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하신 일
요한복음 17:6-8
사람들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구원을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받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다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2절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들이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또 다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39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려주시는 것이 구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원은 그것을 보는 입장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다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첫째는 구원 받게 될 사람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시는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6절입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라는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야훼’ ‘아도니아’ ‘주’이신 것을 알려 주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드러난 신적 영광과 권세와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그 만난 하나님의 이름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족장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고 합니다. 족장들은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서 새롭게 알게 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이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보다 앞서 행하시면서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사사시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기드온이 만난 하나님은 ‘여호와 살롬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기드온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미디안 족을 무서워하여서, 땅 속에 파 놓은 포도주 틀에 숨어서 곡식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드온이 만나 믿음과 평강을 주신 살롬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 주는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된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다른 말로 하면 예수 믿고 구원 받을 사람들에게 그 이름을 나타내주는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 성탄절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주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전해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7절입니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전해주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신앙에서 아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3절 말씀을 보면 “영생”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멸망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신앙에서 아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안다고 할 때 기본적으로 그 앎은 지식적인 앎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상계 5동 주민 센터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 우리는 상계 5동 주민 센터는 이 길을 따라 쭉 가시면 나타나는 계상 초등학교 건너편에 있어요? 라고 알려 줍니다. 이렇게 우리가 길을 가르쳐 줄 때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지식적인 앎입니다. 상계 5동에 대한 지식이 없으며 길을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모른다. 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모른다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은 지식적인 앎을 이야기 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경험적이고 체험적인 앎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경험적으로 체험적으로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신입니다.
이 차이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가나 문제인 대통령을 다 압니다. 그런데 반대로 문제인 대통령에게 가서 ‘참빛교회 김종하 목사를 아세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모른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제가 문제인 대통령을 알고 있는 것은 지식적인 앎입니다. 그런데 문제인 대통령에게는 이런 지식이 없습니다. 저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경험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른 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앎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경험하고 체험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은 어디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까?
우리 신앙은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운 지식에서 시작되지만, 이 지식적인 신앙에서 결국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은 그 살아가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경험하면서 알게 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음 안에서 경험한 신앙은 무엇입니까?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도 구원해 주실 수 있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당시 근동지방의 강대국이었던 그돌라오멜과 동맹을 맺은 4개국 연합군과 싸워서도 이기게 해 주신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또 모리아 산에서는 자신보다 앞서 행하시면서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주신 여호와 이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경험적이고 체험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신앙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5,000명, 여자와 어린이까지 합치면 약 20,000명은 되었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신 일이 있으십니다. 이 때 사람들은 영광의 메시야,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은 영광의 메시야가 아니라 고난당하는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믿음으로 내 몸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서 예수님은 우리를 식인종으로 아는가?
우리를 어떻게 보고 그 몸을 먹고 그 피를 마시라고 하는가? 우리가 이성도 상식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수군거리며 예수님께 반기를 들고 떠나갔습니다. .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제자들은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저 사람들과 같이 가려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제자를 대표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거룩한 자 즉 메시야 이신줄 믿고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간 사람들과 예수님 곁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떠나간 사람들은 ‘아는 지식’에 근거해서 믿으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서는 ‘이 분을 우리의 왕으로 삼아야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자 ‘예수님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하나 둘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군중들과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 앞에서도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이신 줄을 믿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예수님을 떠나지 않게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바른 믿음은, 지식에 근거를 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체험하고 경험해서 알게 된 믿음입니다. 믿고 아는 이 신앙이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신앙입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주신 사람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하신 일이 또 무엇입니까?
둘째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해 주는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8절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주신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죽은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보지 못하는 눈을 떠서 다시 보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큰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것들 중에서 가장 큰 은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신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을 만나 병 고침을 받는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했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이 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주어집니다. 그래서 로마서 10:17절에서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전해주신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 받은 사람들의 ‘입에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입에 여러분의 마음에 이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멘.
이렇게 볼 때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이 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으로 역사합니다.
루터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성당 앞에서 고행을 하다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로마서 1:17절의 말씀을 깨닫고, 평생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았으며, 나중에는 이 말씀에 의지하여 종교개혁에까지 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으로 가고 길까지 찾아와서 만나 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복음의 말씀을 주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평생 이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증인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서 13:11-14절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구원의 믿음을 가지게 됨으로 삶의 방황을 끝내고 초대교회를 든든한 반석위에 세우는 교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건강만 주시고, 물질만 주시고, 이 세상 것들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줄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주전 1,500년경 모세를 통해 창세기를 기록해 주신이래, 주후 100년경 사도요한을 통해 요한계시록을 주시기까지 무려 1,6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계속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들을 계속 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이 성경 말씀의 한 글자 한 글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말씀이 홍수처럼 흘러넘치고 있는 시대입니다. 여러분이 방송이나 인터넷이나 유튜브 어디든지 열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차고 넘칩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싶을 때 읽을 수 있고, 듣고 싶을 때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매 주일 우리교회에서 전해지는 말씀은 우리에게 특화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역사해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도, 구원도, 약속들도, 인도하심도 다 말씀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 하나님은 오늘날도 말씀을 통해 역사해 가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그 받은 말씀을 중심에 두고 생활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은 특히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성탄절로 지키는 날입니다.
