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으로
히브리서 11:8-16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는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장 큰 복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복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을 읽으면서 감동하게 되는 이유도 이것이 아닙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다 믿음의 용사들이고, 믿음의 영웅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 중에 최고의 복은 믿음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이 복을 주셔서 오늘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그런데 누가복음 18:8절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인자가 올 때는 언제를 말합니까?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두 번 오신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오실 때에는 고난의 주로 오셔서,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해 내시는 일을 성취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초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유대인들은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그 백성들을 이방 나라들에서 구원해 주시고, 유대인들을 위해 메시야가 다스리는 왕국을 세워 주실 영광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이었기에 유대인들은 이사야서 53장에 기록되어 있는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금서로 지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도 율법사들도 이 말씀은 읽지를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 이 땅에 오실 때에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오셔서,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는 왕으로 오십니다. 우리는 이때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라고 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때를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인자가 올 때”는 바로 이 재림의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을 주신 의미가 무엇입니까?
전에 예수님이 초림의 주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의 주로 오실 때에는 이방인의 교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가 올 때에,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주신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까?
오늘날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주 가까이 이른 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는 달리 오늘날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가장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2022년 우리나라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의 숫자가 약 774만 명이라고 합니다. 2024년 현재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약 25억 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물론 이 숫자는 로마카톡릭, 그리스 정교회, 심지어 이단 교회들까지를 포함한 숫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다 빼어낸 순수 기독교인들의 숫자만도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우리 현실이 이런데 왜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신 것일까요?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마 이런 이유에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자의 숫자가 아주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 중에서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을 보는 사람들의 입장과 하나님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우리는 이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합니까?
오늘날 우리 삶을 보면 신앙의 지형이 많이 바뀌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0년 전에는 이단적인 교회는 그 성도들의 숫자가 한 40-50명을 넘어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백 명이 넘게 모이는 곳은 몇 곳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이단 교회들이 교회 깃발만 세워 놓으면 급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 이름이 조금 알려진 이단 교회들은 보통 다 1,000명이 넘습니다. 심지어 수만 명, 수십만 명이나 모이는 곳도 있습니다.
이렇게 이단에 빠져들어 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거의 대 부분이 예수를 믿다가 이단으로 간 사람들입니다. 전에 인천 주안동에 있는 어느 장로교회에서는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 500명이 한꺼번에 신천지 이단으로 넘어갈 때까지 그 교회에서는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나중에 교회에서 심각한 상황을 알고 대책을 세워서 더 큰 피해는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약 교회가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천지 사람들의 정체를 몰랐더라면 아마 훨씬 더 많은 신자들이 신천지 이단에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신천지가 주장하는 교리나 그 포교하는 방식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황당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 황당한 주장에 미혹되어서 이단에 넘어가는 것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단에 넘어간 사람들은 본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구원 종교인데, 이단들은 사람에 의해 시작된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인데 이단들은 사람의 노력과 헌신을 요구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인데 이단은 자기주장과 자기 이론의 종교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확실한 성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성도는 이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까?
이단에 넘어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간증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구원 관이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교회는 오래 다녔어도, 심지어 교회에서 중직까지 맡고 있었어도, 자신이 구원을 받은 자인지 구원을 받지 못한 자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었기에 이단의 유혹을 받고 넘어갔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자신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이단에 넘어간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이단들이 아무리 극성을 부려도 구원 신앙이 확실한 성도들은 그런 미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대교회의 가장 취약한 점은 바로 구원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였던 집사, 권사, 장로 혹은 목사나 사모가 이단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현대교회의 상태를 미리 내다보시고,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라고 저는 짐작해 보는 것입니다.
