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되기를 힘쓰라.
에베소서 4:1-6
에베소서에서 다루고 있는 중심 주제는 교회입니다.
오늘은 이 교회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교회처럼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단체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남녀노소(男女老少)의 구별이 없습니다. 빈부귀천(貧富貴賤)의 구별도 없습니다. 인종, 민족, 언어, 국가의 구분까지도 없어집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信仰)을 가졌다는 오직 이 한 가지 이유로 모인 단체입니다. 교회는 이 신앙을 제외하면 같은 면이라고는 거의 없는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곳입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를 분류해 보면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중심으로 모인 교회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는 각 개인들의 견해와 주장이 앞서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들은 결국 각 개인의 견해와 입장의 차이 때문에 서로 다투고 분쟁하는 교회가 됩니다. 오늘날 분쟁 중에 있는 교회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 자기 견해와 자기주장이 강한 교회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라는 간판은 달고 있는데 교회라고 볼 수 없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 예로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섬돌향린교회나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도 없고 교회 상징을 백두산의 돌로 삼고 있는 좌파 정치인들이 모임인 한백교회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한명숙 전총리가 이 한백교회 권사라고 합니다. 이런 교회들을 교회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면 같은 신앙 안에서 모인 다양한 구성원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와 같이 작은 교회들을 보아도 서로가 성격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지적 이해력이 다르고,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고, 중요시하는 가치관이 다 다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교회가 하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은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류는 본래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아담 한 사람에게서 모든 인류가 태어나도록 하셨습니다.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한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흩어지고 서로 다른 인종과 민족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다가, 하나님이 사람들이 사용하며 사는 언어를 서로 다르게 하심으로,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나누어지고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온 세상으로 흩어져서 서로 다른 민족이 되고 서로 다른 나라를 이루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교회를 조직하게 하시고, 세상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을 교회로 모아 다시 하나로 만들어 가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 일을 위해 세상 속에 세워주신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믿음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 가지 못했습니다.
구원 신앙의 문제 때문에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회가 분열되고, 또 개신교회 안에서도 신학적인 이해의 차이 때문에 다양한 교파로 분열 되어 왔습니다.
이런 분열과 대립은 각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장로가 대립하여 분쟁하고, 성도들과 성도들이 다투고 분쟁하는 교회가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교회들은 이렇게 분쟁하고 다투는 것입니까? 그 원인은 아주 분명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자기를 그 중심에 두고, 자기주장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은 개인주의가 아주 발달해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개인의 인권과 개인의 자유를 아주 중요시합니다. 개신교회도 보면 개교회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리 교회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는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보고, 성도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최초로 이 땅 위에 세워졌던 유무상통의 공동체 예루살렘 교회는 오직 이런 관점을 가질 때만 이해될 수 있는 교회입니다. 지금 일반적인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교회일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장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관점은 바로 사람 중심으로 보는 교회 이해를, 하나님 중심으로 보는 교회 이해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회복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우리의 삶을 보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짜놓은 시간이라는 ‘날줄’과 공간이라는 ‘씨줄’에 얽혀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는 그물들을 보면, 날줄과 씨줄로 엮어진 구멍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구멍들을 ‘그물코’라고 합니다. 어부들이 고기를 잡을 때 이 그물코에 걸려드는 고기들만 잡습니다. 그물코에 걸리지 않는 작은 고기는 잡지 않습니다.
고기가 그물코에 걸려서 잡히는 것과 같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시간 혹은 역사라는 날줄과 공간 혹은 지역이라는 씨줄로 된 그물코에 함께 걸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한 가정에서 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고, 한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서울이라는 한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간의 차원에서 우리의 위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인류 역사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난 후에 이미 2,0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시간의 그물코를 10년 단위로 끊어보면 예수님 때로부터 수많은 시간의 그물코가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수많은 시간의 그물코 중에서 202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공유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2023년이라는 같은 시간의 그물코에 함께 들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은 공간의 차원에서 우리의 위치를 생각해 봅시다.
