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
요한1서 4장 8절
1. 요한1서의 저자 사도 요한
요한1서를 기록한 사람은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이종사촌으로, 십대의 어린 나이에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후 요한은 예수님의 최측근 삼인방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하였고, 그 형제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순교하였으며, 도마와 시몬은 인도에서 순교하였고,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두 명의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고, 빌립은 튀르키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노년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날 요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모습을 지켜본 유일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마리아를 어머니처럼 돌보아 드리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후 요한은 마리아를 친어머니처럼 모시고 숨어 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로마 당국자들과 신앙 때문에 부딪칠 일이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후 요한은 복음 전파 일선에 나서게 됩니다.
이때는 기독교가 심한 박해를 받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도 붙잡혔고 순교 당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며 요한을 끓는 기름 가마 속에 던졌으나 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는 요한은 죽일 수 없는 ‘신이 내린 자’라고 하며 밧모섬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합니다.
요한은 말년에 에베소 교회에 요한복음을 써서 보냅니다.
또 밧모섬에서는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여 보냅니다. 그 후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낼 때 요한 1.2.3 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이 요한에게 에베소교회는 가끔씩 설교할 기회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요한은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강단에 올라와서 늘 “사랑에 대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지식이 발달 되어 있는 요즘은 설교로 목회자를 평가합니다.
어느 교회나 설교 잘하는 목사님이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목사님이 언제나 똑같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믿음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설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뭔가 새로운 지식 얻기를 갈망하는 현대교회 성도들은 금방 식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니 우리 목사님은 사랑밖에 아는 것이 없으시나?’ ‘어떻게 성경의 그 많은 내용 중에 사랑만 설교하시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그렇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목사님이 하시는 설교 내용보다, 설교하고 계시는 그 목사님의 믿음에, 마음에, 중심에 반응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사랑에 대해’ 설교할 때마다 성도들은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초대교회는 지식이 인정받던 시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식보다는 진실한 믿음과 마음과 고백이 더 큰 영향력을 미쳤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들을 교만케 하지만 은혜는 생명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은혜가 역사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과 역사가 나타나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의인이 되고, 죽었던 영혼들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었습니다. 지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부러운 것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는 시대가 아닙니까?
2.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
당시 성도들이 사도 요한을 만나면 자주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요한 사도 님이 경험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러면 요한은 ‘하나님이 사랑 이시듯이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신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고,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고린도전서 13:13 절 말씀을 보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 하며, 그중에 제일 으뜸인 것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이 아무리 좋고 하늘 소망이 확실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 믿음도 소망도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교회는 대단한 믿음을 가졌던 교회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2-3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여기서 안다는 말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보고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속속들이 다 알게 계시는 하나님이, ‘내가 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하나님이 그 믿음을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실 정도로 믿음이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을 아신다고 하셨습니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신앙과 행위, 수고와 인내를 내가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자칭 사도라고 하는 사람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었을 정도로 영성이 있고 분별력이 있는 교회임을 내가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인내하며 열심을 다해 충성한 교회임을 하나님이 ‘다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에베소 교회가 대단한 믿음을 가진 교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에베소 교회는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진 교회가 되었을까요?
에베소 교회는 그 어느 교회보다 훌륭한 지도자들을 모셨던 교회였습니다. 에베소에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은 당시 탁월한 지성을 가졌던 아볼로였습니다. 아볼로 이후에는 대단한 믿음의 부부였던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사역했었습니다. 그 후에 온 사람이 초대교회에서도 지성과 영성이 탁월했던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약 3년 동안 사역한 후 에베소를 떠나면서 그 수제자였던 디모데를 에베소교회 담임 목회자로 세우고 떠났습니다. 이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에서 목회하다가 로마에서 순교 당하였던 바울을 잠시 섬기러 갔다가 다시 에베소로 돌아와서 5월 아데미 축제 때에 붙잡혀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에베소교회는 담임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후임 목회자로 누구를 청빙 할까? 토론한 후에,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던 사도 요한을 후임 목회자로 청빙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목회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에베소 교회는 대단한 지도자들을 모셨던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볼로,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 바울, 디모데, 사도 요한 등등 당대 쟁쟁한 목회자들이 목회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목회자들의 지도를 받으며 믿음이 대단한 교회로 세워져 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에베소교회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4-5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 교회는 믿음이 대단한 교회였지만,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다고 합니다.