과학과 이성이 발달한 21세기
오늘날은 과학이 발달하고 이성이 발달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을 신봉하고 이성을 신봉하며 살아갑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과학적 사실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또 과학적 사실과 모순되는 것은 도무지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성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말로는 ‘믿음이 중요하다.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그 살아가는 삶을 보면 과학적 증거들을 신뢰하고,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과학적 사실이나 이성적 사고는 어느 선까지는 사실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을 넘어서는 분야 즉 영적인 영역과 믿음의 영역에서는 과학적 사실과 이성적인 판단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꼭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영역이나 믿음의 영역에서는 과학적인 증거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영역이나 믿음의 영역에서는 이성적 사고와 논리적인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영역이나 영적인 영역에서는 영이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영역이나 믿음의 영역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세상에 기초를 두고 있는 과학적인 지식을 버리고, 인간의 이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버리고, 하나님과 그 주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과학적 사실을 믿으며 살고 있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결려 되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모든 것을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적인 사실이 아니거나,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도 이 세상의 삶 속에서는 과학적 사실과 이성적 사고를 믿고 살지만, 이 세상을 넘어서는 믿음의 영역에서는 과학적 사실이나 이성적 사고를 버리고,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데라와 아브라함의 믿음
오늘 우리는 이 믿음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과 그 아버지 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났다고 합니다. 창세기 11:31절입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라함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이 말씀을 보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의 이동은 데라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에서는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에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브라함과 그 아버지 데라에게 함께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온 가족들이 다 하나님과 그 주신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동하여 하란에 도착했을 때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하란은 당시 수메르 문명권의 최북단 도시였습니다. 그 너머 북쪽에는 헷 족속의 문명권이었고, 그 서쪽은 본래 가고자 목적했던 가나안 땅은 애굽인의 문명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와 그 형제들은 하란에 머물러 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란에서 수년간을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주신 말씀이 창세기 12: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는 이제 네 고향과 네 친척뿐 아니라,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네 아비 집도 떠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네가 믿음으로 내 말에 순종하면 ‘나는 네게 이런저런 복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이 부르심을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게 봅니까?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런저런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언약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부모가 없었던 조카 롯만 데리고 믿음으로 하란을 떠나게 됩니다.
믿음의 차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믿음을 가졌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하란을 떠났는데, 그 아버지 데라와 형제들은 왜 하란을 떠나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이들 모두는 전에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왜 하란에서는 믿음으로 떠나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엇이 이들을 하란에 발을 묶어 두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그 차이를 ‘믿음의 차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의 차이’라고 봅니까?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히브리서 11:8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날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났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은 그 가야 할 목적지가 어디인지 분명하게는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을 믿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 데라와 그 형제들은 달랐습니다.
이들도 셋의 후손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이성적인 판단이 일치되었을 때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성적인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이성적인 판단이 일치할 때는 믿었고, 일치하지 않을 때는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란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리한 요구 같이 들려서 순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음을 구분해서 보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살았던 그 당시에는 노아의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이 뚜렷이 구별되었습니다. 셈의 후손들은 지금의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살고 있었고, 함의 후손들은 가나안과 아프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고, 야벳의 후손들은 지금의 튀르키예와 유럽 지역에 흩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데라는 셈족의 후예였습니다.
당시 하란은 셈족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지만 함족과 야벳족과의 경계선상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르를 떠나 하란에 오는 것을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란을 떠나 그 위쪽으로 간다는 것은 동족들이 살고 있는 땅을 떠나 다른 부족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데라가 살았던 당시 사회는 철저한 씨족 중심의 사회, 부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데라는 셈족이 거주하고 있는 땅을 떠나 함족이나 야벳족이 거주하고 있는 땅으로 가기를 꺼렸던 것입니다.
후대 고고학자들이 데라가 살았던 우르의 유적을 발굴하였습니다.
그 발굴한 유적은 대형 도서관이었는데 그 규모나 시설이 고도의 문명을 누리며 살았던 사람들이 세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우르뿐 아니라 우르 인근에 있었던 수메르라는 도시는 제국의 수도로 셈족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이 수메르는 권력과 부와 향락이 극에 달하였던 도시였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최첨단 문명을 누리며 살았던 수메르는 평지에 건설된 도시입니다.
그래서 외부 침략자들을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런 도시의 특성상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안한 곳이었습니다. 때로는 내부 사람들에 의해 지배자가 바뀌기도 하고, 때로는 외부의 침략자들에 의해 지배자가 바뀌기도 했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그 당시에도 아모리인 들의 침입이 자주 있었습니다.
때로는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전쟁에서 패하여 도시가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수메르는 문명이 매우 발달한 도시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안한 도시였습니다.
우르는 제국의 중심도시였던 수메르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르도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아주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성경은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 전에 그 아들 하란이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란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 우르 상황을 짐작해 볼 때 아마 불안한 정치적 상황과 연관성이 있지 않나 생각해 볼 뿐입니다.
