심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리고 신약을 마치면서 보여주신 것도 임마누엘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고 고대하는 신앙 속에도 이 임마누엘의 사상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먹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먹으시는 친밀한 교제 즉 임마누엘 사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임마누엘이 우리의 구원이고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이 임마누엘을 성취해 주시려고 이 죄악 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요한계시록 3장에서 살펴보고 있는 “먹으리라”라는 이 동사에는 그 시제가 미래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교제의 회복은 언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까? 이 회복은 미래에 천국에서 이루어지고 완성될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가서 살게 될 천국은 영적인 세계입니다.
영적 세계와 영적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물질세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영적 세계인 천국을 설명할 때 물질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그 길이 황금 길이라든가. 그 문이 진주 문으로 되어 있다거나,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든가, 열두 가지의 진귀한 보석들로 꾸며져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영광은 이런 물질적인 찬란함에 있지 않습니다.
천국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함께 교제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살아가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느끼고, 하나님의 행복을 함께 만끽하며 살아가는 그런 곳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부자로 살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이 살면 행복합니까? 이런 사람이라도 가족 간에 불화가 있고, 가정에 우환이 연이어 일어나면 물질적인 부도 번영도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가정의 행복은 물질의 풍족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가족 구성원 간에 이루어지는 거룩하고 친밀한 교제에 달려 있습니다. 물질은 이런 사람들의 행복을 돕는 역할밖에 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천국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성스럽고 거룩한 교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친밀한 교제를 회복해 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서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아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관계의 회복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 속에 살아가는 삶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교제를 회복해 주시기 위해 지금도 서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소리를 듣고, 결단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마음 문을 열어드리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성스러운 교제, 영적인 교제, 거룩한 교제가 회복될 것입니다. 이 교제의 회복을 통해서 천국은 우리 마음 안에 임하는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에덴에서 하나님과 아담이 누렸던 그 행복한 교제를,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영적인 교제를, 장차 성도들이 천국에서 가서 누리며 살 성스럽고 거룩한 교제를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시간 결단하여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거룩한 교제의 회복을 통해, 성도들이 누리며 살게 되는 그 충만하신 은혜를, 늘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약 예언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세에 복 있는 성도 (1) | 2024.04.07 |
---|---|
5개월 황충 재앙 (0) | 2023.07.02 |
천년왕국의 소망 (1) | 2022.12.11 |
흰 옷 입은 무리들 (0) | 2021.03.14 |
하나님의 인을 맞은 144,000 (3) | 2021.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