‘그 잃어버린 첫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촛대는 ‘세상에 진리의 빛을 전하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촛대를 옮긴다는 이 말은 에베소교회를 더 이상 교회로 보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에게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도 처음에는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밖으로는 불신의 세상과 싸우고, 안으로는 교회를 파괴하려는 이단들과 싸우다가 보니, 나중에는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어 갔습니다. 전에는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 온 불신 세상과 이단들을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적, 복음의 원수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고 에베소 교회가 사랑이 전혀 없었던 교회라는 말은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목회자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가족을 너무 사랑하고, 교회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가족을 지켜 내고, 교회를 지켜 나가기 위해서, 세상 권세 자들과 싸우고, 거짓된 가르침을 주는 이단들과 싸우다가 보니, 나중에는 처음 사랑 즉 죄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럴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도 극성스럽게 포교하며 유혹하는 이단들에게서 성도들을 지켜 내고,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동성애 자들을 혐오하고 배척하다가 보면, 우리도 죄인들을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사랑,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받은 그 첫사랑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가족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잘 점검해 보면 나와 신앙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이념과 사상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적개심을 가지고 미워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보십시오.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진보와 보수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성향이 같으면 무슨 잘못을 해도 감싸주려고 하고, 정치적인 성향이 다르면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적으로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입으로는 민생을 말하고 국민을 말하고 있지만, 그 행동은 마치 적을 대하듯이 원수를 대하듯이 타도하고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상대방에게서 무슨 꼬투리라도 잡아서 자기 목적을 이루어가는 수단으로 삼고자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정치인들에게 사랑은 있는 것입니까? 이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이 맞는 것입니까?
사랑을 잃으면 이렇게 됩니다.
정치를 통해 나라를 발전시키고, 더 나은 국가를 세워 가는데 내가 작은 기여라도 해 보겠다고 정치를 시작한 사람들이, 진영논리에 빠져서 오히려 나라를 잘못되게 하고, 나라를 망치고 무너뜨리고 허물어뜨리려고 안달이 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진보적인 견해를 가졌든지, 보수적인 견해를 가졌든지,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집과 편견, 미움과 적개심으로 무장한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이 없다면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될 수 없고,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국회의원은 아주 극단적인 말을 프랑 카드에 써서 길거리에 걸어놓습니다.
그러면 극성 지지자들은 좋아하겠지만, 우리 같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게 됩니다. 그 프랑 카드의 문구 속에서 그것을 만들어 걸어놓은 국회의원의 마음을, 중심을 읽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국회의원이 다른 곳에서 만나 좋은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이 좋게 들릴까요? 위선적인 말로 들릴까요? 국회의원들은 프랑 카드 하나도 신경을 써서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믿는 우리 같은 성도들의 표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린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그 사랑은 성경이 최고의 사랑, 가장 귀한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 아가페 사랑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랑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가페 사랑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길 것이다, 더 이상 교회로 보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사랑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보다, 우리가 천국을 믿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소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멘.
3.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
오늘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자발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중 하나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랑할 대상으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다는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자격이나 조건을 보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을 할 때는 먼저 자격과 조건을 따집니다.
그 사람은 사랑할 만한가? 사랑할 가치는 있는가? 사랑받을 자격은 있는가? 등등 조건을 따져서 선별적으로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선을 행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고,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기준이나 조건을 만족시켜 주는 사람에게 선행을 베풉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사랑 그 자체 이신 하나님께서 자발적인 사랑의 동기에 의해서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사랑의 위대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조건도 없이 사랑할 대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조건을 따지는 사랑은 저급한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을 따지는 저급한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상대가 사랑할 자격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자발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10 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내가 (자발적으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자발적으로)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창조 세계 속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지 않으시고 햇빛과 비를 동일하게 내려주십니다.