당시 수메르 지역은 종교적으로는 매우 혼탁한 곳이었습니다.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도시 문명을 이루고 살다가 보니, 사람들이 가지고 온 각종 우상과 신들과 미신들이 성행하였던 도시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우상 숭배와 미신이 성행한 도시였든지, 당시에는 아직 노아가 살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후손이었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숭배를 하고 우상을 만들어 팔며 살았다고 합니다.
여호수아 24:2-3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데라는 본래 셈족의 후손으로 하나님을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데라가 살았던 우르에서 사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다양한 민족,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서 함께 살다가 보니, 우르는 각종 우상과 다양한 신들을 섬기는 곳이 되었습니다. 데라는 이런 도시 분위기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이런 데라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데라에게 우상 숭배의 땅이 된 그 본토 친척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데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상 숭배가 만연해 있었던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것입니다.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대단한 신앙적인 결단이었습니다.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난다는 것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일구어 놓은 그 모든 땅과 소유재산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포기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란에 이르러서는 데라와 아브라함은 갈 길을 달리하게 됩니다.
데라와 그 아들들은 하란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데라는 왜 하란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습니까? 당시 하란은 셈족의 문화가 미치는 최변방 도시였습니다. 이곳까지는 셈족들이 사는 땅이었고, 이제 이 도시만 지나면 함족 사람들, 야벳족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언어도 다르고, 신앙도 다르고, 풍습도 달랐습니다. 하란을 떠난다는 것은 다른 종족들이 사는 낯선 문화권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그곳에서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처하게 될 이런 처지와 입장을 잘 알고 있었던 데라는 ‘하란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압니까? 성경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갔다.’ 아브라함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고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고 이해가 되어서 하란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 가야 할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 가는 길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는지 모르는 채, ‘하란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라고 하신 하나님과 그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떠나갔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부류의 서로 다른 믿음을 보게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그 주신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였던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과 이 세상을 바라보며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고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순종할지 불순종할지를 결정했던 데라와 그 아들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차이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란을 떠나게 했고, 데라와 다른 아들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하란에 머물게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같이 하늘을 바라보며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데라와 같이 이 세상에 속하여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옳다고 생각될 때 순종하는 믿음입니까?
이 두 믿음을 보면 그 외형적인 모습은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른 믿음입니다. 하나는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적인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을 따라 사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서로 다른 믿음을 구분해 볼 수 있는 이 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눈을 가지게 되면, 성도들 중에서 어떤 사람이 하늘을 바라보며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고, 또 어떤 사람이 땅을 바라보며 이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구분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을 구분해서 볼 수 있는 이 눈을 가지게 되면, 그때 비로써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의 주류적인 종교가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초림의 주를 거부한 유대인들
과거에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살았던 유대인들은, 왜 그렇게 사모하며 기다려왔던 메시야가 오셨을 때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습니까? 그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 관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주시고, 다윗 시대와 같은 영광스러운 메시야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영광의 메시야로 오신 것이 아니고, 고난 받는 메시야로 오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장로들과 대 제사장에게 고난을 받고 죽음으로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해 내시는 메시야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 앞서 보내심을 받았던 선지자 세례 요한도 한때 이런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어서 ‘오실 그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립니까?’라고 질문하게 했던 것입니다.
재림의 주를 거부할 이방 교회들
왜 예수님은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은 말세에는 인간의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시대가 될 것입니다. 이때에는 과학이 발달하고 이성이 발달하여 사람들은 과학과 이성을 신봉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 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도무지 믿지 않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를 예비하고 또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 문화가 발달 되어 나가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이 그렇게 가까이 온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말세는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선지자 노아가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물 심판을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사람들이 노아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도 같습니다. 선지자의 사명을 받은 목회자들이 예수님이 반드시 재림 하실 것이라고 계속해서 경고를 해도, 사람들은 노아의 때와 같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거두고, 장가 가고 시집가는 일만 하고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거두고, 장가 가고 시집’가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예수님의 재림에 관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고대하고, 준비하면서 사는 성도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만나 첫 기근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해서 처음 맞이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기근이었습니다. 기근 때 가장 힘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그네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당시 나그네로 가나안 땅에 막 도착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그 기근이 얼마나 심각하게 그 삶을 위협했겠습니까?
이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른 채 가나안 땅까지 온 아브라함이, 어떻게 기근이 왔다고 그렇게 쉽게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 살 수 있느냐? 라고 하면서, 이 아브라함의 결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입니다.