지금 이 지구촌에는 수백 개의 나라가 있고, 수만 개의 도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많은 나라 그 많은 도시들 중에서 서울이라는 한 공간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공간적으로는 서울이라는 한 공간, 한 그물코에 함께 들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리하면 지금 우리는 2023년 7월 9일이라는 시간의 그물코와, 참빛교회라는 한 공간의 그물코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이라는 그물코에 함께 걸려 살아가고 있는 아주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그물코 안에 산 사람들
세계 언어학자들이 1996년 프랑스에 모여 포럼을 하면서 세계 공용어로 추천한 언어가 ‘한글’이었습니다. 세계 언어학자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언어 중에서 한글이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편리한 언어라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며 사는 이 한글을 만드신 분은 ‘세종대왕’과 집현전의 학자들입니다.
세종대왕은 당시 일부 지배 계층들이 사용하고 있던 한문 대신에, 모든 백성들이 글을 읽고 글을 쓰고 글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언어가 한글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글은 세종대왕이라는 어진 임금님이 그 국민들을 사랑해서 만드신 그 출처가 아주 분명한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 한글은 좋은 뜻을 가진 임금 한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임금님을 모시고 함께 일했던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최항 등과 같은 우수한 학자들이, 세종대왕과 같은 어진 군주를 만나서 이 위대한 일을 함께해 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5,000년을 이어온 한국사의 긴 역사 중에서, 하필이면 그 시대에 태어나서, 그 어진 임금님을 모시고, 백성들이 쓸 새로운 글자 만들어 내는 일을 했으니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이와 반대로 ‘히틀러’라는 사람과 한 그물코에 걸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우월주의에 불을 댕겨, 유대인을 학살하고 무지막지한 독재를 할 때, 그의 곁에서 히틀러를 도와 악한 일을 하였던 ‘헤르만 괴링,’ ‘로벤베르그,’ ‘루돌프 헤스’ 등등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필이면 그 시대에 태어나서, 히틀러와 함께 큰 죄를 지으며 살았으니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과 한 그물코에 걸렸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예수님 시대에 갈릴리라는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 놀라운 복음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또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죄에서 구원해 내는 일에 동참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역사의 그물코에 예수님과 함께 걸려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이 가지신 꿈을 함께 공유하며 살았던 아주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아멘.
지금 북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2023년이란 시간이라는 ‘씨줄’은 우리와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간이라는 ‘날줄’은 우리와 달리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한이라는 공간에 살고 있고, 저들은 북한이라는 공간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시간이라는 ‘씨줄’은 우리와 일치하면서도, 공간이라는 ‘날줄’을 우리와 달리하고 있는 것 때문에, 21세기 이 풍요의 시대에도 제대로 먹지 못하여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21세기는 인간의 자유가 극대화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3대째를 내려오는 독재자의 억압받으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의 생애를 결정하는 것은 만남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났느냐? 에 따라서 그 생애가 달라집니다. 세종대왕을 만나고, 히틀러를 만나고, 예수님을 만난 것이 그 사람들의 생애를 달라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같습니다.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이 살아갈 삶을 결정합니다.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이 가지고 사는 가치관을 결정합니다. 어떤 배우자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좌지우지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만남도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서 살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 그물코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참빛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된 것이나, 또 참빛교회에서 여러분들을 만난 것은, 여러분이나 제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을 정해주시고, ‘너는 지금 여기서 이 사람들을 만나 함께 나를 섬기고, 함께 사랑을 나누며 살아라.’라고 하셨기 때문에, 여러분과 저는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살고 있는 부모와 자녀가 전혀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고, 목회자와 성도가, 여당과 야당이 전혀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족으로 만나고, 성도로 만난 것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이미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계획안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하신 의도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하나님의 뜻은 오늘 말씀에서 보니까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만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서도 하나가 되고. 사랑에서도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려고 하면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째는,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된 사이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모두는 육적인 면에서는 서로 다른 가족들이 있지만, 영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 모두는 장차 하나님이 그 자녀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천국을 상속받게 될 상속권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 요한복음 1: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일서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장차 우리 모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지신 영광스러운 형상을 입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절 말씀에서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의 재림 때 있게 될 순교자들의 부활과 믿음을 지키며 살아남은 신부들의 휴거가 있고, 이후 천국에 가서 한 가족을 이루어 살게 되는 그날까지 이 사람들은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가정이란 어떤 곳입니까?