이 사랑은 구원 사건 속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이 사랑도, 인간의 요청이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 조건 없이 자발적인 동기에서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상호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 적인 사랑이고 자발적인 사랑이라고 해서, 하나님만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셨듯이, 인간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곳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나게 하셨습니다. 그 동산 중앙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강이 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사방으로 흘러가는 풍요로운 환경도 조성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자신들을 존귀한 존재 즉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해 주시고, 자신들을 위해 아름답고 풍요한 세상을 창조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믿음과 사랑과 헌신의 고백을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어린 자녀들을 가진 부모들이 언제 기쁨을 느끼게 됩니까?
사실 아이들이 가진 모든 것은 다 부모가 준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아이가 받은 용돈을 모아서 아빠 엄마 생일이라고 조그마한 선물 하나 사 오면 기쁨을 느낍니까? 왜요. 그 선물의 가치보다 부모를 생각하는 자녀의 그 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감사하며, 예배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무한한 기쁨을 느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런 “성도들을 보는 것이 하나님께는 기쁨”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비극은 무엇입니까?
일방적인 사랑, 반응이 없는 사랑이 많다는 데에 있습니다. 상사병을 보십시오. 이 병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나 혼자 사랑하게 될 때 오는 병입니다. 이 상사병에는 약도 없다 하지 않습니까? 짝사랑도 있습니다. 상대방은 전혀 모르는데 나 혼자 사랑하여 가슴앓이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사랑의 한 예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들 두 사람은 진정으로 사랑했으나, 두 집안이 원수 집안인 관계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서 독생자까지 주셨다”라고 하시나 세상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지도 않고, 응답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의 태도에 하나님의 마음은 멍이 드십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거듭거듭 보여주고 계시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에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는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비극입니다. 사랑은 그 속성상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사랑은 단절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거절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이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측정하는 도구였습니다.
창세기 2:16-1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과는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신하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도구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왜 선악과를 만들어 두셨냐?’라고 묻습니다.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다면 아담이 범죄 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또 오늘날과 같은 죄와 탐욕과 불의가 만연한 사회도 되지 않았을 것 아니냐? 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선악과를 만들었다고 해도,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왜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할 때 막지 않으셨냐?’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들도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가 어떤 일 때문에 불행해질 것을 알게 되면, 그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불행해질 것을 알고 계셨다면, 왜 막지 않으셨냐는 것입니다. 왜 내어버려 두셨느냐? 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일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합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생각을 알아보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그 열매 자체에 무슨 효력이 있고 효능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선악과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보일 수도 있었고, 선악과를 따먹으며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선악과는 단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과 ,믿음과 사랑을 밖으로 드러내 주는 도구였습니다.
선악과 때문에 인간이 죄인이 되고 불행해진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먼저 그 마음에 죄악을 품고 있는 죄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자신이 죄인 된 것을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선악과 금지 명령은 하나님의 최초의 율법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율법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언제나 거룩하고 선합니다. 이 율법을 범한 인간에게 죄가 있고 악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악과라는 나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계명을 어기게 된 인간에게 그 잘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악과를 보면서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왜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려고 할 때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선악과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사람을 단순한 도구가 아닌 인격체로 창조해 주신 것을, 그것도 아주 성숙한 인격체로 대우해 주고 계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아멘.
4. 하나님이 선악과를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
하나님이 선악과를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도구가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며 살고 있는 도구인 자동차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자동차는 우리 생활의 편리를 위해 만든 도구이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조작하고 사용합니다. 이 자동차는 하나의 기계입니다.
그러면 인격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창조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선악과를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성숙한 인격체로 대우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부모의 간섭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다릅니다. 부모는 더 이상 간섭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같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성숙한 인격체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판단을 존중하셨습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보면서,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었습니까?
