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자와 우매 자.(전도서 10 : 1-4절)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은 전도서 10:1-4절까지의 말씀으로 “지혜 자와 우매 자”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증거 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영적으로 분류하면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못한 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이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전도자는 세상 사람을 지혜 자와 우매자로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면 지혜자란 사물의 도리나 이치를 잘 분별하는 정신, 능력, 슬기를 말하고, 우매자란 어리석고 사리에 우둔한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우매자라 가리키고 있으며, 그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자를 지혜자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참 지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잠언 1:7절 말씀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지금껏 지혜 자와 우매 자의 차이를 여러 모양으로 서술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에서는 이 양자의 차이를 보다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혜 자와 우매 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첫째는 마음의 중심에 있어서 차이가 납니다.(2절)
전도서 10:2절 말씀에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에는 지혜자의 마음과 우매자의 마음은 정반대의 방향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오른편은 능력, 정의, 영광을 상징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왼편은 열등한 곳이며 불의한자가 거하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자와 우매자의 차이가 이미 그 중심에 결정이 되어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곧 지혜 자는 그 마음에 의와 진리의 세계를 좇고 찾으나 우매 자는 불의의 세상을 좇는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마음속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며, 그 언어를 행위로 옮겨갑니다. 이때에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가 심중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컨대 표면적으로 나타난 행위나 그 결과보다는 행위를 유발케 하는 동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며 지혜 자는 그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세상의 다른 어느 것보다 자기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키는 자들입니다.
잠4:23절 말씀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빌2:5절 말씀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톨스토이의 글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 집에서 일하던 두 종이 하루는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큰 소리가 들리기에 톨스토이가 나가서 보니까. 종 둘이서 서로에게 별명을 붙인 것이 감정을 상하게 하였던지 서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좀 훌쭉하게 생긴 종이 뚱뚱하게 생긴 종에게 곰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러자 곧 뚱뚱하게 생긴 종이 훌쭉하게 생긴 종에게 원숭이라고 별명을 붙인 것입니다. 곰, 원숭이하면서 서로 언쟁을 합니다. 이 모습을 바라본 주인이 이런 말을 하면서 서로의 불화를 중재시켜 갔습니다. 이때 훌쭉하게 생긴 종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저 사람을 곰이라 불렀지, 너는 저의 삶이 곰이기 때문에 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아니다. 네 마음속에 곰과 같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을 곰이라 부른 것이다.” 그리고 곰이란 별명을 가진 뚱뚱한 종에게는 “네가 저 사람을 원숭이라고 불렀지, 저 사람이 원숭이 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이 네겐 원숭이처럼 보여 진 게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무엇인가 던져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믿음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이 세상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물, 하나님의 세계로 더 깊이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사람을 보느냐에 따라서 헐뜯을 수도 있고, 그를 격려할 수도 있고, 그를 일깨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말에 있어서 차이가 납니다.(3절)
전10:3절 말씀에 “우매한 자는 길을 갈 때에도 지혜가 부족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가 우매함을 말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은 그 마음의 생각을 말로서 표현합니다. 따라서 지혜 자와 우매 자는 그 언어가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 우매 자는 어떻게 말로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는 시간과 장소를 분간하지 못하고 항상 자신의 우매한 생각을 언어로 발설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매 자는 사리에 맞지 않는 말(잠18:6절)과 거짓된 말을(잠15:28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입술은 패려하며(잠15:4절)에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지혜 자는 그 마음의 생각이 진실하고 신중하므로 그 말도 진실하고 신중합니다. 그는 사리에 맞는 말을 골라서 하며, 경우에 합당한 언어로(잠25:11절)에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로 표사하고 있습니다. 실로 지혜 자는 그 입에 재갈을 물리고(약1:26절), 또한 샘이 두 가지 물을 내지 않듯(약3:11절)이 항상 참되고 경건한 언어를 입에 두고자 노력 한다는 것입니다.
엡 4:29절 말씀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잠16:24절 말씀에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래 전 선교사 한 분이 중국에 가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에, 한 부인이 맨손으로 10년 동안 깊이 25자, 너비 10자의 큰 우물을 파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교사가 “왜 맨손으로 우물을 파느냐?”고 묻자 부인은 “저는 명예도 돈도 없습니다. 맨손으로 우물이라도 파야 어떤 덕을 쌓고, 자손들에게도 이 공적을 통해서 축복의 유산을 넘겨주려고 우물을 파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선교사는 “맨손으로 아무리 수백 자 우물을 파도 그것으로는 구원 받지 못합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고 말씀에 뿌리 내리는 삶이 복 받고 구원 받는 길이요, 자손들에게 축복을 남겨주는 길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가르쳐 주어서 그 부인을 구원받도록 전도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이 가장 잘 부르는 노래가 “빈손 들고 앞에 나가 십자가를 지고” 라는 찬송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종교적 형식주의보다는 말씀의 검을 사라는 교훈입니다.(찬송:524장)
셋째는, 행동에 있어서 차이가 납니다.(4절)
전도서 10:4절 말씀에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손함이 큰 허물을 용서 받게 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혜 자와 우매자의 행위는 여러 가지로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본문 4절에서 전도자는 공손함이 이 두 부류의 사람을 판별 짓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우매 자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경솔하게 대항하거나 거역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우매 자는 주권자의 노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 자는 그 반대로 경솔히 그 자리를 뜨거나 화를 내지 않고 자기 직무를 포기하지 않으며, 도리어 노를 인내함으로 잘 견디게 됩니다. 결국 그의 인내와 순종은 행여 있을지도 모를 그의 과오를 덮어주고, 동시에 주권자의 마음을 녹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손함과 순종이야 말로 지혜 자와 우매자의 가장 큰 차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삼상15:2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 2:14절 말씀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후서 1:12절 말씀에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꿈을 지닌 사람들은 뜻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 계획을 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런 이유로 인해 꿈은 근면과 성실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19세기의 스코틀랜드 문필가인 토머스 카일 라일은 프래드릭 대왕에 대하여 천재성이란 무엇보다 “고난을 감내하는 탁월한 능력”을 의미한다고 말했고, 전기의 발명자인 에디슨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지도자들, 상당수의 예술가들은 이 말들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노력 없이 이루어진 것 같은 그들의 작품들의 배후에는 가장 엄격하고 자기 수양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패데리우스키는 그는 매일 많은 연습에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가 한 소절, 한 장의 악보를 완벽하게 연주하기 위해 50번 이상 반복하여 연습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한번은 빅토리아 여왕이 그의 연주를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패데리우스키씨 당신은 진짜 천재이군요” 그러자 그는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여왕 폐하 저는 천재이기 이전에 노력가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천재들도 각고의 노력 없이는 안 된다고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노력 없이 저절로 믿음생활을 잘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는 우매자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마음의 중심에는 물론이고 말과 행동에 있어서도 우매 자들과 차이가 나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발자취가 천국을 향하여 나가는 길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삶을 위해 항상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021년 11월 28일 (참빛교회)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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