가정은 사람들이 태어나는 곳이고,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나는 곳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가정을 중심으로 생활하며,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장성하여 결혼하게 되면 이제 자기 자신의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그 새롭게 이룬 가정에서 생활하면서, 직장에 출근을 하고 하루일과를 마치면 다시 가정으로 퇴근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평생 가정을 중심으로, 가족과 함께 살다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그 이별을 슬퍼해 주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 가족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 가정이라는 아주 귀한 제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가정은 마치 하나님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반겨주고 맞아 주시듯이, 우리 가정도 언제나 우리를 반겨주고 맞아 주는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교회라는 영적 가정을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가정의 부부관계를 설명하시다가 32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육체를 가진 사람들의 가족관계와 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가족관계가 동일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한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되고 있습니까?
사람의 영혼은 교회를 통해 중생하여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교회에서 내 믿음이 자라고 내 영혼이 성장하게 됩니다. 또 우리는 교회에서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받아먹고, 교회에서 내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참 안식을 얻으며, 평생 교회를 중심으로 살다가 성도들의 찬송 소리를 들으며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서로 관계없는 남남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잠시 모였다가 헤어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영적인 한 가족으로 불러주신 사람들이고, 같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식을 먹으며, 같은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한 가족입니다. 아멘입니까? 우리가 두 번째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한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려면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셋째로, 믿음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해야 할 일은 사랑의 눈으로 상대방을 보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한 가족이고, 한 형제자매라는 말은, 우리는 서로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랑의 관계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부모는 자기 자녀를 볼 때 사랑의 눈으로 봅니다.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자 손녀를 보는 눈은 남다릅니다. 남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할머니 할아버지의 눈에는 그 손자 손녀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 보입니다. 비록 그 얼굴이 넓적하든지, 콧대가 납작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예쁘다고 하지 않아도 그런 모습까지도 예쁘게 보이는 것은 바로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고슴도치의 털이 얼마나 딱딱하고 날카롭습니까?
그런데 ‘고슴도치도 제 새끼의 털은 보드랍다고 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만큼 자기 새끼에 대한 어미의 사랑이 크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부모를 보셨습니까?
자기 자식을 외모 때문에 미워하는 부모를 보셨습니까? 자기 자식이 가진 성격 때문에 자녀를 내다 버리는 부모를 보셨습니까? 학생인 자녀가 공부를 열심히 해 주면 좋겠지만, 공부는 하지 않고 딴 짓만 한다고 자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런 자녀라도 내가 사랑해 주어야 할 가족이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전에 함께 신학을 공부하던 젊은 전도사 부부가 미숙아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녀는 오랫동안 인큐베이터 안에서 생활했습니다. 또 그 자녀는 황달 수치 또한 아주 높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 자녀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학생이었던 전도사 부부에게 무슨 생활의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힘겹게 돌보아 주고 있던 그 자녀가 이제 인큐베이터에서 나와서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생활의 어려움이 좀 해소 되려나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퇴원하자마자 이번에는 뇌종양이 발견되어 다시 입원하고 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서 회복을 위해 병상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며 부모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어려운 수술을 잘 견디어 준 아이가 고맙고 자랑스럽게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그 부모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아기가 장시간의 수술을 받고 손과 발에 수많은 주사기 바늘을 꽂고 회복 중에 있을 때, 부모는 아기가 얼마나 힘들까 하는 마음으로 애처롭게 보고 있었는데, 아기는 그 힘든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눈을 떠서 자기 부부를 바라보며, 마치 ‘엄마 아빠 감사해요.’라는 표정으로 환한 미소를 보여주더라는 것입니다. 그 아기가 보여준 그 미소는 부모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던 걱정과 슬픔을 다 사라지게 하였고, 오히려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희망처럼 피어오르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부모는 아이가 보여준 그 미소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는 누구를 만나든지 그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에게 자기 아기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부모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족은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가족은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무엇인가 뛰어난 것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내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그 아이와 내가 한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부족하고 못났더라도 부모는 그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때로 실수도 