왜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려고 할 때 막지 않았습니까? 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성숙한 인격체로 대우하셨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사를 존중하시되, 하나님의 사랑이 거절될 위험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신 것입니다.
저를 감격하게 한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나의 의사를 존중하시고, 나를 존귀하게 생각하시는구나! 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감격합니다. 더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또 하나님이 선악과를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선악과를 통해 사람들의 의사를 존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반응했습니다. 선악과 따 먹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며,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어기고, 자기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하나님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악에게 팔렸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죽음입니다. 마치 나무의 가지가 그 생명의 근원이 되는 나무줄기에 붙어 있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나 나무에서 꺾이고 떨어지면 살 수 없듯이, 인간도 생명 되시는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생명 되시는 하나님에게서의 분리는 그 즉시 영적인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그 자체의 생명력 때문에 죽어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문자적으로 “죽으리라”라고 번역된 말씀은 ‘너는 죽어가면서 죽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아담이 불순종한 그 순간부터 죽음의 원리가 그 몸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죽음의 원리가 모든 신진대사 과정을 지배하면서, 아담은 이후 900살 이상을 더 살았지만 결국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깨닫고, 자발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도록 주신 것이 바로 선악과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을 확인하고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지 못하고 죄악을 품고 범죄 함으로 실패한 삶을 산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5.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방법
오늘날 우리는 아담과 같이 선악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나무가 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경우들을 보면,
첫째, 실패와 좌절 속에서 깨닫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유교적인 영향권 아래 있는 우리나라 성도들에게는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종교개혁자 루터입니다. 루터는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비를 피하려고 나무 밑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서 같이 가던 친구가 그 현장에서 죽게 됩니다. 이때 루터는 죄인의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죄에서의 구원을 갈망하며 일반학부에서 신학부로 학부를 옮겼습니다.
이 루터는 나중에 수도사가 되고, 신부가 되고, 신학자가 되었지만 그 영혼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고행을 하기 위해 로마로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그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앞의 높은 계단을 무릎과 팔꿈치에 피멍이 들 정도로 기어오르고 기어서 내리는 고행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죄의 기쁨을 맛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절망하며 일어서고 있는데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로마서 1:17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의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을 통해 루터는 하나님의 의와 구원과 사죄의 확신은 인간의 고행이나 수고나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의를 믿음으로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비로써 복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십자가의 복음은 사실 너무나도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의 것은 아닙니다. 이 복음을 깨닫고자 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루터는 비로써 믿음 안에서 죄에서 놓여나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은 사실 너무나도 쉽습니다.
자기 의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아집과 완고함에 매이지 않는다면 복음은 정말 쉽게 깨달아집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마음이 있고,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가려진 보석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 이 복음 안에서 확신을 갖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복음을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주며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둘째, 부모나 성도들의 사랑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다수가 모태신앙이거나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살아온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부모님의 신앙과 사랑을 통해, 성도들의 사랑과 선행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부모에게 주어진 사명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사랑을 보여주며 사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이 신앙과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면 그 자녀들은 커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까지 많은 고민과 갈등은 해야 합니다.
부모의 신앙과 사랑의 좋은 영향을 받고 자란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종교개혁의 2세대 지도자였던 칼빈일 것입니다. 칼빈은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사람이었지만, 루터와 같이 신앙의 문제 죄의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이 없습니다. 칼빈의 기록들을 보면 그가 언제 회개하고, 언제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칼빈이 쓴 기독교 강요를 보면, 성경이 기록된 목적을 요한복음 21:31절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루터와 같이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의”를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칼빈은 루터와 달리 죄에 대한 고민과 고통 속에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믿음의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삼위일체로 계실까요?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한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신명기 6:4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이외에도 구약성경에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아주 많습니다.
