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환 목사

복음의 종으로서 자세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4. 10. 27. 13:59

복음의 종으로서 자세 (고전 9:19-23)

 

(들어가는 말)

 

유명한 가곡 중에 오현명 씨가 부르는 가곡 명태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명태의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고 합니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쫙쫙 찢어져 내 목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사람에 따라서 달리 느낄 수도 있지만 이 노래는 올바른 인생길을 가는 한 존재의 결의에 찬 의지를 노래한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갓 명태라는 미물에 지나지 않지만, 밤늦게 시를 쓰는 시인의 시 속에서, 혹은 그 시인의 술안주가 되어서라도 의미 있는 생을 살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담겨 있는 노래입니다.

 

바울은 본장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참된 종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사도로서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 자의 뚜렷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사 음식 때문에 논란을 겪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가 주는 적극적인 의미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서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혜가 무엇인지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스스로 종이 되는 것입니다.(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어떤 면으로 보더라도 그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는 사도였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이미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혀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의 베드로나 요한, 그리고 야고보는 상당히 높은 위치에서 교회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권위와 명예를 뒤로 하고 오로지 복음 선포의 길을 자청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마땅히 교회 안에서 그가 받아야 할 몫도 받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부터 제사장들을 비롯해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성전의 헌 물 중에서 그 몫을 받아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마다하고 스스로 천막 짓기를 해서 자신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권위가 아니라 자기와 함께하는 사람과의 구체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함께 생각하는 만민의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만난 그 어떤 처지와 위치(계급)에 있는 사람이든 개의치 않고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 종이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진실로 바울의 이러한 태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본받아야 할 중요한 자세였습니다. 진정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하기 위하여 자기의 주장과 권리도 모두 뒤로 하는 참된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담대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건 바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삶이요 풍요한 자유로부터 오는 믿음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더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종이 되어야 합니다.

 

3:8절에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15절에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의 복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20-21)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자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에게도, 율법 있는 사람에게도, 율법 없는 사람에게도, 약한 사람들에게도, 복음의 종이 된 것은 그들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바울처럼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오직 한 목적,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전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떠한 사람을 만나든지 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으로 다가가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사랑을 그 마음에 심어놓고자 했습니다. 또한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가 되고, 나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가 되어서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게끔 하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에 끊임없는 열정으로 인해 작은 자유들을 포기하고 스스로 복음의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임으로써 사소한 일에 골몰하는 일을 잊어버리고 복음에 합당한 자유인으로 용감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복음을 받은 자이며, 전파자 임을 늘 마음에 새기고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복음의 종이 됩시다.

 

26:1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6절에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찬송:496)

 

3. 이 모든 것은 다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입니다.(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이 이토록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권리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스스로 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말하기를 이것이 복음에 참여하는 것이며, 가장 고귀한 축복을 나누어 갖는 일이라고 합니다. 죄악으로 영원히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허락하신 복음, 곧 그리스도로 인해서 다시 살리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다름이 아니라 만물의 지으신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인 것입니다. 부패한 사람들로 하여금 거듭난 삶으로 살아가도록 한 일, 바로 이것이 바울에게는 가장 중대한 일이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하는 직접적인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바탕을 다루는 생명에 관한 일이었기에 더욱 귀중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복음 전하는 일에 몰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도대체 나 같은 사람을 왜 하나님이 찾아오셨을까? 그는 기독교인을 잡아 죽이고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에게는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입을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을 받아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복음에 빚진 자라고 고백하면서,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8:35절에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1:27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몸의 소망이 무언가)

 

영국에 에드워드 모트라는 37세의 목공 기술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하면서 열등의식과 반항심, 원망으로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나는 겨우 이런 공장에서 망치나 두들기며 일하다니 우리 부모는 왜 나에게 이런 삶밖에 주지 못하였던 것인가?’ 그는 열등의식, 반항, 원망뿐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그에게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고, 그에게 소망이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런던의 거리를 배회하다가 길가에 있던 자그마한 교회에 들어가서 존 하이야트 목사님의 요한복음 3장을 가지고 거듭나는 도리에 관한 설교를 듣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직업과 인생에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거듭난 에드워드 모트는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망치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는 행복한 목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생은 점점 풍요로워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가 고용되어 일하던 목공소가 자기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 목공소는 점차 확장되었고, 그는 성공적인 사업가가 된 것입니다.

 

그가 55세 되던 해, 자기를 거듭나게 하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놀라워서 그 주님께 자신의 전 재산을 드려 런던의 언덕 위에 아름다운 침례교회 하나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신학 공부를 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 그 첫날, 그는 오래전 그의 나이 37세이었을 때 자기를 거듭나게 하셨던 주님의 첫 사람을 기억하면서 그 소망을 주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주님을 향한 감사의 시를 지었습니다. 그 시가 바로 찬송가 488이 몸의 소망 무언가입니다. 이처럼 소망은 사람을 살리고 보람되게 살게 만드는 은혜요 힘이 됩니다. =할렐루야=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들은 바울 사도가 복음의 종 역할을 한 것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는 우리 인생이 예수님을 존재의 터전으로 삼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도 의미도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거 하였습니다. 오직 복음 그것만을 위해 스스로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스스로 종이 되신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 스스로 종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20241027(참 빛 교회)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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