하고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성도들을 어려움 속에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 일 때문에 서로를 탓하지 말고,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먼저 다가가서 선행을 실천하고 사랑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같은 교회를 섬기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세상에 보여주며 살아가게 되는 것도 사랑하는 삶에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런 너희를 보고 나의 참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닉 부이치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에도 이 책을 읽어본 일이 있지만, 이번에 또 기회가 되어서 다시한번 읽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40대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텐데, 두 팔과 두 다리가 없고, 오직 머리와 몸통이 전부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람을 ‘오체불만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목회자였던 그의 부모는 이렇게 장애를 가진 몸으로 태어난 그 자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신체적인 장애가 있다고 특별한 대우를 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그런 부모의 격려 아래서, 그 자신의 신체적인 약점과 그 살아가는 삶의 난관들을 극복하고, 지금은 그런 몸으로 축구도 하고, 수영도 하고, 드럼도 치고, 심지어 다이빙도 한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그 자신도 목회자가 되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남보다 못하다는 것 때문에 좌절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신체가 부자유한 나도 내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여러분들도 자기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큰 감동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닉 부이치치’는 어떻게 그 육체적인 약점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 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거나 비웃지 않습니다. 가족은 서로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주며, 약점을 가지고 있으면 그 약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마음을 다해 응원해 주는 그런 사이입니다. 이것이 가족관계이고, 이런 가정을 가진 사람들은 그 살아가는 삶에 어려움이 다가오더라도 능히 이겨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가정들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힘겨운 이 세상 삶을 살아가는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용기를 더해 주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
여러분들이 목회자인 저를 보실 때, 저의 있는 모습 그대로 봐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저도 제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완벽하지 못합니다. 실수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의 죄인일 뿐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한 후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을 돌이켜 보니, 한 일이란 별로 없이 그저 세월만 보냈다는 생각이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저를 지금까지 용납해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저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여기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가족은 그 아버지가 아무리 못났어도 자기 아버지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부족한 점이 많은 저를 이제까지 용납해 주신 것은, 저를 한 가족으로 여겨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여러분들께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 사이도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성도들이 서로를 가족 대하듯이 한다면 아마 우리교회는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그런 교회가 될 것입니다.
가족은 서로를 볼 때 비판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기 위하여 보지 않습니다.
그냥 한 가족이기에 관심을 가지고 보며, 혹시나 내가 도와줄 일은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족이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생활합시다.
부모가 자기 아이를 볼 때 감시하기 위해서 보지 않습니다.
내 아이가 혹시 넘어지려고 하면 넘어지기 전에 붙들어주기 위해 지켜보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연세가 드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천천히 길을 걸어가는 것은, 그분들의 허리가 굽고 그래서 빨리 걷지 못한다고 타박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안심하고 길을 가실 수 있도록 함께 해 주고 필요한 도움을 주기 위한 마음으로 함께 걸어갑니다.
성도들이 이렇게 서로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만나서 교제하는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도 그런 교회 공동체를 사랑스럽게 보시고, 하늘 문을 여시고 하늘의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비록 다른 성도가 나를 도와주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서로에게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다른 성도들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별로 도움도 되지 않고, 별로 유익 되어 보이지 않아도, 다른 성도들이 나와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만약 예수 믿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 교회에 저 혼자만 있다면 제가 매주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나라에 예수 믿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면 외롭고 두려울 때 누가 나와 함께 해 주겠습니까?
전에 외국으로 입양을 간 아이들이 성장한 후에 자기를 버린 비정한 부모를 찾으러 한국에 온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처음에는 자기를 낳아 놓고 버린 비정한 어머니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왜 나를 낳아 놓고 버렸을까?’ ‘그 나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자기도 자녀를 낳아서 키우면서, 그래도 ‘그 엄마가 아니었으면 내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 ‘나에게 생명을 주신 그 엄마를 한 번 만나 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서, 무슨 단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한국에 올 경비를 마련해 가지고 와서, 자신을 낳아주신 엄마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그 엄마를 찾아서 만났습니다.