그러면 이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아들을 보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약속은 많이 하지만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속임을 당하고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기를 치기 위해 고의로 약속을 어기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려고 하나 능력이 없어서 여건이 되지 못해서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지킬 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약속을 가장 잘 지키지 않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정치인들일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국민의 표를 얻어서 당선되기 위해서 수많은 약속을 하지만 나중에는 지키지 않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고 있는 그 약속들 중에 단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믿음의 근가가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한 번 하신 약속은 상황이 어떻게 바뀌든지 관계없이 끝까지 성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성탄절 날에 만나게 되는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수많은 약속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들들 중에 가장 중요한 약속은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메시야를 보내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어떻게 이루셨습니까?
갈라디아서는 보면 약속을 이루실 “때가 차매”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인류의 구세주를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이 지켜진 그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확인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과 같이 우리들도 약속을 잘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이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이 또 무엇입니까?
둘째,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어떻게 사랑합니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내게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과 자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사랑할 가치도 없는 그런 사람들까지도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요한복음 3:16절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하나님이 사랑에서 제외될 사람, 제외될 민족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다 이 사랑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멘.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3: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사랑의 대상에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던 가롯 유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가롯 유다까지도 사랑하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24절입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정죄했던 세리와 죄인들은 물론, 유대인들이 멸시했던 이방인들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사 신성을 부인하시고 인성을 취하신 것이 성육신입니다. 이 성육신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 사랑은 인간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인간 차원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그 본체가 사랑자체이신 하나님차원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랑, 하나님 차원의 사랑으로 죄의 저주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 가장 어려운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하나 뿐인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돈은 줄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내 시간은 내어줄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지혜와 지식도 나누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랑의 크기가 내가 내 생명을 사랑하는 사랑의 크기보다 더 크지 않으면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번 돈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우리 자신은 남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주어도 여전히 우리 자신은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사업적인 마인드와 지혜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도 여전히 우리 자신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은 다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내 생명을 내어주고 나면 나에게는 남은 것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을 주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우리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가치와는 전혀 비교도 안 되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고귀한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이 사랑의 희생을 경제적인 가치로 따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가치 기준으로 이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수 백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은 인간 차원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 차원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상해 하는 것이 이것 아닙니까?
우리가 사람들에게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어도,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니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믿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신 분은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이 귀하신 하나님도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보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귀하신 분이시지만, 우리가 관계론 적으로 보면 내가 없으면 그런 하나님이 계시는 것도 내게는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그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자신이 죽고 없어지면 그 모든 소유, 그 모든 업적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난 후에야 온 천하를 얻은 것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만이 다른 사람의 중요성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웃 사랑을 가르칠 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그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 보여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자기를 사랑할 뿐 아니라, 그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이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이 또 무엇입니까?
셋째, 우리 대신 죽어주심으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이 죄가 인류의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이 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저주 아래 살게 했습니다. 이 죄는 인간과 인간의 사이를 파괴하였을 뿐 아니라, 오늘날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과 범죄를 가져왔습니다. 이 죄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파괴하여 자연도 더 이상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연도 지진, 태풍, 허리케인, 쓰나미를 통해 인간에게 혹독한 시련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인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문화를 발전시켜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소득을 높이고 삶의 질을 개선하여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양질의 교육을 제공함으로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또 종교와 철학에서는 인간성과 도덕성을 고양시키므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이런 노력들을 통해서 이 땅에 유토피아를 이루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 세상에 찾아온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더 지능적이고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악이었습니다. 인류역사가 진보되고 발전되어 갈수록 사람들의 심성은 점점 더 악화되고 갔습니다. 범죄는 점점 더 지능화되고 조직화 되어 갔습니다. 악을 제어하고 선을 고양하려고 세운 국가라는 조직에 의해 세계 1, 2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경험을 거듭거듭 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해야겠다는 희망을 버렸습니다. 죄의 종 된 인간이 이 땅에 유토피아를 이루려고 하는 것 자체가 헛된 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교육을 더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지능적인 범죄를 저질렀고, 교육이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서 2장에 나오는 신상계시는 인류역사가 진행되어 갈수록 인간성은 더 타락해 갈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사는 시대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릴 때 보다 오늘날은 물질적으로는 부요해졌고 지식적으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인간성 부분에서는 더욱 타락하고 악해진 시대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혼이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동성연애자가 서울대의 총학 회장이 되고 심지어 목회자가 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죄의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악화된다는 것입니다.
이 죄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날이 바로 성탄절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의 문제를 십자가에서 다 처리해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이 성탄절에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감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이 성탄절에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하며 성탄절을 기념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성탄절에 특별히 감사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놀라운 사랑을 실천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죄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2021년 성탄절을 맞이하여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그 큰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남은 우리의 일생을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야할지를 기도하고, 고민하며, 경건하게 보내시는 하루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입 교 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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