또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묘사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복수입니다. 이 복수의 하나님을 창세기 1:26 절 말씀을 보면 ‘우리’라고 복수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더 확실합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이 삼위일체를 교리 적으로 설명하려다가 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양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한 태양에 ‘불덩어리’와 ‘열’과 ‘빛’이 있듯이 우리 하나님도 그렇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물에 비유하여 설명했습니다. 물을 병에 넣으면 ‘병의 물’로 불리고, 물통에 넣으면 ‘통의 물’로 불리고, 물주머니에 넣으면 ‘주머니의 물’로 불리듯이 하나님도 물과 같이 동일하신데, 그 존재하시는 상태에 따라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삼각형을 예로 들면서, 삼각형의 한 면은 ‘성부’, 한 면은 ‘성자’, 한 면은 ‘성령’이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리 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해 보려고 했던 사람들은 다 정통 신학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이런 설명들은 하나님의 어느 한 면은 설명할 수 있어도, 다른 면에서 보면 진리를 호도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완전히 부정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삼위일체에 대해 어떻게 말해줄 수 있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진리입니다.
여호와의 증인같이 인간 차원에서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설명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게 됩니다.
높은 차원의 사실을 낮은 차원의 지식으로 설명하려면 쉽지 않고 또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낮은 차원의 사실을 높은 차원의 지식으로는 설명하는 것은 쉽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문제가 바로 그렇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은 인간의 차원을 넘어서는 하나님 차원의 진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낮은 차원의 이해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자꾸 설명해 보려고 하면 지성의 한계가 있는 사람이기에 이단이 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현재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렇습니다.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위가 계시니 성부, 성자, 성령이신데 그 지혜와 능력과 권능이 동등하시다.”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에서 한 분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있고, 또 세 분의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으니,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또 세 위로 계시는 분이심을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어떻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는 오직 하나님만 홀로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사랑하시려면 혼자서는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그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하셨겠습니까?
그러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세 위로 계실 때에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태초에 사랑이신 하나님은 세 위로 계시면서 서로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목적도 바로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려고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때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공의의 칼을 들어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그 깨어진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려고 창세기 3:15절 말씀에서 구원의 복음을 전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시 복음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희생과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기필코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 내시겠다고 하는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 인간사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물이 빠지게 되면 부모는 자기가 죽더라도 그 자녀를 구해내고자 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께서는 친히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6.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인류를 사랑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꿈, 깨어진 그 꿈을 회복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인류를 사랑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꿈을 회복해 나갈 수 있습니까?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는 유대인을 말살하려고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gas 실에서 죽였습니다. 이 죽음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전쟁이 끝남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코리 텐 붐’이라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후 이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떻게 수용소 생활을 극복하고 살아남았는지를 간증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간증 집회를 마치고 교인들과 인사를 하고 있는데, 포로수용소에서 수많은 유대인을 죽인 그 사람이, 여성들의 옷을 벗기고 별별 못된 짓을 다 했던 그 악명 높았던 독일인이 자신의 간증을 듣고 교회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 사람을 보자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몸서리쳤다고 합니다.
마치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것 같은 모욕과 분노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 그 사람은 점점 다가와서 자기 앞에 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 여인은 그 저승의 사자와 같았던 그 사람을 향해, 원수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과 용서의 손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 여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기쁨과 사랑이 자신에게 부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그 사람이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려고 손을 내밀었더니, 하나님은 그 마음에 하늘의 기쁨과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격려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과거를 알려주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용서해 주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그녀는 이 체험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 이 여인은 남은 생애 동안 자신이 경험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의 영광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대적하고 원수처럼 덤벼드는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으로 나아가게 되면,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사랑, 특별한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우리들도 하나님이 주신 그 기쁨과 사랑 안에서, 원수를 자처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마음으로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하게 되고,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전에 종교개혁을 하였습니다. 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전도 인으로 살아갔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놀랍고 충만한 은혜를 우리 모두 다 받아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루하루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갈 뿐 아니라, 우리의 남은 생애 남은 일생의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전해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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