그렇게 만난 엄마는 이미 나이 많아 늙어 있었습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니 그냥 두고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엄마를 도와드릴 수 있을까? 고민 고민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자기와 그 엄마는 한 핏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피로 맺어진 한 가족입니다.
예수님이 흘려주신 그 속죄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면, 예수님이 피 흘리시며 구원해 주신 다른 성도들을 귀하게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한 가족이 되게 해 주셨음을 기억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아껴주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나보다 먼저 교회에 와 계신 분들을 볼 때, 이분들은 나보다 먼저 우리교회를 섬겨 오신 분들이라 생각하며 귀하게 여기고, 또 먼저 우리교회에 와서 섬기고 있는 성도들은 이제까지 교회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롭게 등록한 성도들을 도와주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 교회는 정말 좋은 교회, 우리교회 성도들은 정말 행복한 성도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을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서,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한 교회를 섬기게 해 주신 것은 아주 특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좋은 믿음의 동행자를 주셨음을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입니다. 주안에서 거룩한 한 가족입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끝까지 우리가 가진 신앙을 지켜나가려면 서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귀중히 여기며, 사랑하고, 격려하고, 도우며 살아가는, 믿음 안에서 신실한 동역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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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은 때로 외로운 삶이고, 때로는 힘겹고 두려운 삶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와의 동행이 필요하고,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에릭 프롬’(Erich Fromm.1900~1980)이라는 사람은 ‘사랑의 기술’ 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사랑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광고, 영화, 드라마 등등에는 온통 사랑 이야기로 넘쳐나지만, 그 많은 사랑 이야기에 질려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기대하지만 기대하는 만큼의 사랑을 얻을 수 없어서 사랑에 주려 있습니다. 또 사랑에 실망한 사람들도 많고, 사랑 때문에 불행해 진 사람들도 많고, 사랑에 대한 환상 때문에 잘못된 길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랑에 목을 매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모두가 외롭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이 세상의 삶은 힘겹고 버겁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 고단한 인생길에서, 진정 나를 이해하고 나와 함께 해 줄 사랑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은 함께 해 주는 것이고,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에 대한 갈망만 절실하고, 사랑을 하는 데는 미숙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이비 사랑’에 빠집니다. ‘사이비 사랑’이란? 진짜 사랑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사이비 사랑의 극단에는 ‘가학증’과 ‘피 가학증’이 있습니다.
‘가학증’은 상대방에게 육체적ㆍ정신적 고통을 줌으로써 만족을 얻는 이상 성격을 말합니다. ‘피 가학증’은 자기 스스로 다른 사람의 도구가 되어 고통을 받음으로써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이상 성격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숭배하는 그 인물에게, 자신을 내던지는 그 순간만큼은 그 사람과 강렬한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이비 사랑’은 더 큰 실망과 상처를 줄 뿐이고, 그런 가짜 사랑에서는 참된 위로와 행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또 ‘젊은이들은’ 매력적인 상대를 만났을 때, 상대에게 끌리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가 상대를 위해서 헌신하는 노력이 따르는 사랑입니다. 꽃을 아낀다고 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지 않는 것은 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이, 상대방의 미래와 상대방의 성장에 관심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화가가 멋진 풍경을 만났다고 해서 저절로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멋진 풍경을 캔버스에 옮겨 담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상대를 보고 좋은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쁜 마음으로 상대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통해 참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른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내 마음속에 느껴지는 사랑의 감정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사랑으로 다른 성도들을 존중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하고, 사랑으로 다른 성도들과 함께하며 도와주고 돌보아 주려고 하는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이런 참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연습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걷는 것처럼, 우리들도 사랑하며 살아가려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릭 프롬’은 사랑이란?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이라고 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참빛교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만들어주신 거룩한 가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고, 그 삶 속에 만난 문제를 함께 안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이런 삶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과 소망이 채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되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이런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오면, 위로와 용기와 힘을 얻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 안에서 하나 된 거룩한 공동체가, 우리가 함께 몸 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되고, 또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힘써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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