가나안 땅 동쪽 지역은 거의 비가 오지 않는 지역입니다.
이곳에는 몇 개의 실개천 같은 개울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곳은 오직 이슬에 풀이 자라는 곳입니다. 그래서 목축하기에는 아주 좋은 곳입니다.
가나안 땅 서쪽 지역은 소량의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오는 지역입니다.
이 비가 바로 가나안 땅의 생명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땅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은 비도 그치고 이슬도 내리지 않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땅에 사람이 살 수 있습니까?
더구나 아브라함은 본토 사람도 아니고 방금 다른 곳에서 이주해 온 이방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가나안 땅에서 맞이한 그 첫 기근이 정말 견디기 힘든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야곱 때도 이 땅에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당시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고 또 거부였습니다. 이런 야곱도 그 땅에서 만난 기근을 견디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아들들에게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이 들리니 너희가 내려가서 곡식을 사 오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에서 동생 요셉을 만납니다.
요셉은 그 형들에게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당신들이 나를 애굽에 팔았다고 자책하지 마소서, 사실은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기근 중에 우리 가족의 생명을 보전하시려고 나를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요셉의 말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시 7년 기근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셔서 가족들이 생명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 말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면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막 도착한 가나안 땅에 이런 기근이 들었다고 합니다.
기근이 들면 먼저는 민심은 흉흉해집니다. 당시 가나안 땅은 방금 이주해 온 아브라함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오죽 심각했으면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까지 이동해 온 아브라함이 그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갈 생각을 했겠습니까?
물론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이 행동은 믿음의 행동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성적으로 상식적으로 판단한 결과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기근이 들자 더 이상 그곳에 버티고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살아남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당한 고난
그런데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어떤 일을 만나게 됩니까?
애굽에는 물이 넉넉하였고 곡식도 넉넉하여서 먹고사는 대는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너무 예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 왕이 후궁으로 삼기 위해 붙잡아 갔다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할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애굽 군대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들어가 사라를 구해내는 것입니까? 애굽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사라를 빼내어 오는 것입니까? 당시 아브라함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그가 믿고 섬기며 살고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역사하셨다고 합니까?
애굽 왕 바로의 꿈에 나타나셔서 역사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아내를 데리고 애굽에서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기근이 든 가나안 땅에 있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더 좋아 보이는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잘못을 마음 깊이 회개하고, ‘앞으로는 어떤 일을 만나게 되더라도 믿음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조카 롯과 헤어짐
아브라함이 이런 결심을 하였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후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애굽 왕이 사라의 일을 사과하면서 준 예물로 인해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소유가 많아진 두 사람이 동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와 롯의 목자들이 초장을 두고 경쟁하고, 우물을 두고 경쟁하면서 다투고 싸우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어떤 결정을 내립니까?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겠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조카에게 먼저 네가 살 땅을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롯이 가나안 땅을 가지겠다고 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위험을 알면서도 어떻게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할 수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그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카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게 해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어떻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롯으로 하여금 물이 넉넉하고, 마치 에덴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던, 평지 땅을 선택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산 아브라함
이후 아브라함의 일생의 삶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산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그돌라오멜 동맹군에게서 구한 것도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음대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소돔 성에 의인 10명이 있으면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낸 것도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 믿음의 절정은 바로 모리아 산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려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아들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여기에 대해 히브리서 11:17절 이하에서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자까지 아끼지 않고 순종하여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제야 내가 나를 온전히 경외하는 줄 안다.”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후에는 더 이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완성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야고보서 2:21-24절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오직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이며, 다른 하나는 이성적인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믿음의 문제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말세에 믿음으로 사는 자를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오늘날은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보다, 이성으로 사는 성도들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본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온전한 믿음을 가졌던 것을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이성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옳아 보이는 대로 애굽으로 내려가기도 하고, 자신의 후계자를 엘리에셀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이성적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녀를 가져 보려는 여러 노력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자라고 성장한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나중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사랑하는 독자 이삭까지 하나님께 번제로 바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아브라함 같이 온전한 믿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아직 이성적인 판단이 앞서는 믿음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성적인 판단대로 살기를 포기하고, 오직 믿음으로 살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결단을 보시고,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오직 믿음으로 살 수 있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이성을 넘어서는 신앙,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겠다는 신앙의 결단이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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